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가는 길
올레길 6코스 천지연 생태공원 올레길을 돌아 나오니 삼매봉 가는 길이다. 올레 화살표와 파란 리본을 따라가면 길은 외돌개까지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궤도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열차와도 같다. 늘 정해진 레일 위를 달려 종착역에 도착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열차가 아니고 올레길은 철로가 아니다. 길을 벗어나도 전복될 일은 없다. 바퀴가 없는 열차. 잠시 올레길 선로를 벗어나 삼매봉 도서관 쪽으로 방향을 튼다. 올레길 도서관에 들러 제주의 역사를 공부하고 가는 것도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그네가 가는 곳은 도서관이 아니라 미술관이다. 기당미술관. 변시지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을 그냥 지나친다면 여행자는 제주 여행의 절반을 놓치는 셈이다.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 그의 화폭에는 늘 제주의 바람이 분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폭풍이 몰아친다. 그래서 그는 ‘폭풍의 화가’로 불린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생존한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변 화백의 그림 「난무」와 「이대로 가는 길」 두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1997년에는 한국 화가로는 유일하게 검색 포털 야후에 의해 고흐나 피카소와 함께 세계 100대 화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주에 살며 오로지 제주만을 그려온 변 화백의 그림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한국 화단의 중심부가 그를 제주의 향토화가 정도로 애써 무시하는 데 급급할 때 세계적인 박물관 책임자는 그의 진가를 알아봤고 그는 변방의 화가에서 일약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결국 동시대의 화가들이 다들 유럽으로 떠날 무렵 홀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입증된 것이다.
유레카! 제주의 색을 발견하다
변 화백은 서귀포 서홍동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을 보냈다. 유년기 잠깐이지만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서종택 교수는 그것이 후일 “서양화를 전공한 변 화백의 수묵화적 기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그의 저서 『변시지』에서 평가한 바 있다. 소년 변시지는 여섯 살 때 가족들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정착했다. 큰형은 고무 공장을 차려 가족들을 부양했다. 그는 소학교 2학년 때 씨름대회에 나가 2, 3학년 선수들을 차례로 물리쳤고 마침내 그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4학년 선수와 맞붙었다. 오기로 버티다 결국 모래판에 처박혀 관절이 망가졌다. 한순간의 오기 때문에 평생 다리를 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소년 변시지가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1948년, 변시지는 일전(日展)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 공모전인 광풍회전(光風會展)에 출품해 스물세 살 나이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며 일본 화단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일전의 심사 위원이던 사이토 요리가 “변시지의 그림을 인정하면 대가들의 그림이 위험하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일찍부터 재능과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변시지는 일본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1957년 11월 15일 서울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영구 귀국했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 인맥으로 얽힌 한국 화단의 반목과 질시를 견디지 못해 방황했고 마침내 고향 제주로 낙향을 결심했다. 서울에서는 갑자기 일본에서 귀국한 그를 의심하여 감시하는 기관원들의 눈초리를 견디기도 힘들었다. 두 번이나 국전 개혁운동을 주도하다 좌절하기도 했었다. 그는 제주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의 삶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새로운 화법을 발견하기 위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심지어 일주일 내내 곡기 한번 입에 대지 않고 술만 마시기도 했다. 그가 술에 취해 쓰러지면 동료와 제자들은 그를 화실로 옮겨다 주고 그가 그린 그림들을 훔쳐갔다.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도 있었다. 그런 치사한 우정의 나날들이 갔다. 끝내 견딜 수 없을 때면 바닷가 자살바위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술에 취한 몸으로 깨어났는데 간밤에 마주 보았던 자신의 캔버스가 온통 황갈색 톤으로 보였다. 서종택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마침내 ‘유레카!’ 한 것이다. 유레카! 나는 알아냈다! 드디어 ‘제주의 색’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온통 황갈색. 그것은 제주 원형의 색이었다. 그날 이후 변 화백의 그림은 하늘도 바다도 푸른색이 아니다. 온통 황갈색이다.
미술관에 부는 폭풍
기당미술관은 그의 그림을 아끼는 제주 출신의 재일 기업인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지어서 그에게 헌정한 미술관이다. 변 화백은 미술관을 개인 소유로 하지 않고 서귀포시에 기증했다. 미술관 특별전시실에는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폭풍에 휩싸인 것처럼 강렬한 에너지에 압도당한다. 그의 작품 「태풍」 앞에서 나는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누런 빛, 그의 그림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바다와 하늘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바다와 하늘은 현실을 떠나 있지 않다. 나는 어느새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구부정한 사내로 서 있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한라산」, 한라산 아래 초가. 사내는 오늘 또 부질없는 짓을 벌이고 있다. 까마귀에게도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까마귀는 뭐라 지껄이는 듯하지만 아마도 저건 딴청이다. 영리한 까마귀는 알 수 없는 질문을 못 알아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 자신은 제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과 속을 넘나드는 영매가 아니라고 그저 배고픈 날짐승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다고. 한낮의 태양은 한라산 마루에 걸려 이글거린다. 태양 아래 세계의 본질은 다 드러나고 비밀 따위는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까마귀도 그걸 이야기하려는 걸까. 멍청아, 보이는 게 다야, 존재의 비밀 따위는 없어.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이려 할 때, 한밤중에 잠깨어 나는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를 가늠해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생각이 미칠 때, 잠이 그대를 돌처럼 굳어지게 할 때,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장치조차 없다.”( 장 그르니에,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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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