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만난 다케다양과의 관계는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그 뒤로도 오래 계속됐다. 내가 사춘기 때부터 청년기에 걸쳐 그녀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음악과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으리라. 음악은 나와 그녀를 맺어주는 관계의 모든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요소였던 건 분명하다.
나와 다케다양은 고등학교도 함께 다녔으나 대학은 각기 다른 데로 진학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69년, 곧 전 세계적인 학생반란(68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였고, 일본에서도 격렬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도쿄대학은 학생운동 때문에 사상 처음으로 입학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나는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들어갔으나 캠퍼스는 학생들에 의해 봉쇄당했고 수업은 완전 중단 상태였다. 대다수 일본인 학생들은 학생운동단체 어디엔가에 가입해 집회와 데모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거기엔 가담하지 않고 재일조선인(한국적) 학생 서클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출입국관리법을 개악해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재일조선인들 사이에 항의운동이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이 운동에 몰두해 각지에서 벌어지는 집회와 데모에 참가하면서, 오늘은 도쿄 내일은 오사카 식으로 일본 곳곳을 뛰어다녔다.
당시 일본인 학생들이 좋아했던 구호는 ‘자기 부정’이다. 그것은 도쿄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초기 단계에선 특권층으로서의 자신을 그 사고방식에서부터 감수성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순진한 윤리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전통도덕과 부르주아 문화 타파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중요한 투쟁목표의 하나가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으며, 나도 그 이념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는 1960년 제1차 안보투쟁 시기의 작품인데, 그 10년 뒤인 내 대학시절에도 급진적인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되풀이 상영됐다. 나 자신은 그 영화를 그다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관료적인 학생운동 지도자가 자기 방에 사치스런 오디오 설비를 갖춰 놓고 클래식 음악 취미를 자랑스레 떠벌이는 장면이 있었다. 너무나도 아니꼬운 그 모습을 보고 나 자신도 저런 꼬락서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소 마음이 흔들렸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중산계급 이상이 아니면 클래식 음악을 즐길 수 없고, 악기를 구입하거나 어릴 적부터 전문가한테서 배우고 음악학교에 진학해서 해외 유학을 가기도 하는, 음악가가 되기 위한 문화적 투자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산계급의 세계와 클래식 음악의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죽이 잘 맞는다. 중산계급성을 부정하는 건 클래식 음악에 대한 동경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케부쿠로에 있던 콘서트 홀이라는 음악다방에 다닌 것은 내 은밀한 낙이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부르주아적 생활을 동경하는 것인지, 음악 그 자체를 동경하는 것인지 나 자신도 잘 몰랐다. 전자는 결연히 부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후자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부정하면서 동경하고 동경하면서 부정했다. 이율배반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학 3학년이 된 그해 봄 모국인 한국에 유학 중이던 형 두 사람이 정치범으로 구속당했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때까지는 낭만적인 몽상의 세계였던 무자비한 정치투쟁이 돌연 선명한 현실로 덮쳐왔다.
대학교가 있는 도쿄에서 교토의 우리 집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손에 닿는 대로 형들 구원운동을 시작했다. 그런 내게 이런저런 벗[友人]들이 동정하면서 구원운동에 동참해주었는데, 그들 중에 고교 졸업과 함께 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던 다케다양도 있었다. 끊어져 가던 음악과의 인연도 다시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한국의 유신독재체제는 계속됐고 형들이 석방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암울한 내 20대의 나날도 언제 끝날지 모르게 이어졌다. 생활의 중심을 형들 구원운동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직업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경영하는 조그마한 동네공장(마치코바) 일을 도와주고 있었으나 경영방면에 전혀 재주가 없고 열의도 없었기 때문에 종종 아버지한테서 꾸중을 들었다.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으나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요컨대 뭔가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차라리 레코드 가게나 해볼까 하고 생각했던 게 그 무렵이다.
1970년대 말 다케다양은 교사를 하면서 트루바두르(Troubadour) 합주단이라는 아마추어 연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이 합주단 연주회의 단골이 돼 연습장면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단원들과도 서로 알고 지내게 됐다. 연주회에서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모테트(motet)를 부른 여성이 바로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F다. F도 교사였고 다케다양의 친한 벗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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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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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