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도 아니요 음악 관계자도 아닌 나 같은 남자가 고개를 들이미는 걸 합주단 멤버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오빠부대’ 멤버나 ‘스토커’처럼 비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 자신에겐 아마추어라곤 하나 음악가들을 가까이 접하는 건 큰 자극이 됐고 암담했던 날들 속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지휘자인 하야시(林)상은 여성속옷 생산업체 직원이었는데, 음악에 관해서는 상당한 이론가였다. 그는 오래도록 나와 얘기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초보적인 질문에도 싫증 내지 않고 상대해 주었다. 어느 날 하야시상은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는 괴팍한 시골 영감이다”는 평을 했다. 물론 긍정적인 뉘앙스를 가미해서 한 말이었다. 꽤나 자유롭게 얘기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직 브루크너를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자유로운 비평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브루크너를 들을 때마다 저 옛날의 하야시상을 떠올리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했던 한 마디가 내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리라.
콘트라베이스(contrabass)의 마루이(丸井)상은 두부가게 주인이라고 했다. 두부가게 주인과 음악가는 내 머리로는 잘 연결할 수 없었다. 내가 자란 동네에 있던 두부가게집 아들은 난폭하고 늘 자기보다 어린아이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러 갈 때는 몹시 긴장하곤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두부가게 주인도 존재했던 것이다.
두부가게는 전통적으로 장인(職人)적인 직업이어서 경험 없이 선뜻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마루이상은 부친의 가게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재료를 마련해서 두부를 만든다. 고된 노동이다. 한낮이 되면 그때부터는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 응대를 해야 한다. 그 판에 박은 듯한 일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됐을까. 두부가게 주인으로서의 일상과 음악활동을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억누르기 힘든 흥미와 존경 같은 감정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많은 연주자들이 자신의 파트만 소화하기에 급급한데도 마루이상은 그것이 저음부 담당자의 특징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휘자처럼 연주 전체를 조망하면서 적절한 지적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기야마(杉山)상이라는 중년 남성 첼로 주자가 있었다. 제지회사 창고에서 지게차(folk lift)로 거대한 종이 더미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 쌓는 일을 했다. 술을 좋아해서 일이 끝난 뒤 한잔하는 걸 무엇보다 즐겼다. 선술집에서 잔술을 주문하면 점원은 부러 술을 잔에 좀 넘치도록 따라주었다. 받침접시에 넘쳐 흐른 술은 손님에 대한 서비스다. 점원이 흘러넘치게 한 술이 적을 때는 “서비스가 형편없군”하고 스기야마상은 정색을 하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스기야마상은 어쩐지 F와는 배짱이 맞은 듯 곧잘 그녀를 술자리에 불러냈다. F도 스기야마상이 술을 마시며 하는 이야기에 즐겨 귀를 기울였다.
스기야마상은 홋카이도(北海道) 출신이었다. 어릴 적 그가 살았던 마을에 군악대가 왔다. 스기야마 소년은 완전히 거기에 넋이 빠져 군악대 행진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 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스기야마 소년에겐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쌓여 갔다. 음악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으나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소학교 피아노로 독학하기로 했다.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일념으로 눈길을 걸어 학교를 오갈 때 장화에 구멍이 나서 추위 때문에 몹시 고생했다고 한다. 그래도 스기야마상은 교육대학 음악과에 합격했고 졸업 뒤에는 삿포로(札幌)교향악단에 채용됐다. 순풍에 돛 단 듯 음악인생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스기야마상은 삿포로교향악단을 떠났다. 이유로는 “술 때문에 실패했지”라는 말 외에 더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무드 뮤직(mood music)을 연주했고 때로는 취객의 노래에 반주를 해주기도 했으리라. 그 뒤로도 그는 “술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며 전전한 끝에 결국 홋카이도에서 멀리 떨어진 교토까지 흘러들어왔고, 그때 연상의 미인을 만나 자리를 잡았다.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가 유엔 본부에 초청받아 카탈루냐Cataluna 민요 <새의 노래>를 연주하고 “내 고향의 새는 피스peace, 피스 하고 웁니다”라고 얘기한 것은 1971년, 그의 나이 94살 때였다. 그 연주는 레코드로도 취입돼 큰 화제가 됐다. 카잘스는 평생 프랑코 독재정권에 저항했고, 나치스 제3제국의 명사였던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와의 공연도 끝까지 거부했다. 객지인 푸에르토리코에서 카잘스가 세상을 떠난 것은 유엔에서 연주한 지 2년 뒤였고, 주검이 고국 카탈루냐로 돌아간 것은 독재자 프랑코가 죽은 뒤인 1979년이었다.
스기야마상도 <새의 노래>를 연주했다. 그 연주에는 카잘스 못지않은 애절한 정서가 스며 있다고 다케다양과 F는 늘 말했다. 어려움 없이 자라 엘리트적인 음악교육만 받은 젊은 연주자들은 낼 수 없는 맛이 났다.
그 무렵 나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중산계급의 세계와 클래식 음악의 세계는 죽이 잘 맞는다. 하지만 양자를 등식(等式)으로 묶을 순 없다. 예컨대 모차르트는 궁정과 귀족의 비호를 받았기에 수많은 명작을 작곡할 수 있었지만 그 곡들은 귀족사회의 가치관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음악은 어쩐지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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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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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