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장정일 | 새마을운동이 나치시대의 히틀러 유겐트처럼 청소년 계층의 하부조직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군요. 그랬다면 영락없는 전체주의 국가가 되었을 텐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새마을운동을 극도로 폄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새마을운동이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본떠 만든 것이라는 말도 있더군요. 그런데 이 책을 보면, 국가 동원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공통점이 있지만, 운동의 시초가 민중의 자발성에 있었다는 데서 확실히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미 | 영향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복합적이니까.
이문재 | 새마을 노래에 나오는 가사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와 천리마운동의 새벽별 보기 운동이 좋은 비교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력이 우리보다 나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에게 큰 위기의식이랄까, 비교의 척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장정일 | 새마을운동을 홍보하는 사진을 보면 전경으로는 구획정리가 잘 된 바둑판 같은 논이 펼쳐져 있고 원경으로는 빨갛고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맞댄 마을이 있습니다. 이런 풍경을 만드는 데는 웬 만큼의 국가적 강압이 동반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김영미 | 농촌근대화라는 것은 한국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과제이자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강한 리더십이라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아닙니다.
장정일 | 그 여러 가지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김영미 | 새마을운동이 아닌 그 무엇이 아니라, 국가가 농촌근대화를 지원하는 방식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권위주의입니다. 권위주의와 획일성. 오히려 새마을운동을 연구하면 할수록 아이러니한 것이 자조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자유는 억압되는 구조, 그게 새마을운동의 방식이었죠. 국가의 지원은 훌륭하죠. 단시일 내에 자신의 환경과 삶을 개선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이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고요. 그러나 정말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진행됐어야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주체는 절반 이상이 공무원이고, 관련 과들이 비대해지면서, 이들이 박정희 정부의 주요 지지 세력이 된 거죠. 새마을운동은 공무원에 의해 주도된 운동입니다.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의 정신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억압과 규율과 강제동원이라는 방식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생명력은 농민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율적 주체로 길러 주는 것이죠.
이문재 | 그건 박정희 시기의 근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시기가 의미심장한데, 그때가 전태일이 분신한 시기와 겹칩니다. 농촌을 제외한 도시 지역에서의 도시노동자, 임금노동자들도 똑같은 권위주의와 획일화의 그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도시새마을운동이란 것도 생겨났겠지만, 박정희의 근대화 드라이브는 도시건 농촌이건 피지배자들에게 똑같은 억압을 주면서 자율성을 펼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장정일 | 새마을운동이 박정희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모델이라는 뜻이군요.
이문재 | 박정희 시대에 ‘농민보다 도시인들이 행복했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은 시각이라고 봅니다. 저는 ‘박정희가 우리나라를 잘살게 해줬다’, ‘경제영역에서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평가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김영미 | 그래도 도시는 엄청 잘 살게 됐죠. 행복의 기준을 경제적 수치로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장정일 |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서로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빅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면 어떨까요?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의 공을 인정해주고, 산업화 세력은 민주화 세력의 공을 인정해 주는 한편 박정희의 잘못을 인정해주는 그런 거…
김영미 | 저는 박정희 시대를 대단히 부정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이었는데, 노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왜 그분들이 대부분 한나라당 지지자일까? 왜 그럴까? 라는 의문이 풀렸습니다. 자신이 가장 활동적으로 일했던 시기를 386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거죠.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60~70년대 가장 큰 화두는 가난이었습니다. 50년대에 죽음을 넘나드는 가난을 겪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너네가 가난을 아느냐?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이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이들이 가진 또 다른 화두는 공동체성입니다. 새마을운동이 어떤 면에서 성공했다면, 정부가 마을을 중심으로 지원한 방법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민들이 마을 일이라면 적극적이었거든요. 마을의 공동체성을 활용하는 것, 그래서 그 운동의 이름도 새‘마을’운동인 거죠. 사실 이 세대들의 공동체 정신과 386세대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과 희생정신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어요. 박정희 시대를 살며 경제적 부를 일구었던 세대와 정신적 부를 일구어낸 386세대는 화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있는 거죠.
이문재 | 제가 보기에, 산업화 세력이든 민주화 세력이든 두 세력이 생각하는 자본주의 본질에 대한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두 세력이 화해해서 과거를 청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그래야겠지요. 문제는 그 두 세력이 설계하는 미래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경제논리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 세력조차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습니다. 민주화 세력도 경제를 위해 민주주의는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정일 | 빅딜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말씀이시죠.
이문재 |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두 세력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미래란 한마디로 인간과 지구를 파탄으로 내몰아온 경제논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장정일 | 요즘 나오는 우리나라의 인문학 신간을 보면, 학교든, 의학이든, 군대든 뭐든 모두 일제시기에 그 기원이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저의 거칠고 과장된 독법일 수도 있지만, 우리 ‘현대’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어쨌건 일제시기를 발본색원해야 된다는 건가요? 일제시기를 조회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현대’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뜻인가요? 『그들의 새마을운동』을 읽고 나서도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김영미 | 저는 우리나라의 ‘현대’를 알기 위해서는 식민 시대는 물론이고 그 위의 전통(조선시대)과 그 아래의 전쟁 전후 시기(6·25)를 함께 보는 통시적인 시야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근대사와 한국의 근대사 가운데는 유사한 제도가 많이 시행되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대단히 다른 모습으로 남은 제도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호주제로, 일본엔 사라졌지만 한국엔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근대화와 근대사보다 더 강하게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것이 전통사회입니다. 우리는 그것과 단절된 게 아니라, 아직도 조선 시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통사회와 현대는 그만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 거죠. 근현대사를 바라볼 때 한국적 전통사회를 보지 않고 서구에 의한 서구 근대화만 생각하는데, 역사를 통해 문제를 본질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면, 전통시대와 식민지의 유산, 전후 근대화 과정 등 여러 변수를 중첩적으로, 입체적으로 고려해야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넘나들고 분과를 넘나들면서 근대사 연구 풍토의 분절성을 넘어서는 것만이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정일 |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모든 것을 일제로부터 찾으려는 게 단견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식민시대 이전의 전통과 식민시대 이후의 전쟁 전후를 모두 중첩해봐야 현재 한국의 전모가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한국의 현재가 ‘조선 시대와 같다’는 말씀은 과장된 겁니까,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믿는 겁니까?
김영미 | 몇백 년이 지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위의 발언은 제가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보기 때문에 못 보는 많은 면들이 있다고 스스로 경계하는 측면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족과 공동체, 유교문화, 샤머니즘 등은 여전히 큰 규정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 이후의 농촌 살리기
이문재 | 구술사라는 게 상당량의 인터뷰와 녹취를 필요로 합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는지요?
김영미 | 민중에 대한 애정이랄까, 이 사람들의 삶을 역사화 해야겠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이 있었죠. 실제로 인터뷰에 나서보니 그분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삶을 역사화하고자 하는 욕망 많았습니다. 저는 듣고 배운다는 자세로 성실히 그분들의 입장을 경청하고, 생각 다른 부분은 추가 질문을 했습니다. 경청하고 배운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분들과 만나는 게 행복했고, 노인 분들에게서 인생의 지혜를 듣는다는 점에서, 역사공부도 했지만, 인생 공부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문재 | 책 제목을 정말 잘 지으셨습니다. 아주 중의적이에요. ‘그들의 새마을운동에서 ’그들‘이 ‘우리 편’인 것 같기도 하고, ‘저쪽 편’인 거 같기도 하고…
김영미 | 남편이 지은 거예요.
장정일 | 선생님은 ‘그들’을 누구로 상정하신건가요?
김영미 | 자발적인 농민도 될 수 있고…
장정일 | 자발적인 농민운동가들을 생각하고 지으신 거라고요?
김영미 | 저는 사실 그렇게 지었습니다.
장정일 | 그런데 저는 반대로 읽었습니다.
김영미 | 예. 모두들 ‘높은 사람들’의 새마을운동으로 읽더군요. 제목에 ‘그들만의 잔치’라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느낌이 있으니까.
장정일 | 서문에 ‘역사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역사화’를 하시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책을 학술서가 아닌, 대중들의 삶에 밀착한 대중서로 읽으면 되는지요?
김영미 | 대중서라는 것은 학술서를 쉽게 풀어쓴 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90%가 대학을 가는 대단한 엘리트 사회이기 때문에, 연구자가 굳이 학술서를 통하지 않고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자신의 역사적 견해를 얘기하는 책이 적극적으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문재 | 대학에 입학할 때 왜 역사학을 선택하셨나요?
김영미 | 다른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것은 수단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문학적 글재주는 없었고, 어학 등은 본질적인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반면, 역사는 문학과는 다르지만, 뭔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사학과에 입학해서는 상당히 실망했죠.
이문재 | 연구를 한다는 것이 인간과 사회의 총체를 보는 게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어떤 틀로 뜯어내는 것이어서, 실망을 한 경우도 있었겠습니다.
김영미 | 석사논문을 쓰고 도대체 역사라는 게 이렇게 연구를 해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까, 강한 회의를 했습니다. 딴에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딱 내놨는데, 사람들은 관심도 없을뿐더러, 제 삶의 영역 자체가 너무 협소하니까 스스로 대단히 고립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사람을 다루는 건데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보자는 생각으로 공부를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서 보통사람답게 살아보고 경험을 넓히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출판사에 일하게 됐죠.
이문재 | 출판사에는 언제 들어가셨나요?
김영미 | 석사를 마친 다음 해인 94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를 쓰신 주강현 선생님과 함께 모 출판사의 역사물기획팀에서 일했죠. 그곳에서 ‘대중들은 왜 역사를 읽느냐?’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내가 대중을 계몽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중은 나한테 관심이 없고 나도 대중을 모릅니다. ‘그럼 사람들이 읽는 책은 어떤 책이냐? 그 책은 왜 읽히느냐? 사람들은 어떤 부분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해하느냐? ‘역사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나?’ 이런 고민을 하면서 소통의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장정일 | 이번 책을 결정지은 사회사·지역사·구술사란 형식이 그런 고민 끝에 택해진 것이군요. 마지막으로 이번 책에서 다 못 다룬 주제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떤 점인지요?
김영미 | 제가 한계로 느낀 것은 마을 내의 권력구조를 정밀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만은 국가를 단위로 역사 연구를 할 때, 역사란 너무나 다양한 경험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이거 거짓말이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습니다. 마을이라는 단위로 가면 해결되기 쉬울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번 연구의 경우, 마을을 너무 집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게 한계로 여겨집니다. 물론 약자의 입장도 넣으려고 노력했지만 상당히 약합니다. 농민들 입장에서 본다고 했지만, 농민들 중에서도 마을 내 엘리트의 시선이 상당히 강하게 반영돼 있고, 그 엘리트들의 권위와 억압에 의해서 복종하고 동원되었던 존재인 마을의 하층민들이나 여성들의 경험이 무엇이었느냐를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남성 권위적 문화가 마을 내 약자들에게 보였던 횡포 등에 대한 분석이 미흡했죠. 이런 자괴감이 저에게 주체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듭니다. 그럼 도대체 민중사라고 하면 민중은 정말 누가 민중이냐? 민중은 정말 민중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냐? 제 생각에는 민중이나 민중의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한 인간 내에 지배계급과 저항계급의 모든 속성들이 통합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박정희 개인을 연구한다고 해서 그게 민중사가 아닌 게 아니죠. 어떤 지향과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민중이라는 주체는 달라집니다.
장정일 | 새마을운동과 연관하여 향후 연구 과제가 있다면 무엇인지 짚어 주십시오.
김영미 | 남은 과제는, 박정희 사후에 새마을운동의 여진들이 농촌사회에 어떤 식으로 남아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970년대는 농촌공동체가 해체되는 시기였습니다. 자본주의화가 필연적으로 개인주의를 수반하기 때문에 지역공동체와 씨족공동체가 급속히 해체되어나가고, 도시의 경우는 이미 70년대는 공동체 사회로서의 성격을 상실합니다. 새마을운동은 해체되어가는 농촌공동체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습니다. 당시 도시로 나가 있던 사람들이 새마을운동 한다고 하면 고향을 위해 선뜻 기금을 낸 게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농촌에는 동리재산(마을재산: 논밭, 땅, 쌀 등)이 있었는데, 식민지시기에 일본이 면제面制를 시행하면서 동리의 공동체성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동리재산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시기에 동리재산이 다 해체되고 없어지는데, 새마을운동 시기에 급속히 동리재산이 만들어지고, 마을회관이 지어지면서 농민들이 새로운 공동체문화를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된 거죠. 특히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에서는 땅값이 변천하면서 박정희가 기대하지 못했던 어떤 효과들이, 해체되어 가는 농촌공동체들이 어떻게 새로운 자기 동력을 만들었느냐는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정일 |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재 선배가 질문하시죠.
이문재 | 연구를 하고 책을 내신 뒤에도 농촌에 많이 가보셨을 텐데, 그때 어떤 생각이 드세요?
김영미 | 이 마을에 새마을운동은 뭐였나? 이런 생각 들죠. 새마을운동부터 보여요.
이문재 | 저는 농촌, 농업을 살리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농촌을 살리려면 대체 어떡해야 하나? ‘위 사람들’이나 경제 논리가 아니라 진짜 농민들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새로운 새마을운동이 절실한 시기라고 봅니다. 저는 시나 산문을 쓸 때, 농촌과 농업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새마을운동을 깊이 천착해오신 선생님께서는 농촌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영미 | 부모님이 농촌에 살고 계시고, 저도 거기 살고 싶습니다. 농촌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최소한의 생산기반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 등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판화가 이철수 씨가 사는 마을이 <프레시안>에 나왔는데 너무 부러웠습니다. 흙을 밟고 산다는 것은 경제적 가치 이상의 혜택을 줍니다. 도시와 농촌을 연계해서 만들어가는 네트워크, 도시와 농촌이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하더라도 행복하게 살겠다는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가능한 것이겠죠.
이문재 | 이 책에 신앙촌을 비롯한 자발적 농촌 공동체 운동에 관한 언급이 잠깐 나오는데요.
김영미 | 50년대에는 산업화 이전이라서 지식인들의 이상향이 낙농국 이스라엘이나 덴마크였습니다. 그래서 협동화, 농협, 실험적 농장들과 같은 농촌공동체 실험이 빈번했습니다.
이문재 | 농촌 공동체 실험에 관한 연구도 많이 안 돼 있죠?
김영미 | 역사학 쪽에서 다루어보지 못한 주제죠.
장정일 | 농촌을 살리려면 일단 농촌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의 수출액이 줄어들었다고 하면 온 국민이 자기 집 일처럼 걱정하면서, 농촌에서는 떼로 농약을 마시고 죽는대도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장시간 동안 우문을 가리지 않고 성실히 답해주신 김미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박정희 시대의 동원’과 ‘일제시기와 한국 근대의 연속성’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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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김영미
역사학자. 국사학을 전공해 「일제시기―한국전쟁기 주민동원·통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 추후 연구한 내용을 보태어 『동원과 저항―해방전후 서울의 주민사회사』를 펴냈다. 해방공간을 정치사로 역사 연구를 시작했지만 차츰 사회사로 연구 영역을 확장하여 주민동원, 지역주민운동, 일상생활사, 식민지 유산 등 한국 현대사 전반을 탐구하고 있다. 역사대중화에도 관심을 가져 『한국생활사박물관』 1~12권을 기획하기도 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이문재
시인.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생태적 상상력’의 시인으로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내가 만난 시와 시인』,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등이 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과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87년 희곡 「실내극」을 발표, 1988년 단편소설 「펠리칸」을 발표하며 극작가, 소설가를 겸업하기 시작했다. 저서로 『장정일 삼국지』 전 10권, 『장정일의 공부』, 『고르비 전당포』, 『장정일의 독서일기』 1~7권, 『햄버거에 대한 명상』, 『구월의 이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