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곱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 「소의 말」
이중섭미술관
이중섭미술관은 올레 6코스 서귀포 구시가지 어름에 있다. 미술관 마당 한 켠에는 이중섭의 흉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그가 서귀포에 머물던 시절에 쓴 시 「소의 말」이 새겨 있다.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의 그림이 몇 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중섭이란 이름만으로도 미술관을 찾는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한국전쟁 중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잠깐 피난 생활을 했다. 이중섭미술관 초입에는 그가 세 들어 살던 초가집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에게 방을 내주었던 주인집 새댁은 그 집에서 늙어간다.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양 인근 평원군에서 부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유복자였던 그는 청상과부인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고 유년기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냈다. 그의 외할아버지 이진태는 서북 농공은행장과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거물 실업가였다.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일곱 살 때 장마당에서 외할머니가 사준 사과를 먹지 않고 집에 가져와 실물 크기로 그린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민족교육의 산실이던 오산학교에 다니며 함석헌 선생에게 직접 배우기도 했다. 뒷날 이중섭 일가는 원산으로 이주했다. 그의 형은 원산 최초의 백화점 ‘백두’의 사장이 되었다. 일본 동경으로 유학한 이중섭은 그곳에서 ‘동방의 루오’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났다.
졸업 뒤 정혼자인 마사코를 두고 원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최승희의 수제자 다야마 하루코, 피아니스트 서덕실 등과 잠깐 연애를 빠지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마사코가 원산으로 와서 둘은 결혼했고 마사코는 이남덕이란 이름을 새로 얻기까지 했다. 이중섭은 원산 송도원 들판에서 끊임없이 소들을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중섭은 환영받았지만 그의 형은 친일파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는 원산 여자사범학교 교사가 됐으나 사흘 만에 그만두고 고아원 교사로 아이들과 어울렸다. 이때의 경험이 「군동화」를 낳았다. 생계를 위해 양계를 했고 이 경험에서 「투계도」가 나왔다. 그의 그림들은 철저하게 현실 경험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예술이었다. 그 때문에 이중섭은 소련 비평가들로부터 마티스나 피카소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았고 원산미술가 동맹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선전화를 그릴 수 없었던 이중섭은 곧 배척당했다. 한국 전쟁 직후까지 원산에 머물던 이중섭은 1.4 후퇴 이후 어머니를 두고 월남했다.
북의 원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이중섭은 1951년 4월, 다시 해군 경비정에 실려 제주도 서귀포로 건너왔다. 이중섭은 현치수라는 농부의 배려로 방 한 칸을 얻어 서귀포에 정착하면서 모처럼 안정을 찾고 평화를 누렸다. 그해 12월 다시 부산으로 떠나기까지 체류 기간은 7개월 남짓에 불과했지만 서귀포에서의 생활은 그가 남한에서 가족과 행복을 누린 유일한 시간이었으며 부인 이남덕과 두 아들이랑 함께 보낸 마지막 날들이었다. 생활은 궁핍이 극에 달했으나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준 공간이기도 했다. 그는 양파를 캐는 날품을 하거나 보리 이삭을 줍거나 게를 잡아다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다. 제주 사람들의 도움도 컸다. 게를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발견하게 한 것도 서귀포였다. 천지연 근처 해변에서 게를 잡아다 관찰한 뒤 그림을 그리고 삶아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으니 게는 이중섭 일가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살찌게 한 양식이었다.
이 무렵 이중섭은 고흐처럼 한라산 자락에서 발견한 까마귀를 그리기도 했다. 이중섭의 그림 「달과 까마귀」에서는 그때 그가 느꼈을 처연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달과 까마귀」뿐 아니라 황소를 그린 그림들에서도 나는 분출하는 남성적인 힘 이면의 처연함을 본다. 도대체 어찌해볼 수 없는 에너지를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그 강렬함이 실상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그린 그림 세 점을 들고 월남미술작가전에 출품하기 위해 부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본래 9월에 제주를 떠날 계획이었지만 송별회에서 술에 취해 무덤가에 잠들었다가 지네에 물려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 때문에 배를 놓쳤고 몇 달을 더 머물다 갔다.
서귀포 칠십리
저물녘이면 나그네는 자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아래 뜨락을 찾는다. 이 뜨락에는 노래 「서귀포 칠십리」의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구성진 가락이 흐른다. 나그네는 하염없이 앉아 노래를 듣는다.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뱃노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노래는 1934년 6월 조명암 시인이 제주를 여행하고 나서 쓴 시에 박시춘이 곡을 붙였고 1943년, 남인수가 불렀다. 음반이 나오면서 바로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가요로 낙인찍혀 금지곡이 됐다. 해방 후에는 조명암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반세기도 넘게 또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1993년 민간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해금됐다. 나그네는 오늘도 이중섭미술관 뜨락에 앉아 애수에 젖는다. 어느덧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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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