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아이는 적어도 3명이나 됐다. 그 중 한 사람이 고야마(神山)군. 우리 반은 문화제에서 슈만의 <유랑민>을 합창했는데, 그가 지휘자였다. 그저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선곡을 하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하면서 각 파트마다 적확한 지시를 내렸다.
바이올린을 켜는 두 번째 친구는 야마모토(山本)군. 그의 집은 큰 양옥이었는데, 석정(石庭)으로 유명한 료안지(龍安寺) 근처에 있었다. 그는 케이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바이올린을 꺼내 내게도 만져보게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드보르작Antonin Leopold Dvorak의 <유모레스크 Humoresque>를 연주했는데, 그 솜씨는 내가 들어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서툴렀다. 틀림없이 연습하길 싫어했을 것이다. 그의 바이올린 선생은 마스다(增田)상이라는 사람이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얘길 했더니 “아하, 그 사람이 바로 저 마스다상이로군”하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또 다른 내 형의 친구 중에 마스다라는 수재가 있었는데, 그 부친이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있다는 거였다. 계속해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마스다상은 만주에서 악사(樂士)를 했지. 전쟁 뒤 돌아와서 고생하며 오랫동안 나가시(손님을 찾아 돌아다니는 악사) 바이올린 연주를 했어.”
만주는 일본이 침략해서 만들어낸 허구의 다민족 제국이었는데, 거기에서는 한때 망명 러시아인, 유대인 등을 포함한 다문화적인 공간이 출현했다. 당시 일본사회를 빠져나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신천지에서의 사회적 신분상승을 꿈꾸며 만주로 건너갔다. 음악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도인 신경(新京, 지금의 창춘(長春))에는 수준 높은 교향악단이 있었으나 일본 패전 뒤 해체됐다. 마스다상도 그렇게 해서 실의에 빠졌던 음악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까.
어머니 얘기를 듣고 나는 별안간 야마모토군과 그 선생인 마스다상한테 친밀감 같은 걸 느꼈다. 야마모토군과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교우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세 번째 사람은 다케다(武田)라는 여학생. 내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 중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학생은 희고 야윈 형에 팔랑거리는 긴 치마를 입고 가는 목소리로 천천히 얘기하며 방울소리 내듯 웃는 양갓집 규수(令孃)다. 다케다양은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달라, 규수 같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활달한 야생마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녀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풍문을 들었을 때 괜히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런저런 사연들을 거친 뒤 마침내 그녀의 집에 놀러 갈 기회가 찾아왔다. 교토시 북쪽 교외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던 그 집은 수수한 목조건물로, 당시 호경기의 떡고물 덕을 보고 있던 우리 집에 비해서도 볼품이 없었다. 그런데 그 집에 한 발자국 들어서자 현관쪽 좁은 방에 문학 전집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이 있었다. 그런 ‘문화적 축적’이 우리 집에는 없었다.
잡담의 화제가 어쩌다가 음악 쪽으로 향했을 때 그녀가 일어서더니 옆 방과의 사이에 있는 장지문을 열고 악보를 올려놓는 보면대(譜面臺)를 꺼내 다다미 위에 세웠다. 시작하기 전에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수줍은 듯 에헤헤 하고 웃었으나 턱밑에 바이올린을 고정하더니 전혀 딴 사람처럼 긴장한 표정이 됐다. 그녀는 뭔가 짤막한 곡을 연주했다. 야마모토군이 연주한 <유모레스크>와 같은, 나도 알고 있는 간단한 곡이 아니라 어쩐지 어려워 보이는 아주 본격적인 곡 같았다.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Partita for Solo Violin>의 일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연주 중의 그녀 모습은 취미로 바이올린을 즐기는 양갓집 규수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에 도전하는 ‘진짜 연주자’처럼 보였다. 나는 숨을 삼키며 눈부신 무엇을 바라보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존재를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연주를 멈추고 다시 그전의 아이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더 듣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긴장과 불안에 사로잡혔다. 뭐든 감상 같은 걸 얘기해야 되는 거라면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그 후 얼마 뒤 그녀가 도넛판형 SP레코드 한 장을 내게 주었다. 야샤 하이페츠Jascha Hifetz가 연주한 멘델스존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의 <도입부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Introduction and Rondo Capriccioso>,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작곡의 <지고이네르바이젠 Zigeunerweisen>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망명 러시아인인 하이페츠와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는 당시 세계적인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었으나 물론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서둘러 우리 집 스테레오에 걸고 틀어보니 하이페츠의 음색은 내 선입견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감미롭고 유려한 것이 아니라 우람하고 힘찬 것이었다. “바이올린의 본래 음색은 이런 것인가”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 레코드판을 거듭 틀었다.
다케다양이 당연한 듯 말한 것이 내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매년 여름이 되면 나가노(長野)현 마쓰모토(松本)시에 가기에 단순히 피서하러 가는가 보다 했더니, ‘스즈키 메소드’ 합숙에 참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게 뭔지 몰라서 물어보니 그녀와 같은 연습생들이 여름마다 전국에서 그 고원도시에 모여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스즈키 메소드의 창시자 스즈키 신이치(鈴木愼一)는 일본 최초의 바이올린 제작자 스즈키 마사키치(政吉)의 아들이다. 1930년대부터 음악 지도자가 된 스즈키 신이치는 에토 도시야(江藤俊哉), 도요다 고지(豊田耕兒) 등 장차 일본을 대표하게 될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키웠다. 전쟁 뒤 마쓰모토시에서 ‘재능교육연구회’를 결성하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악기 연주법을 ‘모어(母語)교육’처럼 가르치는 독특한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그 스즈키 메소드가 전쟁 뒤 일본사회가 경제적 부흥을 이루고 마침내 고도경제성장기를 맞이하면서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이다. 1964년 스즈키 신이치는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 10명을 데리고 첫 미국 연주여행을 떠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도쿄 올림픽이 열린 해로, 중학생이었던 내가 다케다양과 알게 된 해이기도 했다. 피아노가 각 가정에 급속히 보급되고 일본 클래식 음악계를 떠받친 광대한 저변이 형성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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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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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