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음악 사정이나 콘서트 정보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걱정을 하던 나는 일본을 출발하기 전에 손을 써두었다. 히토쓰바시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J군과 상의한 것이다. J군은 그런 일이라면 좋은 사람이 있다며 자신의 연세대 시절 동창생인 Y씨를 소개해 주었다. Y씨는 서울시 교향악단 멤버다. 하지만 연주자가 아니라 기획과 재정을 담당하는 직원이다.
마침내 이사가 끝나고 한숨을 돌린 4월 하순에 Y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27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서울시향 콘서트에 초대해주었고 우리는 연주 시작 전에 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대로 나타난 Y씨는 내가 지니고 있던 한국인 남성에 대한 이미지를 뒤집어놓았다. 그 이미지란, 땀을 흘리며 삼겹살이나 부대찌개를 먹으면서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큰 소리로 떠드는 정력적인 인물상이다. Y씨는 홀쭉한 몸매로, 차분한 목소리에 말수도 적었다.
그날 밤 프로그램은 현대음악 작곡가 진은숙이 기획한 것으로, 곡목은 베베른Anton Webern, 진은숙 자신, 시에라라는 현대작곡가의 작품, 그리고 드비시의 교향곡 <바다>였다. 한국 청중에게 현대음악을 보급시킨다는 걸 의식한 교육적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처음 들어본 서울시향의 연주 수준은 상당히 높았고, 목관 파트와 타악기(percussion)쪽이 특히 뛰어났다. 나중에 Y씨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정명훈이 음악감독으로 취임할 때 그의 뜻에 따라 대규모 오디션을 해서 연주자들 면모를 실력본위로 일신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처럼 Y씨와 가까워지면서 그한테서 한국음악계의 재미난 뒷얘기들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얘기를 할 때 그는 우후후 하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짓궂고 신랄하게 말했다. 예술의 전당 앞에 맛좋은 칼국수집이 있다는 것도 그가 가르쳐주었다. 정말 그 맛이 일품이었는데, 그 뒤 나와 F에게 그 집은 예술의 전당에 갈 때마다 큰 낙이었다.
내가 조국을 처음 찾은 것은 1966년이며, 두 번째는 1969년 대학 1년생이었을 때다. 40년 전이다. 당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음악과 관련된 기억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고려대학에 갔을 때의 일. 인촌묘소 잔디밭에 앉아 쉬고 있는데 근처에 빙 둘러앉아 오징어를 안주삼아 두꺼비(소주의 상표가 두꺼비 마크여서 싼 소주를 두꺼비라 불렀다)를 마시며 얘기하고 있던 4, 5명의 남학생들 중 한 명이 흥이 났던지 벌떡 일어나 낭랑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멋진 테너였다. 이탈리아 가곡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보리밭>이라는 한국가곡이었다. 일본학생들에겐 그런 문화가 없는 까닭에 나로선 적이 놀랍고 흥미로웠다. 조국 사람들은 이처럼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그것도 감상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서정적인 노래를. 그때 내게서 싹트기 시작한 인상이다.
또 한 가지는 음악감상실의 추억. 일본에서는 음악다방이라고 한다. 먼 기억이지만 분명 시청이든가 광화문 근처에 ‘아폴로’라는 이름의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일본에서도 음악다방에 자주 갔다. 교토에서는 기야마치(木屋町)의 ‘뮤즈’, 도쿄에서는 이케부쿠로(池袋)의 ‘콘서트 홀’이 단골가게였다. 그래서 서울에서도 비슷한 가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호기심이 동했던 것이다. 아폴로의 어둑한 실내로 들어가니 일본 음악다방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까다로운 얼굴을 한 사람들이 소리없이 앉아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이 흐르고 있었다. 냉전과 미-소 대립이 한창이던 그때 미국 젊은이 밴 클라이번Van Cliburn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처음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세계에서 화제거리가 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40년 뒤 지금, 이케부쿠로의 ‘콘서트 홀’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다. 교토의 ‘뮤즈’는 아직 있을까? ‘아폴로’도 이미 없어졌을 것이다. 그대신 나는 지난 서울 체류 중에 대학로의 ‘학림’이라는 오래된 가게를 소개받아 종종 이용했다.
서울시향의 Y씨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그에게 왜 그 직업을 택했는지 물어봤다. 그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음악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본가는 광주에 있다. 10살쯤 위의 누나가 있었는데 그 누나가 음악을 좋아했다. 누나의 방에선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린 Y소년은 그 소리에 끌려 누나가 외출했을 때 그 방에 살그머니 숨어들어가 레코드판을 어루만져보곤 했다고 한다. “뭐, 그런 영향 덕에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만…”하고 Y씨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잘 만든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장소는 광주. Y씨의 나이로 보건대, 이건 ‘광주사건’이 일어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의 얘기다. 격렬한 저항과 무참한 학살이 자행된 남부의 고도. 상처받은 도시 한 켠에 남몰래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가 듣고 있던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쇼팽의 폴로네이즈였을까?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었을까? 아니면 오히려 감미롭고 슬픈 이탈리아 가곡이었을지도 모르지. 어린 남동생이 그런 누나를 동경하며 음악의 불가사의한 매력에 빨려들었던 것이다. 이거야말로 ‘이타 섹스아리스’(성에 눈뜸)가 아닌가. 음악에 눈뜨는 것은 성에 눈뜨는 것과 닮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음악 자체가 성적인 관능과 깊숙이 연결돼 있다.
그 뒤 나는 가끔 광주의 전남대학을 찾아가게 됐는데, 그때마다 대학 뒷문 근처 좁다란 골목에 있는 음악감상실에 들렀다.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안내로 그 가게를 알게 됐다. 진보활동의 전선에 선 ‘거리의 철학자’는 이런 곳에서 붉은 와인을 즐기면서 베토벤의 현악4중주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차분한 취향의 인테리어, 어스름한 조명, 근사한 오디오 세트, 그리고 벽을 가득 채운 오래된 레코드판. 시대의 파도가 휘몰아치고 간 뒤에 남은 듯한 그 가게를, 친절하지만 과묵한 여주인이 지키고 있었다.
혹시 이 사람이 Y씨의 누나가 아닐까?…
물론 그럴 리 없지만, 나는 일순 그런 상상에 사로잡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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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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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