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포레Gabriel Urbain Fauré의 <레퀴엠 Requiem>이 내게 가르쳐준 건 ‘암굴왕(岩窟王)’이라는 별명을 지닌 대학시절 벗이었다. 그는 도호쿠(東北)지방에서 상경해 나와 같은 대학에 들어왔으나 수업엔 몇 번밖에 나오지 않았고 결국 중퇴하고 말았다. 살아가는 일에 서툰 사람이었다. 제주도 출신 재일조선인이 경영하는 불고깃집(?肉屋)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을 하면서 대학 YMCA 기숙사의 어둡고 좁다란 다락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도 내 형들의 구원활동에 참여해준 사람이다. 원래 살갗이 희고 눈이 커서 어쩐지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와 닮은 모습이었는데, 햇빛이 닿지 않는 다락방 생활 때문에 점점 표백돼 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형들을 염려해주었지만 그런 그 자신이 마치 수인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갔다간 옥중의 형들보다 그가 먼저 일을 당하지 않을지 나는 걱정했다.
그 ‘암굴왕’이 “이런 거, 알고 있어?”하고 들려준 것이 앙드레 클뤼탕스Andre Cluytens 지휘,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 연주의 <레퀴엠>이다. 대학시절의 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솔직히 잘 몰랐고, 더욱이 기독교 종교음악에 대해선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포레의 <레퀴엠>을 들어본 것은 다름 아닌 ‘암굴왕’이 권해준 덕분이다. 처음 들어 본 그 곡의 세계는 비통하다기보다 조촐한 행복(?福)이라고나 해야 할 세계였다. 종교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세속적인 인상이었다. ‘암굴왕’이 저 어두운 천장 밑 다락방에서 이런 음악을 듣고 있었다니.
포레가 이 곡의 작곡에 착수한 것은 1885년 7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1887년 12월 모친이 타계하기 직전의 시기다. 마들레느 교회에서 열린 초연 당시 “죽음의 공포가 표현돼 있지 않다” “이교도적이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확실히 이 곡에는 당시 가톨릭 미사에는 없어선 안 될 ‘진노(震怒)의 날'(디에스 이라이Dies Irae)이 빠져 있다.
‘진노의 날’이란 기독교 종말론에 의한 최후의 심판을 말하는데, 미사곡에서는 “진노의 날, 그날은 다윗과 시빌라Sibylla의 예언대로 세상이 모두 불타 잿더미가 되는 날이다. 심판관이 나타나 모두를 엄중히 심판할 때 그 얼마나 두려울까”하고 노래 부른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감이 표현돼 있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포레는 “죽음은 고통이라기보다 영원한 지복의 기쁨으로 가득 찬 해방감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F와 친해진 뒤 나는 그녀에게 “내 장례식은 종교의식 없이 진행됐으면 좋겠다. 다만 포레의 레퀴엠만 조용히 흘렀으면…”하고 말한 적이 있다. “죽다니, 싫어”라고 하든지, “그래, 꼭 당신이 말한 대로 할게”라는 응답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감동 먹은 나머지 울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도 했다. 나는 아직 F라는 인간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몹시 의심스러운 듯 “에엣? 포레?”라고 내뱉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장례식에 포레라는 건 그녀가 보기엔 너무나 상투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식을 연출하겠다는 내 자의식 과잉 그 자체가 그녀에겐 우스웠던 것이다. 나는 좀 심기가 불편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기분에 개의치 않고 F는 웃으면서 “그게 좋아요”라며 말을 이었다. “그거, 팅게리의 장례식.”
장 팅게리Jean Tinguely는 고철을 사용한 대작으로 유명해진 현대 아트의 거장이다. 역시 저명한 여성 아티스트 니키 드 상팔Niki de Saint Phalle과 결혼한 뒤 두 사람 합작으로 여러 도발적인 아트 퍼포먼스를 했다. 그 중 하나가 가톨릭 성지인 밀라노 대성당 앞마당에서 거대한 페니스 모양의 불꽃을 쏘아 올린 것이다. 또 미국 네바다 사막에서 화약을 사용한 핵실험 반대 아트 퍼포먼스를 시도하다 실패해서 다친 적도 있다.
그 팅게리가 죽자 실생활과 아트에서 가장 사랑한 파트너를 잃은 니키는 로마민족(이른바 ‘집시’)의 악대가 선도하는 긴 장례행렬로 그를 저 세상에 떠나보냈다. 내가 죽으면 그것처럼 떠들썩하고 난잡한 악대의 음악에 실어 보내주겠다고 F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포레 얘기에 웃었던 그녀지만 이런 얘기를 할 때는 눈물을 글썽였다.
지금의 나는 내 장례식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따라서 포레도 필요 없다. 다만 F가 정말 바란다면 팅게리 흉내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나, 이미 나 자신이 당시의 어머니 나이를 넘어서 버렸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연재 앞부분에서 썼다시피 F에겐 <등대지기>가 세상 떠난 아버지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인데, 내게는 그것이 <뜰에 무성한 풀(庭の千草)>(아일랜드 민요)이다. 일본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소학교 창가다.
어머니는 1922년생이다. 1980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생애는 한 마디로 고생의 연속이었으나, 1970년까지 다른 재일조선인 1세 대다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의 경제성장 덕택에 집안 사업(家業)도 잘 풀리고 4남 1녀의 아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란 1980년대는 어머니에겐 오랜 고생 끝에 마침내 보답을 받게 됐다는 생각을 갖게 된 나날이 아니었을까. 한데, 1971년 무자비한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으로 모국유학을 가 있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학원침투 간첩단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이다. 그리고 취조 중에 분신자살을 기도해 큰 화상을 입은 둘째 아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셋째 아들은 ‘비전향’이라는 이유로 형기 만료 뒤에도 사회안전법에 의해 구속이 연장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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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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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