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땅에 내려앉지 않고 날아다니며 사는 새가 있다. 그것은 바람이다.” ―세네갈 전설
제주는 바람의 나라, 제주는 돌의 나라. 제주 바다의 지배자는 바람이지만 뭍으로 건너온 바람을 막아주는 것은 돌담이다. 제주의 옛집들은 나지막하다. 바람 때문이다. 잔뜩 웅크리고 앉아 바람을 피하려는 사람의 자세와 집의 생김새는 너무도 흡사하다. 바람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켜주는 울담(집담)뿐 아니라 밭들의 경계인 밧담(밭담), 유택의 보호막인 산담(사성), 바다 밭의 울타리 원담까지 제주는 온통 돌담 천지다.
육지의 밭과 달리 제주의 밭은 거의 대부분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제주의 돌담은 농경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을 터지만 밭에 담쌓기가 본격화된 것은 1234년(고려 고종 21년) 탐라 판관 김구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 제주에서는 태풍 등의 재해가 지나고 난 뒤 유난히 밭의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많았다. 밭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힘센 자가 약한 자의 밭을 먹어들어 가는 폐단이 끊이지 않았다. 잦은 분쟁을 목격한 김구 판관이 밭의 경계마다 돌담을 쌓으라고 지시했다. 밭의 둘레에 돌담이 생기면서부터 경계가 더욱 명확해졌고 바람이나 마소 등의 동물로부터도 작물을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담을 쌓은 밭은 밧담이라 부르고 일부 산중 밭처럼 힘에 부치거나 돌이 부족해 담을 쌓지 못한 밭은 무장전(無牆田)이라 했다.
산담은 무덤의 둘레를 쌓은 담이다. 육지의 무덤과 달리 제주의 무덤은 대부분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망자의 땅이라는 경계 표시일까. 그런 면도 없지 않겠지만 산담은 방목되는 마소나 야생동물들의 침입으로부터의 안전막이다. 무덤의 주인들은 검은 현무암 산담 덕분에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무덤의 산담들은 그 크기가 제각각이다. 자손들의 재력에 따라 담의 규모도 갈리는 것이다. 올레 15코스 개장 행사에 함께 참석한 서동철 형과 숲길을 걷는다. 비양도행 한림항 도선장에서 애월읍 고내코지까지 15코스는 바닷가보다 밭이나 숲을 많이 통과한다. 과오름 숲길을 지나며 문득 산담의 저 많은 돌을 어떻게 옮겨졌을지 궁금해진다.
“형, 산담을 쌓으려면 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일꾼을 고용해서 쌓은 건가요?”
“아니. 동네 사람들이 쌓은 거라.”
“울력으로요?”
“그도 아니고, 다 품삯을 주고 돌을 샀다게. 돈 대신 떡을 줬어. 담의 돌 숫자가 떡 숫자야. 떡 하나에 돌 하나.”
“돌 하나 떡 하나!”
“상주가 떡을 들고 있다가 사람이 돌 하나를 들고 오면 떡 하나 주고 그랬다게.”
그렇구나. 저 산담은 단순히 돌담이 아니라 쌀로 지은 떡담이구나. 누구나 크고 튼튼한 돌담을 쌓고 싶었겠지만 그것은 집의 경제력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쌀이 귀한 제주에서 마을 사람들은 산담을 쌓을 돌을 날라주고 쌀로 빚은 떡을 받아 소중한 양식으로 삼았다. 있는 집안은 큰 산담을 쌓고 없는 집안은 식구들끼리만 외롭게 돌을 날라다 외줄의 산담을 쌓은 것이다. 빈부의 차이는 무덤까지도 따라갔다.
---------------------------
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