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서귀포는 비가 오거나 흐린 날들이 많다. 따뜻한 기운이 찬 기운과 전투 중이다. 승자는 불을 보듯 환하다. 싸움의 결과를 먼저 알아챈 것은 꽃들이다. 이제 본격적인 꽃 시절이 도래했다. 올레길 6코스는 서귀포 구시가지 이중섭미술관을 통과한다. 미술관은 항상 여행자들로 붐빈다. 하지만 미술관 벽에 걸린 죽은 꽃들 앞에서는 오래 서 있는 여행자들이 살아 있는 꽃들, 미술관 뜨락의 그림들 앞에서는 좀채로 긴 시간을 허락하려 하지 않는다.
한동안 미술관 뜨락에 동백과 유채, 수선화가 만개하더니 오늘은 드디어 매화까지 꽃망울을 터뜨렸다. 서둘러 핀 매화가 가상하기는 하지만 실상 나는 여전히 매화보다는 동백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소복의 여인처럼 처연한 흰 동백을 지극히 편애한다. 반쯤 벌어진 흰 동백은 나를 꽃 속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 꽃은 식물의 성기다. 식물은 자신의 성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내놓고 유혹한다. 나는 애가 타서 안달이 난다.
흰 동백, 저토록 처연하면서도 고혹적인 흰 빛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동박새나 나비가 아닌 것을 이토록 후회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흰 꽃잎 속으로 날아 들어가고 싶지만 애달파라, 그저 견딜 뿐 무슨 방도가 또 있으리…
도대체 내가 이처럼 저 꽃들에게 매혹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색채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범은 향기다. 사람이 꽃향기에 흥분하는 것은 꽃이 활발한 생식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꽃향기는 온 세계를 향해 "나는 생식 능력이 있고 준비되어 있으며, 가져 볼만하고, 나의 생식 기관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다이앤 애커먼,
서귀포 앞바다 문섬을 건너온 따뜻한 바람이 미술관 뜨락을 애무하고 지나간다. 이중섭 거주지 추녀 밑으로 저녁이 깃든다. 꽃 시절은 짧다. 꽃이 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꽃이 지고, 봄이 왔는가 했더니 봄은 늘 간 곳이 없다. 그래도 꽃은 피었다 지고 또 피어나는데 사람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 내 생애의 남은 날들은 얼마쯤일까.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으리. 나 청춘을 떠나온 지 오래이니 이제 남은 날들은 빛의 속도로 흘러가고 말 것이다.
한번 피었다 시들면 다시 필 수 없는 사람에게 해마다 부활하는 꽃의 생리는 분명 경이롭고 시샘 나는 일이다. 엘리어트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탄식한 것도,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재생 불가능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죽음의 땅에서 부활하는 풀들, 나무들, 꽃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래전 나도 저 흰 동백 앞에 탄식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배는 떠나고
흰 동백 피었다 지네
배는 떠나고
사랑은 가고 오지 않네
바람아 불어라
폭풍우 몰아쳐라
배는 떠나고
한번 간 내 사랑 돌아오지 않네
배는 떠나고
흰 동백 피었다 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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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