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꼭 3년 뒤인 1983년 5월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돌아가시기 반년 전쯤에 회복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런 의사의 선고를 듣는 역할은 언제나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 그 사실을 고할 수는 없었으므로 적당한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것도 내 몫이었다.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공장(마치코바)은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내리 적자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회복 가망이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문을 닫는 게 손해를 최소화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버지는 폐업에 동의하지 않았다. 의사도 당신께 그 일이 보람 있는 일이라면 마지막까지 일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공장은 유지됐고 그 때문에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경안정제와 강력한 진통제 처방을 받고 있던 아버지는 줄곧 몽롱한 의식상태였기 때문에 갖가지 난처한 사고를 일으켰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공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시영 버스와 추돌하는 교통사고를 냈는데도 본인은 그걸 기억하지 못했고, 시 교통국으로부터 전화로 그 사실을 통고받은 내가 사죄하러 달려간 일도 있다. 거래처에 지불할 수표 금액을 기입할 때 한 자릿수 더 높여 적어 넣는 바람에 내가 용서를 구하며 회수하러 다니느라 바빴던 적도 있다.
그런 시절에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다케다양과 F가 소속된 합주단 주변을 스토커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들도 나를 동정했던지 기꺼이 얘기 상대가 돼 주었다.
그해 여름 다케다양과 F는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두 사람 모두 교사였으므로 휴가도 있고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정도의 돈도 있었다. 그들의 여행담 중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프롬스Proms 음악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연주를 들었다는 얘기였다. 레이먼드 레퍼드Raymond Leppard가 지휘하는 영국 실내관현악단이었다고 한다. 레퍼드는 나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다케다양에 따르면 그야말로 당대 제일의 지휘자로, 당시 유명했던 네빌 마리너Neville Marriner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벼움과 가뿐함은 달라. 마리너는 가벼움, 레퍼드는 가뿐함이야”라고 다케다양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가벼움’이란 경박하다는 것이고, ‘가뿐함’은 경쾌하다는 말인 듯했다. 나는 서둘러 레퍼드 지휘로 영국 실내관현악단이 연주하는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의 <수상 음악="">Water Music> 레코드를 샀다. 들어 보니 과연 그 음색은 시원시원하고 투명했다. 이 음악을, 그것도 현장에서 그들은 듣고 온 것이다. 그런 기회가 내겐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선망에 사로잡혔다.
병세가 악화일로를 걷던 아버지는 마침내 설득을 받아들여 폐업 결단을 내렸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아버지에게 나와 큰형이 폐업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공장 설비를 해체해서 중고기계업자에게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종업원들에게 퇴직금을 주었다. 오래 공장장을 맡아온 제주도 출신 안 아무개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날이 다가온 것을 알고는 말없이 퇴직금을 받아들고 조용히 떠났다. 길진 않았지만 아버지의 공장이라는 직장을 갖고 있던 나도 다시 프리터 신세로 되돌아갔다.
아버지는 큰형이 사는 지방도시의 병원에 입원했다.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입원이었다. 그 뒤 2개월 정도 무익한 고통을 겪은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을 감싸고 있던 서정시와 같은 분위기는 전혀 없었고, 그저 산문적인 최후였을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임무가 내겐 있었지만 이제 그것마저 없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부모님은 연달아 세상을 떠났으나 형 두 사람은 옥중에 있었고 석방될 가망은 전혀 없었다. 내 상상은 항상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있었다. 고문과 학대 때문에 형들이 옥사할 것이라고 정말 생각했고 걱정했다. “어떤 나쁜 일도 실제로 일어난다”고 나는 늘 자신에게 확신시키고 있었다. 형들의 뼈를 수습하러 내가 한국으로 가야 하는 날이 오리라는 걸 정말로 각오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개월 뒤 나는 난생처음 유럽여행을 떠났다. 목적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국제사면위원회) 등 몇 곳의 인권단체를 찾아가 형들을 비롯한 한국 옥중 정치범의 위기적 상황에 대해 호소하는 일이었으나, 그것은 말하자면 표면적인 목적에 지나지 않았다.
일생에 단 한 번만, 그렇게 마음먹었다. 단 한 번만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뒤러Albrecht Durer,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 그리고 고흐Vincent van Gogh, 그들의 작품 실물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현장에서 진짜 음악을 들어보고 싶었다. 나는 이제 죽든지, 형들처럼 옥중생활을 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설익은 생활을 앞으로도 질질 끌고 가게 될지 예측할 순 없었지만, 하여튼 그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본고장에서 진짜를 보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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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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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 >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 >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