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클래식 음악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은 이율배반적이다.
누군가와 함께 미술전시회에 갔다고 하자. 그 누군가에게 방금 본 작품에 대한 감상을 물었더니 그가 “아이고, 내겐 미술을 얘기할 만한 식견이 없어서 아무 얘기도 못 합니다”라고 했다면, 약간 난처해진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할 것이다. “미술 얘기를 하는데 무슨 식견이 필요합니까. 그냥 자신의 감성에 솔직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나 값비싼 작품이라도 자신에게 신통찮아 보이면 그건 신통찮은 겁니다. 그게 전부예요.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하세요.”
하지만 음악으로 가면 입장이 완전히 역전돼버린다. 이게 때때로 F와 충돌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연주가 끝난 뒤 “어땠어?”하고 물어오면 분명하게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는 내가 F에겐 답답한 것이다.
어떤 연주를 듣고 감흥이 일지 않으면 “재미없었어”라는 한 마디로 족하다. 한데 나는 먼저 나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는다. 지식이 부족하다든가, 음감이 좋지 않다든가, 나는 음악을 모르고 있다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해버린다.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평범한 음악이라면 아직 별문제 없지만 좋은 음악을 접하면 그때마다 동경과 반발이 내 속에서 격렬하게 다툰다. 어릴 적부터 그랬는데 지금까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재일조선인 2세로 전후(戰後, 2차대전 뒤)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날마다 일에만 매달렸던 세대다. 연주자가 되든 감상자가 되든 클래식 음악과 자연스레 친숙해지려면 그 나름의 조건이 필요하다. 돈과 시간에 여유가 있고 또 어느 정도의 문화적 축적도 필요한 것이다. 부모나 주변 가까운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에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고, 자택에 오디오 세트가 있거나, 가끔 콘서트에 간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다른 재일조선인 가정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는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나의 형 두 사람은 군사정권 시절 오랜 감옥생활을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 어머니가 내 어렸을 적에 첼로라도 좀 배우게 해주었더라면!”
교도소 소내방송을 통해 가끔 베토벤을 접한 그는 음악에 대한 애타는 갈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어떤 악기든 연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옥중에서 첼로 연습을 할 수는 없었기에 그 대신 아코디언을 넣어달라고 했다.
그 형의 탄식이 어떤 것인지 나도 잘 안다. 어머니가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해주었더라면… 하지만 재일조선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형은 그런 형이 됐지 만일 양친이 첼로를 배우게 하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標識)고 교양 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란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나로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런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뵈는 여자 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케이스 속의 아름다운 악기를 잠시라도 만져보고 싶다, 무슨 소리가 날지 내 손으로 켜보고 싶다, 그 악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한테 더 다가가고 싶다, 그런 애타는 동경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신분이 다른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내가 다니던 소학교는 도쿄 시내 서민들이 사는 동네에 있었다. 시대는 1950년대 말. 고도성장시대에 돌입하기 전인데, 재일조선인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들이 가난했다. 학교 강당에서 열린 영화감상회는 가난한 집 자식들에겐 큰 낙이었다. 많은 작품들이 상영됐겠지만 내가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길(道)>이라는 영화다. <이 길>이란 노래 제목이다. 야마다 고사쿠(山田耕作) 작곡,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작사의 일본 대표 창가(唱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길. 아아, 그래요. 어머님과 마차 타고 갔어요.”
우리 학동들은 모두 헌옷을 입고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 ‘어머님’이라는 고상한 말에 어울리는 아이는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제비 새끼들처럼 일렬로 늘어서서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소리를 질러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창가를 제목으로 단 영화는 맹인 소년 바이올리니스트가 주인공이었다. 실제 연주한 사람도 맹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와나미타 가요시(和波孝禧)다. 야마나시(山梨)현의 과수원에서 자란 이 소년은 재능을 인정받아 누나를 따라 도쿄에 가서 레슨을 받는다. 그 길이 즉 <이 길>이다. 어느 날 빈 소년합창단이 일본에 왔고 그는 지역 소도시에서 그 합창단과 공연을 하게 된다. 찬란한 미래로 가는 희망의 무대다. 그런데 상연 직전에 그가 불치의 병으로 죽어버린다. 그러나 소년의 어린 여동생이 훌륭하게 대역을 해서 큰 갈채를 받는다. 그 뒤 그 누나는 이 여동생을 데리고 세상을 떠난 소년이 갔던 그 길을 따라 도쿄에 가서 레슨을 받게 하는 것이다. 영화에는 실제 빈 소년합창단이 출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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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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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