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저녁식사를 위해 동문 로터리 부근 국숫집 ‘고향생각’에 들렀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국숫집은 비좁다. 작은 탁자 네 개가 전부. 하지만 국수 맛은 널리 소문이 났다. 곁들어 나오는 배추김치와 파김치도 맛깔스럽다. 거기에 풋고추와 된장, 새우젓도 짜지 않고 고소하다.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은 너무 양이 많다고 불평하면서도 꼭 이 국숫집만 찾는다. 양을 줄여 달라고 주인 할머니에게 몇 번이나 건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음식은 풍성해야 한다는 것이 주인의 철학인 것을 어쩌랴. 그나마 건의가 조금은 먹혀 이제 여자들에게는 양을 조금 적게 내주는 걸로 위안 삼는다. 사실 장정인 내가 먹기에도 양이 많다.
실상 서귀포 국숫집들의 맛은 대동소이하다. 그만큼 이 지역에 국수가 보편적인 음식인 탓이다. 제주의 국수는 면에서 다른 지방의 국수와 차이가 있다. 대체로 많은 지방에서 국수는 소면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면이 굵은 중면을 쓴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은 후루룩 마실 수 있는 소면을 좋아하지만 어쩌랴. 이곳의 풍습이니. 그래도 이제는 중면에도 제법 맛이 들었다. 모든 것이 습관들이기 나름이다. 예부터 제주도가 국수로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제주 땅에서는 쌀처럼 밀도 귀한 곡물이었다. 그것은 육지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국수는 잔치 집에서나 맛볼 수 있던 귀물이었다. 제주도에 국수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은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원조를 통해 밀가루가 보급되면서부터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으니 이 집 고기국수의 맛은 알 수 없지만 하루 정도 돼지 뼈를 푹 우려낸 국물을 맛본 사람들은 진국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내 몫인 멸치국수도 진국이기는 마찬가지. 일행은 국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신다.
오늘은 서명숙 이사장과 올레 갤러리 전시를 하러 사천에서 온 한생곤 화백, 나 이렇게 셋이서 국수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신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자꾸 기웃거린다. 알고 보니 올레길 개장 행사에서 서명숙 이사장과 인사를 했던 사이다. 사내는 애월 출신인데 지금은 제주시에 산다. 사내는 최근에 일본을 다녀왔다. 제주 사람 중 일본에 친인척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사카에 사는 형님 초청으로 일본에 갔다 왔신디 거기도 올레길을 만든다고 시멘트길을 파헤치고 난리우다.”
오사카 시장이 제주를 방문해 올레길을 걸어보더니 홀딱 반해서 오사카에도 올레길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형님 말이 오사카 시장이 올레길 때문에 돌아버렸다 햄수다. 아스팔트를 파헤치고 아주 미쳐버렸다 그램수다.”
아스팔트 포장까지 걷어내고 흙길을 만든다니 정말 오사카 시장이 올레길에 미치긴 제대로 미친 모양이다.
그동안 우리 문화는 늘 일본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제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창안된 올레길이라는 문화를 모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0년 3월 제주올레 사무국에서도 시코쿠 관광청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시코쿠에도 1200킬로미터의 사찰 순례길이 있지만 대부분이 포장된 찻길이라 위험하기 그지없다. 시코쿠 관광청에서 제주올레 사무국에 일부 구간의 길을 시범적으로 개척해 달라는 요청을 해온 것이다.
사내는 애월의 ‘양치비 족은 가지’ 종손이다. 제주 토착 세력인 고양부의 양씨, 작은 갈래 종갓집 종손이니 지역의 유력자다.
“사장님은 올레길 사장님이지만 나는 애월읍 사장이요. 내가 형제간에 다 좌지우지하우다.”
사내는 한라산 소주 반병에 벌써 거나해졌다. 사내가 일어서고 우리는 다시 막걸리를 마신다. 고추 하나를 된장에 찍었다. “카아~” 청양 고추다. 맵다. 입에 불이 난다. 국물을 떠 넣고 물을 마셔도 입속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물은 기름과 섞이지 않으니 물로는 고추의 매운맛을 희석시킬 수 없다. 이런 때는 맨밥을 먹어야 매운맛이 줄어든다. “여기 공깃밥 하나요.” 그렇게 국숫집 고향생각의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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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