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함께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가버린 시간은 화살과 같다. 어느새 올레길에서 1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애초부터 무언가를 작정하고 제주에 온 것은 아니었다. 집을 버리고 가뭇없이 떠다닌 6년. 스스로 자처한 유랑의 길이었으나 때때로 생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어깨를 짓눌렀다. 모든 것을 버렸다 생각했건만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했다. 길을 떠난 것은 존재의 실상을 찾고 생사의 비밀을 풀기 위함이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 사는 이 나라의 모든 섬들을 걸어보리라 서원을 세우고 섬들 백 개를 걸었다. 그러나 궁극은 갈수록 멀어보였다. 섬에서 만난 선지식들에게 지혜를 얻기도 했으나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있었다. 한동안 섬을 멀리하고 도시 주변을 배회하는 날들이 많았다. 도시는 마약과 같았다. 몸은 병들고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폭음과 광기의 나날들. 다시 섬으로 갈 기운을 되찾아야 했다. 그때 문득 제주의 따뜻한 빛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서귀포에 둥지를 틀고 올레길을 걸었다. 약효는 생각보다 일찍 드러났다. 예상대로 길은 치유의 길이었고 환희의 길이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삶은 다시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의 아들이 길에서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날마다 목적 없이 올레길을 걷는 것이 좋았고 서귀포가 무작정 좋았다. 그보다는 서귀포와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길가에서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경계했건만 결국 정이 들어버렸다. 마침내는 떠나야 하리라. 그래도 체류의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어찌 하면 이 길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을까. 하여 이 짧은 기록들은 그 부단한 고민의 끝자락에서 길어 올린 올레길에서 놀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봄이다. 이제 다시 서귀포에 안개의 계절이 돌아왔다. 서귀포 앞바다의 문섬과 섶섬, 새섬과 범섬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섬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개의 군단에게 자리를 내준 것일 테지. 하지만 나는 섬이, 바다와 산과 하늘이 안개 속으로 아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섬과 사람과 말과 흰 소와 검은 염소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다음에야 문득 깨닫는다. 내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자 남겨지길 원했구나. 사람은, 존재는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다. 함께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존재들 속에서 문득 혼자인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함께 있어도 함께가 아닌 것들. 사람과 말과 흰 소와 검은 염소들, 마을길과 바다와 산들. 은수자가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디며, 외로움에 미쳐버리지 않고 몇십 년을 살 수 있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혼자서는 결코 외로울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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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