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는 동안 가끔이지만 서울 광화문 종각 인근의 영풍문고 한 켠에 있는 자그마한 씨디(CD)가게에 들르곤 했다. 교보문고 씨디 가게가 훨씬 더 크고 물건도 많았지만 나는 영풍문고 가게 쪽이 마음에 들었다. 우선 손님이 적어서 좋았다. 그리고 거기엔 중고 레코드판과 씨디가 진열돼 있었다. 그런 것들을 손에 들고 찬찬히 바라보노라면 그 레코드를 산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무슨 이유로 그걸 도로 내놨는지, 본래 소유자의 취미나 인품까지 그려보게 된다. 낡은 레코드판이나 씨디를 매개로 본 적도 없는 동호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음악의 즐거움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다.
20대 무렵 교토시의 가와라마치(河原町)라는 번화가에 있던 시미즈야(淸水屋)라는 레코드점에 자주 갔다. 레코드판은 비싸고 용돈은 적어 아무래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고르게 된다. 연령에 비해서는 머리숱이 옅은 주인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는 과거의 명반(名盤)이나 최신 음악정보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결코 중뿔나게 나서지 않았고 물어본 내용에 대해서만 간결하게 대답해 주었는데,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 무렵 나는 무직자로, 장래 전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요즘 얘기하는 프리터였다. 뭔가 장사라도 시작해야지 하는 생각에 쫓기고 있었고, 내가 할만 한 건 레코드점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레코드 도매업자한테 업계 이야기를 들으러 가기도 했고 점포용 임대물건을 찾아본 적도 있다. 그러나 알아볼수록 이문이 박하고 어려운 장사라는 걸 깨닫고는 단념했다. 게다가 그 몇 년 뒤 씨디 전성시대가 찾아와 레코드점은 차차 문을 닫았다. 하마터면 한물간 경주마에 돈을 걸 뻔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씨디시대조차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들른 영풍문고 가게에서 중고 씨디를 골라 10장 정도 샀는데, 그 가운데 하나에 완전히 매료당했다. 앤 머리Ann Murray가 부른 슈베르트 가곡집이었다. (The Hyperion Schubert Edition 3, CDJ33003)
앤 머리는 아일랜드 출신의 메조소프라노다. 꽤 알려져 있긴 하나 아주 유명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전문가들이 좋아할 타입이라고나 할까, 수수한 편이다. 최근에는 헨델을 불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나도 몇 년 전 도쿄에서 아이버 볼턴Ivor Bolton이 지휘한 헨델 오페라에서 그녀를 봤다. 역시 그녀다운 존재감을 과시했으나 무대에 자주 등장하진 않았다. 이미 전성기를 지난 나이인 것이다.
영풍문고에서 산 씨디는 1989년 녹음이어서, 20년도 더 지난 것이다. 앤 머리는 그때 40살 전후의 절정기였다. 강하지만 윤기를 띤, 표정이 풍부한 목소리였다. 거듭 들어봐도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또 그 씨디 케이스 사진도 좋았다. 가녀린 백인 여성이 굵직한 나무에 기대서서 모딜리아니가 그린 여성상처럼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젊지 않다. 나무 그림자인지, 아니면 얼룩이나 주근깨인지 흰 얼굴에 살짝 검은빛이 떠돈다. 회색 눈동자가 나른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이 씨디에는 가곡이 14곡 수록돼 있다. 마지막 곡은 <Abschied(이별) D475>다. 가사인 요한 마이어호퍼Johann Mayrhofer의 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대들은 산을 넘어 녹음 우거진 곳으로 간다. 나는 홀로 돌아가야 한다.
안녕, 이별할 수밖에 없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떠나가야 하다니, 아,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거울 같은 호수, 숲과 언덕도 모두 사라지고, 그대들 외침의 메아리도 멀어져 간다.
“안녕”, 슬픔 가득한 외침이여, 아,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앤 머리의 노랫소리는 내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나날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25년 전쯤 나는 종종 유럽을 혼자서 돌아다녔다. 어느 해 11월 렌터카로 글래스고를 거쳐 북쪽으로 향했다. 그날은 인버네스에서 묵을 작정이었는데 예상외로 일찍 도착했기에 그대로 하이랜드 지방을 향해 스카이섬 쪽으로 계속 달려가기로 했다. 나무는 거의 없었고 그저 낮은 구릉들이 잇따라 펼쳐지는 가운데 히스(heath) 가 끝없이 물결 치고 있었다. 찬바람이 윙윙거리며 몰아쳤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바람에 물결을 일으키며 반짝거렸다. 방목한 양들이 추운 듯 서로 몸을 기댔다. 인적은 없고 길에도 지나가는 자동차 그림자 하나 없었다. 늦은 오후 하늘은 급속히 어두워지면서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만추의 스코틀랜드 특유의 그런 풍광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시간도 잊은 채 계속 달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배도 고팠다. 잊고 있었는데, 점심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 밥 먹을 데가 없을까. 그보다는 이대로 계속 달린다 해도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목적지가 어딘지조차 나는 확실히 알고 있지 못했다. 시골길은 완전히 어두워져 내가 탄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둥그런 빛줄기 외에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하늘에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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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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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