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산업 사회는 광신적인 종교집단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지구 상의 온갖 생명 시스템을 먹어치우고 독살하고 파괴하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차용증서에 우리가 서명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 지구에 사는 마지막 세대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나의 가슴 속에, 마음 깊숙이, 자신의 비전 한가운데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지구는 숯처럼 검게 그을려 황막한 금성처럼 종말을 맞게 되리라.” ―호세 루첸베르거(전 브라질 환경부 서기관)
드라마 「올인」을 찍으면서 유명세를 탔던 섭지코지. 올레길을 걸으며 다시 들른다. 오늘 섭지코지의 색채는 우울한 색이다. 더 이상 섭지코지는 없다. 1년 반 만에 다시 찾은 섭지코지는 개발에 초토화되어버렸다. 들머리의 땅은 콘도와 호화 빌라들이 차지하고 담장을 둘러쳤다. 빌라 공사를 한 건축회사 직원에게 들으니 70평쯤 되는 2층짜리 별장이 40억 원. 40평 단층 건물은 17억 원이다. 수십 동의 호화 빌라들 모두가 분양이 완료됐다. 소유주 중에는 유명영화 감독도 있다고 직원은 자랑이다. 제주도민과 제주를 찾는 사람 모두가 함께 누리던 수려한 풍광을 이제는 소수가 독점하고 만 것이다.
이제 담으로 가로막힌 섭지코지 초원의 대부분은 접근 불가의 성역이다. 등대를 지나 일출봉이 보이는 초원으로 가던 길도 끊겼다. 자유롭게 드나들던 초원을 가로막은 울타리를 보니 울화가 치민다. 올레길은 잊혀진 길도 찾아주고 끊어진 길도 이어주고 막힌 길도 뚫어주는데, 있는 길마저 없애버리는 자본의 횡포 앞에 나그네는 그저 망연할 뿐이다.
섭지코지 초입보다 더 참혹한 곳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던 초원이다. 초원의 풍광을 뭉개버린 콘크리트 건물. 초원 한복판에는 레스토랑 건물이 들어섰다. 누가 그들에게 풍경을 파괴할 권리를 부여했을까. 초원에 지어진 이 건물은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일본의 섬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 건축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 그가 지은 건물은 건축미가 있을지 몰라도 그 건물이 섭지코지의 경관을 파괴했다는 점에서는 콘도나 빌라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 나오시마 섬의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땅속으로 건물을 집어넣었던 안도 다다오도 돈의 위력 앞에서는 무력하다.
더구나 이 건물은 명상센터라는 그럴듯한 이름까지 달고 있지만 실상은 장삿속이 뻔히 보이는 상업적인 의도로 지어진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답답한 시멘트 건물 안이 명상하기 좋은지 푸른 초원 위가 명상하기 좋은지는 지나가던 말에게 물어봐도 피식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명상센터는 섭지코지에서의 명상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명상센터 안에는 전시실과 카페, 전망대 레스토랑 등이 있다. 인공구조물로 만들어진 세상의 모든 전망대가 전망을 해치는 전망대이듯이 이 레스토랑 전망대 또한 섭지코지의 수려한 전망을 파괴하는 전망대다.
오늘 초원을 노닐던 말들은 사라지고 레스토랑 손님을 실은 전기자동차들만 그 길을 유유히 질주한다. 사업주는 이곳을 국내 최초의 친환경 해양리조트로 개발했다고 기만적인 언어로 선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경관을 파괴하고 인공적인 구조물을 만드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건축물일지라도 건축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자연유산 섭지코지를 파괴하고 들어선 저 건물들은 분명 제주의 재앙이다. 이제 나는 다시 섭지코지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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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