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0코스 화순해수욕장 너머 산방산 아래 작은 해변, 나그네는 잠시 동굴에 들러 쉬었다 간다. 햇빛이나 바람 피하기 좋은 동굴. 동굴 안쪽은 돌무더기로 막혀 있다. 본래 동굴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뚫려 있었다. 그런데 강아지건 아이들이건 동굴 속으로만 들어가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실종 사고가 많아지자 마을 사람들은 돌을 날라다 동굴 중간을 막아버렸다. 나는 저 돌무더기를 뚫고 동굴의 끝까지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동굴 탐사는 다음으로 미루자. 다시 길을 나선다. 해안 절벽에는 기암괴석들이 사열하듯 서 있다. 바위틈에는 돌이 된 사람들도 갇혀 있다. 저들은 대체 무슨 벌을 받아 저리된 것일까. 세상은 온통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신화와 설화, 전설, 민담, 어느 하나 메타포가 아닌 것이 없다. 삶은 온통 풀어야 할 암호 투성이다. 삶에 은유가 없다면 우리는 늘 화살을 쏘며 다녀야 할 것이다. 신화 속에는 신의 분노를 사 돌이 된 사람들 이야기가 많다. 알라신의 부름을 거역한 페르시아의 한 도시는 전체가 돌이 되어 버렸다. 여호와의 저주로 소돔을 떠나던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거역한 죄로 소금기둥이 되었다. 저들 또한 제주의 창조신 설문대할망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옥황상제의 벌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한들 자애로운 성모와 성부가 어찌 자신의 자녀를 저토록 가혹하게 가두어둘 것인가. 자식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식을 돌덩이로 만들고 감옥에 처넣는 신이라면 그가 어찌 창조주고 하느님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저주를 퍼부어 그의 자녀를 돌로 만든 신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를 개나 물어가라고 던져 줘버릴 것이다. 아무리 분노와 질투심 강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만은 자비로운 법이다. 하물며 전능한 신들임에랴. 창조주는, 신은 결코 분노와 저주의 신일 리 없다. 사람을 가둔 것은 신이 아니다. 사람 자신이다. 스스로 가슴이 멍들어 돌로 굳어진 자들. 저들을 어찌 구해낼 수 있을까. 기도, 그렇다 기도다. 바위에 갇힌 부처도 불러내고 하늘의 신도 강림하게 하는 것이 기도의 힘 아닌가. 이 길을 걷는 이들 모두 간절히 기도한다면 저들도 반드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것이다. 바위에 갇힌 저 돌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도하며 걷는다. 갇힌 자의 해방을 염원하며 걸어가는 이 길은 진정한 순례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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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