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때 가난 때문에 떠난 고향을 어머니는 다시 자식들 옥바라지를 위해 들락거리게 됐다. 60여 회나 일본과 한국을 오간 어머니는 1977년 자궁암 진단을 받고 교토 시내 병원에서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다. 그때는 ‘조기 발견’했다던 암이 그 2년 뒤인 1979년 재발했다. 그해 11월 한국에 건너가 자식들과 마지막 면회를 한 어머니는 12월 12일 교토 시내 병원에 재입원했다.
“이미 회복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사실에 나는 압도당했다. 절망 속에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랜 고통을 어떻게 하면 덜어줄 수 있을지,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하면서 생활의 모든 것을 거기에 집중시켰다. 덮쳐오는 죽음에 맞설 작정이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죽음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5개월간 나와 여동생이 교대로 병원을 지켰다. 어머니가 듣고 마음이 편해지도록 무슨 음악 카세트테이프라도 마련해보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닐니리야, 닐니리야”라는 조선민요 같은 구절이나 <도라지>를 흥얼거린 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노래를 부른 적이 없이 없었고, 일본 대중가요 외에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했지만 결국 ‘일본의 노래’라는 카세트를 사가지고 갔다.
입원한 지 2개월 뒤인 어느 맑게 갠 날 병실에 가 보니 어머니가 침대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면서 “아, 애처롭구나 아, 흰국화. 사람의 정조도 이래야 하네”하고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뜰에 무성한 풀>의 일절이다. 카세트로 들어본 이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래야 하네(가쿠테코소)” 등의 옛 일본어는 현대의 일본인들 중에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하물며 어머니에겐 의문투성이의 주문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침대 옆에 있던 여동생에게 그 뜻을 물어 설명을 듣고 난 뒤 “아, 그렇구나. 좋은 구절이야”하면서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웃었다.
공장 일을 끝내고 지친 아버지는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반찬을 사서 병실에 들렀다. 큰 형은 먼 지방도시에 살았고, 우리 가족 경제생활을 지탱하기 위한 사업에 쫓기고 있었다. 2남과 3남은 어머니의 병에 대해 자세한 소식도 듣지 못한 채 한국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의 고통은 격심했으나 그게 좀 가라앉을 때면 어머니를 복판에 두고 완전히 허리가 구부러진 아버지, 나와 여동생 해서 모두 4명이 별말도 없이 저녁밥을 먹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친밀해진 작은 공동체였다. 그 작은 병실만이 마치 만추의 오후에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밤이 이슥해져 홀로 자동차를 운전하며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공기 자체가 이상하리만큼 투명하게 느껴졌다. 세상은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그리고 얼마나 불행한가! 짙은 죽음의 그림자에 에워싸인 친밀한 공동체, 어머니의 죽음으로 무너질 운명에 처해 있는 덧없는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럴 때 언제나 내 뇌리엔 <뜰에 무성한 풀>의 멜로디가 흘렀다.
<뜰에 무성한 풀>의 원곡은 <여름의 마지막 장미 The Last Rose of Summer>다. 아일랜드 시인 토머스 무어Thomas Moore(1779~1852)의 시에 존 스티븐슨Sir John Stevenson(1761~1833)이 곡을 붙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장미’를 ‘흰국화’로 바꾸고 <뜰에 무성한 풀>이라는 제목으로 1884년 간행된 소학교 창가 교과서에 소개돼 있다. 물론 1928년 6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에 건너온 어머니는 당시 조선여성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소학교에 다닐 형편도 못 됐기 때문에 이 노래를 몰랐던 게 당연했다.
3연으로 된 원시는 여름 막바지에 한 송이만 남아 피어 있는 장미에 가탁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우정이 삭고
빛나는 사랑의 고리에서
보석들이 떨어져 갈 때
나도 곧 뒤를 따르리.
진실한 마음들이 시들어 떨어지고
그리운 것들도 사라지면
아! 누가 남아 살아갈까
이 황량한 세상에 홀로
So soon may I follow,
When friendships decay,
From Love's shining circle
The gems drop away.
When true hearts lie withered
And fond ones are flown,
Oh! who would inhabit,
This bleak world alone?
어머니가 대량출혈 끝에 차갑게 식어 숨을 거둔 것은 1980년 5월 20일 미명이었다. 우연이지만, 신군부의 ‘12.12 쿠데타’가 일어난 날 재입원했고 약 5개월간의 고통스러운 투병생활 끝에 5.18 광주항쟁 직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것은 ‘서울의 봄’이라 불린 꽃이 짓밟히고 흩뿌려진 과정과도 부합했다.
어머니 장례식은 집에서 간소하게 치렀다. 소모당한 데다 마음을 놓아버린 우리는 장례식 일체를 장의사에게 맡겼다. 스님의 독경과 함께 어머니는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우리는 불교도가 아니어서 스님은 장의사가 임시변통으로 불렀다. 물론 거기에 <레퀴엠>은 없었다.
부조리한 운명으로 잔혹한 죽음을 맞이했던 어머니는 부드럽고 명징한 포레의 레퀴엠보다도 ‘진노의 날’이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베르디의 그것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머니에게 어울리는 레퀴엠은 <뜰에 무성한 풀>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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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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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