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우리 집 음악환경은 크게 변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플라스틱 성형 마치코바(町工場, 소규모 동네 공장)를 시작했는데, 일본사회가 고도경제성장 시대에 돌입하면서 그 말단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대가족의 집안일에 쫓겨야 했던 데다 공원(工員)들을 이끌며 공장일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변함없이 무척 바빴다.
당시 가정 전기제품 ‘3종의 신기(神器)’라 불린 게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였다. 스테레오(stereo)는 그 이상의 사치품이었으나 그게 우리 집에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스테레오를 샀을까? 아버지는 음악감상 취미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스테레오는 아버지에겐 일종의 사회적 신분을 상징(status symbol)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동급생인 사사키(佐佐木)군은 약방을 하는 유복한 집안의 아이였는데, 그 집 2층에는 바다거북 박제 등 여러 가지 골동품들이 있었고 그 속에 나팔형 스피커가 붙은 낡은 수동식 축음기도 있었다. 사사키군 집에 놀러가서 그 축음기로 레코드음악을 듣는 게 내겐 큰 즐거움이었는데, 그는 항상 바깥에서 놀기를 좋아해 내 소망을 좀체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집에 스테레오가 생겼으니 더는 사사키군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어졌다.
배달돼 온 스테레오는 옆으로 길쭉한 가구처럼 생겼는데, 좌우에 커다란 스피커가 붙어 있었다. 당시는 아직 FM 방송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스테레오 방송은 좌우에 부착돼 있던 AM 라디오를 동시에 틀어서 들었다. 왼쪽 라디오를 <NHK> 제1방송국 주파수에 맞추면 고음부가, 오른쪽을 제2방송에 맞추면 저음부가 흘러나왔다.
스테레오는 구입했으나 아직 레코드판은 한 장도 없었다. 우리 집 사람들 사고방식이나 관습은 여전히 가난했던 바로 어제까지의 날들과 달라진 게 없었다. 레코드판은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따라서 그 가격에 걸맞은 가치가 있는 것, 틀림없는 물건을 사야만 했다. 한데 그때까지 그런 물건을 사 본 적이 없었으므로 무얼 사야 좋을지 가족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시내 번화가에 가서 레코드판을 사오기로 했다. 그런 큰일이 소학생이던 내게 맡겨졌던 것이다.
막 사러 나가려는데 바로 위의 형이 이탈리아 민요 레코드도 한 장 사오라고 내게 명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미즈야(淸水屋) 레코드점에 가서 가게 주인에게 이탈리아 민요 레코드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이게 좋아”하고 주인이 권하기에 그걸 샀다. 집에 돌아와 그 레코드를 틀어보니 화려하고 요란하게 치장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형은 금세 얼굴색이 변했다. 그 레코드는 분명 이탈리아 민요이긴 했으나 당시 <애정 이야기>라는 할리우드 영화 음악으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피아니스트 카르멘 카발레로Carmen Cavallaro가 연주한 피아노곡이었다. 그래서 레코드 가게 주인도 내게 그것을 권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인 가수들이 부르는 서정 가득한 <오솔레미오 O Sole Mio>나 <카타리 카타리 Catari Catari>를 기대했던 형은 내가 엉뚱한 걸 사왔다며 금방이라도 내려칠 듯 손을 치켜들고 화를 냈다. 그뿐인가. 이따위 레코드에 큰돈을 들인 건 용납할 수 없는 낭비다, 지금 당장 다시 레코드점에 가서 바꿔오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건 무리한 명이었다. 포장을 뜯어버린 레코드를 바꿔줄 리 없다는 건 소학생인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울고 말았다.
형은 그 뒤에도 그 레코드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원래 이탈리아 민요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사온 이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 때때로 그 레코드를 틀어봤다. 피아노 연주로 듣는 이탈리아 민요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런 기분을 형에게 얘기할 순 없었다. 쓸데없이 화를 돋울 게 뻔했으니까.
일껏 값비싼 스테레오가 집에 들어왔는데 그걸 기념할 만한 일이란 게 고작 이런 멋쩍은 추억과 얽힌 것이라니. 몇 년 전 그 형이 우리 집에 하루 묵은 다음 날 아침 세수를 하면서 기분 좋게 이탈리아 민요를 흥얼거리고 있는 걸 들었을 때 저 옛날의 멋쩍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형은 이탈리아 민요적인 정서를 정말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그대로, 또 나는 나대로 반세기가 지나도록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개인의 인생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그 운명이 결정돼버리는 게 아닐까. 그 기로(岐路)는 뭐니 해도 먼저 음악이나 미술 등에 대한 기호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환경은 또다시 격변했다. 나는 중산계급의 자녀들이 다니는 국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소학교 시절과는 달리 주위에 악기에 대한 소양을 지닌 아이들이 급증했다.
가와이(川井)상이라는 여학생은 큰 악기점을 하는 집 딸인데, 플루트를 불었다. 나는 나카타(中田)군이라는 동급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방과 후 음악교실에서 무심코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쳐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 아이들 그 누구도 그걸 듣고도 놀라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주위에 둘러서서, 저 곡은 어렵다거니, 자신은 어떤 선생한테서 배웠다거니 하면서 음악에 관한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던 일이다. 그들 무리에 섞이지 못한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보다 하고 생각한 부류의 아이들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런 현실이 나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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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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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