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것은 행운이다
"여행을 하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
성산 일출봉 아래 올레길을 걷는다. 지금은 제주 해안 끝자락의 산이지만 일출봉은 본래 성산도라는 섬이었다. 그래서 백호 임제(1549~1587)는 <남명소승>에서 “성산도는 마치 한 떨기 푸른 연꽃이 바닷가에 피어난 것 같다”고 했고 1732년 제주를 일주한 정운경은 <탐라기>에서 “천길 바위산이 바다 가운데 우뚝 서 있는데 깍아지른 절벽이 둘레를 에웠다”고 기록했다. 매립으로 성산도는 제주도와 이어졌고 일출봉이 되었다. 본섬과 연결이 된 사잇길은 터진목이다. 물길이 터진 것이 아니라 새 길이 터졌다 해서 터진목. 일출봉 아래 광치기 해변에서 올레길 1코스는 끝이 난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길의 끝에서 다시 길이 시작된다. 2코스는 대부분이 습지다. 동남 양어장을 지나 호수 길로 접어든다. 갈대숲과 수변으로 난 길이 내내 호젓하다.
호수의 끝쯤에서 나는 문득 길을 잃었다. 갑자기 불어난 물로 길은 물속으로 사라지고 물 건너 돌담 앞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물에 빠진 길이라니! 밀물이 들어와 길을 지워버렸다. 물속에 가라앉은 징검다리가 언뜻 보이는 것이 깊지는 않은 듯 싶다. 그래도 결단은 필요하다. 돌아갈 것인가. 물속을 가로지를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나는 다른 길을 찾기로 한다. 길을 잃은 것을 낙심할 까닭은 없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제 정해진 길이 아니라 나만의 올레길을 만들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제주 섬 한 곳에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올레길을 갖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비밀의 길, 신비의 길.
세상 어디에도 정해진 길은 없다. 올레길 또한 결코 하나의 길이 아니다. 올레길의 상징인 화살표와 리본은 방향을 알려주는 지침일 뿐 길 그 자체는 아니다. 방향을 잃었을 때 화살표는 유용하지만 그렇다고 화살표가 길을 가두는 괄호는 아니다. 올레 코스는 등대 같은 것이다. 등대가 내 항해의 목적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길을 놓쳤다고 건너뛰었다고 책망할 까닭은 없다. 함께 걷더라도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각자의 길을 간다. 올레길 위에는 길을 걷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길들이 있다. 수천, 수만의 길을 품고 있는 길이 올레길이다. 각자 다른 길을 가지만 하나의 방향을 향해 가는 올레길. 사유와 휴식과 놀이와 성찰이라는 하나의 방향.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길이 아니라 올레의 정신이다. 정해진 길을 자주 벗어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올레를 만나고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다. 삶은 어차피 모험이 아닌가.
길의 목적은 길이다
길가에 피어난 들꽃들, 원추리, 괭이밥풀꽃. 야생화도 수목원이나 식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 수목원이나 식물원의 꽃들은 이미 야생화가 아니다. 인공의 꽃이고 상품이지 진정한 들꽃은 아니다. 이 길, 올레길에서 만나는 꽃들이야말로 진정한 들꽃, 야생화다. 더러 길을 걷다보면 급하게 서두르며 걷기 대회라도 나온 것처럼 경주하듯이 가는 사람들을 본다. 저 고운 들꽃이라도 보고 가실 일이지! 코스종주가 목적이 되는 순간 걷기는 이미 올레의 정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길을 걷는 데는 사람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을 터지만 그래도 이 길만은 경쟁의 길, 속도전의 길이 아니었으면 한다. 남들보다 먼저 구간을 종주한 것이 자랑이 아니었으면 한다. 배려의 길, 상생의 길이었으면 한다.
느리게 살기위해 탈것을 버리고 두발로 걷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바쁘게 걷는다면 그것은 다시 속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대체 이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자연에 대해 다 안다고 자부하지만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은 다르다. 자연을 아는 것은 체험하는 것의 10분의 1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길에서는 느리게 걸어야 하리라.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하리라. 올레길에서는 도달해야할 목적지 따위는 잊기로 한다.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어떠랴. 길을 벗어나 낯선 길로 들어선들 또 어떠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다. 여행을 떠난 순간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노인의 걸음은 진화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걸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멀쩡한 두 다리로 걷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걷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기적이다. 걷기에는 어떤 마력 같은 힘이 있다. 걷기는 끊긴 생각을 이어주고 막혔던 사유의 물꼬를 터준다. 올레길 2코스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오조리 해안가. 썰물의 시간이다. 꼬부랑 할머니 한분이 갯것을 하러 바다에 나가신다. 걷다 쉬다, 걷다 쉬다 힘에 겹다. 저러다가 나갔던 물 다시 들어오면 어쩌시려나. 그래도 할머니는 서두르지 않는다. 여든 다섯, 할머니는 걷기가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급할 것도 없다. 가다 못가면 그만이지. 할머니는 오조리가 집이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바당에 조개 파러. 물 써면 바짝 몰라빌면 긁어 가매 조개 파갑니더. 어디서 왔으꽈?"
"인천서 왔습니다."
"걸어 왔으꽈?"
"예"
성산까지는 어찌 왔느냐는 말씀이다. 안개구름이 일출봉을 휘감고 지나간다.
"어망 아방 다 살아 있으꽈?"
"예"
"성이 뭡니까?"
"강갑니다."
"강치비? 내도 강치비 딸이우다."
"육지서 와서 부치비랑 겔혼했는데 하르방은 돌아갔수다. 공동묘지 가벴수께."
할머니는 친정이 삼천포. 제주로 시집와 육십년을 해녀로 살다가 몇 해 전 은퇴했다. 잠수 일로 얻은 직업병 때문에 이제는 바다 대신 병원으로 출근한다.
"작은 아들은 죽어부런, 산천에 간, 죽으난 묻어불고."
작은 아들은 어미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노인은 느릿느릿 갯벌을 향해 걷는다. 문득 노인들의 걸음이 느린 것은 육체의 노쇠 때문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저것은 퇴화가 아니다. 길은 북망산천 가는 길, 죽음 곁으로 가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노인들의 걸음걸이는 느리게 진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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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