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 너머 모슬포항에서 마라도로 가는 해로에는 여러 개의 등표가 있다. 등표는 암초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등이다. 지금은 폭풍에 휩쓸려 가버렸지만 그중 하나는 과부탄에 설치되어 있었다. 과부탄은 ‘홀애미여’라고도 부르는 수중의 암초다. 뱃길에는 수없이 많은 여와 걸들이 항해를 방해한다. ‘여’는 물의 들고 남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암초이고 ‘걸’은 썰물에도 수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숨은 암초다. 과부탄, 저 암초에 부딪혀 얼마나 많은 배들이 난파되었을까. 사내들의 목숨을 수도 없이 빼앗아 간 과부탄에는 필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이라도 살았던 것일 테지. 과부의 한이 서린 암초. 과부탄뿐이랴. 오늘처럼 파도가 심한 날이면 유독 서럽게 울어대는 여들이 있다. 그 이름도 과부탄처럼 서럽다. 각시여와 서방여, 부부여, 슬픈여…….
섬이나 바닷가 마을 부근에는 의례 그런 이름의 여들이 한둘은 있기 마련이다. 마을 앞에 작은 바위섬이 있었다. 부부가 배를 타고 나가 각시를 섬에 내려주면 각시는 전복, 해삼, 소라, 미역 등을 채취했다. 서방은 잠시 노를 저어 근처 다른 섬에 일을 보러 떠났다. 꽤 시간이 지나 서방이 바위섬으로 돌아오니 섬도 각시도 흔적조차 없다. 서방은 서글프게 통곡을 하지만 삶은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뭍에 살다가 섬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바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겠지. 여가 물때에 따라 물 위로 오르기도 하고 물속으로 잠기기도 하는 암초라는 사실을 몰랐겠지. 아니면 잠깐 잊었겠지. 그렇게 바다는 각시를 삼키고 서방을 삼켰다. 때때로 부부를 함께 삼키기도 했다.
바다는 깊은 바다보다 얕은 바다가 무섭다. 뱃사람들에게도 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각시가 죽은 뒤 자꾸 그 여의 근처만 지나면 배들이 난파당했다. 뱃사람들의 꿈에 원통하게 죽은 각시가 나타나 하소연했겠지. 뱃사람들은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고. 그러다 각시의 영혼을 아주 당으로 모시기도 했겠지. 그러면 각시는 바다의 신, 섬과 바닷길의 수호신이 되었겠지. 어제까지만 해도 풍랑 거세게 몰아치던 바다가 오늘은 황금빛으로 눈부시다. 바다는 언제나 사람의 생사 따위에는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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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