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진 | 어느덧 오늘이 2010년 마지막 좌담이고, 비평테이블 마지막 회다.
김남혁 | 시간이 정말 빠르다.
박 진 | 그러게 말이다. 1년 넘게 함께해온 비평테이블을 마무리하는 최종회이니만큼, 오늘은 우리가 독자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소설을 골라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대형작가들의 베스트셀러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런 책들 이상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소설들을 골라봤는데, ‘혼자 읽기 아까운 2010년의 소설’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싶다.
장성규 | 괜찮다. 마음에 든다.
박 진 | 좋다. 우리가 선택한 책은 윤고은의 『1인용 식탁』,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 그리고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이다. 먼저 자기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책을 간단히 소개하고,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이유가 뭔지 얘기해주면 좋겠다. 윤고은의 『1인용 식탁』은 장성규 씨가 추천한 소설인데?
장성규 | 개인적으로 고전적인 미메시스 방식보다는 새로운 미학적 실험을 통해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가상현실의 문제를 탐색하는 윤이형이나 극적 구성이라는 형식 실험을 통해 분노의 파토스를 극대화시키는 김사과의 작업 등이 그렇다. 윤고은 역시 이런 맥락에서 주목하는 작가다. 윤고은 작품의 핵심은 환상과 현실 사이의 대위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를 통해 윤고은은 현실의 비루함을 실감의 영역으로 재현해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환상들이 현실과 겹쳐짐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등단작인 『무중력 증후군』에서 주목되는 것은 환상마저도 자본의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통된다는 날카로운 인식이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아이슬란드」 등의 작품을 보면 한편으로는 현실의 비루함을 부각시키는 기제로 환상이 사용되면서, 동시에 이 환상마저도 단단한 현실법칙의 예외일 수는 없다는 인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박 진 | 장성규 씨 말대로 2000년대 젊은 소설의 환상이 ‘탈현실’의 징후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나름의 발언과 대응의 방식임을 잘 보여준 작가가 윤고은이다.
장성규 | 그렇다. 2000년대 문학의 중요한 징후 가운데 하나가 환상성의 대두일 텐데, 윤고은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긴장감은 환상이 지니는 전복성마저도 포획하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박 진 | 벌써 중요한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윤고은 소설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김남혁 씨는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과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을 추천해줬는데, 이 소설들이 왜 좋았나?
김남혁 | 글쎄, 한 마디로 말하기는 참 어려운데… 좋은 작품은 분석의 한계를 알려주는 작품들인 것 같다. 나한테는 최제훈 소설과 이장욱 소설이 그랬는데, 분석하고 나서도 분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들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최제훈 소설의 경우에는 「퀴르발 남작의 성」,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괴물을 위한 변명」이 특히 좋다. 이들 작품에는 최제훈의 매력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 작품에 내장된 문제의식을 거론하기 이전에, 등장인물들의 감칠맛 나는 대화와 신선한 위트, 정교하게 조직되는 추리 서사, 고전을 새롭게 읽어내는 작가의 재능 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또 이장욱 소설들에는 존재 동사(be)로 한정할 수 없는 유령이 끊임없이 출몰한다(haunt). 그의 소설에서는 죽었다고 판단되는 타자가 언제든 불편한 진실을 들고 우리 곁으로 찾아든다. 그 중에서도 「곡란」, 「고백의 제왕」, 「변희봉」, 이 세 편이 가장 마음에 남는데, 독자들도 이 작품들을 먼저 읽고 좌담을 읽어주면 더 좋을 것 같다.
박 진 | 단정적으로 말해주지 않으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추천의 말인데…(웃음) 어쩌면 비평가로서 최고의 찬사를 보낸 걸지도 모르겠다.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은 나 역시 무척 재밌게 읽은 책이고,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은 이전 좌담에 참여했던 조효원 씨도 적극 추천해준 소설이었다. 그리고 내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인데, 이 소설은 담담하면서도 가슴 아프고, 그러면서도 또 따뜻한 위로를 준다. 요즘 위로라는 말은 독자들의 요구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말인 것 같다. 현실이 너무 지독하고 도무지 변할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까, 이런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위로라고 해도 다 같은 위로는 아닐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감추면서 아직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너만 잘 하면 괜찮다고 말하는 위로가 있는 반면, 현실이 정말 끔찍하고 견디기 어렵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힘을 주고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위로도 있다. 황정은 소설이 주는 위로는 이 두 번째에 속한다. 누구보다 정직하게 현실의 고통을 응시하지만, 그럼에도 분노나 냉소보다 더 큰 힘을 주는 소설이라서 각별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장성규 | 나도 한 권 더 추천하라면 황정은의 소설을 골랐을 것 같다.
박 진 | 그렇구나. 좌담을 하는 동안 취향들이 많이 다르고 관점도 각자 다 다르다고 느낀 적이 많았는데, 이 네 권의 소설이 좋았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들이 모아지는 것 같다. 그런데 우연이겠지만, 황정은 소설만 장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단편집이다. 특별히 단편집을 추천한 이유가 있는지, 단편집을 더 좋아하는 편인지 궁금하다.
장성규 | 일단 비평테이블에서 장편을 주로 다뤘으니까…(웃음) 말을 바꾸면 장편이 지닌 이야기성이 지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거지만, 압축적이면서 날카롭게 현실을 찌르는 단편소설들의 또 다른 매력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장편소설의 진짜 매력은 긴 스토리를 통해 세계와의 대결이랄까, 이런 지점을 폭넓게 보여주는 걸 텐데, 지금은 그런 장편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세계를 완결되게 바라보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고, 하나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문제적 개인을 통해 현실을 관통하는 작품이 나오기는 다소 어려워진 것이 2000년대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요즘에는 오히려 소소해 보이는 사건을 통해 현실의 균열과 잉여의 지점을 찌름으로써 단단한 현실의 전복 가능성을 타진하는 단편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고, 이런 단편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박 진 | 공감이 가는 말이다. 단편소설에는 확실히 술술 읽히는 긴 이야기의 매력은 좀 떨어지지만 장편보다 밀도가 있고, 짧은 분량 안에 세상을 보는 독특한 시선을 감각적으로 담을 수 있다. 좋은 단편집을 읽으면 서로 연관되면서도 다채롭게 변형된 한 작가의 세계를 만날 수 있어서, 장편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김남혁 | 최제훈 소설집이 정말 그렇다. 단편소설 한 편 한 편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단편들이 묶여서 하나의 소설집을 이룰 때 드러나는 완성도도 중요하다. 이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마치 연작소설처럼 단독성과 연속성을 모두 지니게 된다. 단편 하나하나는 저마다 어느 작품과도 공유될 수 없는 미학적 특성을 지니는데, 흥미롭게도 그 단편들이 소설집이라는 형식으로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 이상한 연속성을 드러내게 된다. 최제훈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색다른 개성을 지니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엮여서 다른 묶음으로 탄생될 수 있다.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계통이 다른 시체의 조각들을 결합해서 괴물을 탄생시키듯이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인상적인 작품을 싣고 있는 이 소설집 자체가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형식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 같다.
박 진 | 자연스럽게 『퀴르발 남작의 성』부터 살펴보면 좋겠는데, 이 책은 윤고은의 『1인용 식탁』과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소설집은 유독 젊고 발랄하고 감각적이다. 환상적이고 장르적인 요소들, 유머와 위트, 풍자와 냉소 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작가의 개성을 비교해서 말해보면 어떨까?
장성규 | 두 작가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방식은 좀 다른 것 같다. 최제훈이 ‘위로부터’ 지적인 방식을 통해 세련된 환상들을 만들어낸다면, 윤고은은 ‘아래로부터’의 실감을 통해 소소한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발랄함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최제훈이 다양한 텍스트들의 교직과 충돌을 통해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비해, 윤고은은 텍스트 이전의 구체적인 일상의 영역에서 출발해 현실과 환상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나아간다.
박 진 | 날카로운 지적이다. ‘위로부터/아래로부터’, ‘텍스트/일상’이란 대비가 두 작가의 차이를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이렇게 보면 두 작가는 컬러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인 면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김남혁 | 내 느낌도 비슷한데, 두 작가의 특징은 결말의 형식을 통해서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윤고은 소설은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후기자본주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의 상황을 문제 삼고, 그런 이 사회를 감옥 없는 감옥으로 묘사한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단편들은 대개 처음과 끝의 장면이 순환하는 결말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감옥 없는 감옥에 갇힌 인물의 상황을 잘 드러낸다. 반면에 최제훈 소설은 텍스트, 담론, 정체성 등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그에게는 의미가 고정된 텍스트나 담론이나 정체성 같은 것은 없다. 고정된 것들은 시간이 지나거나 배열이 바뀌면서 다시 열린 의미로 확장된다. 그래서 그의 단편들은 대체로 열린 결말의 형식을 띠고 있다.
박 진 | 순환하는 결말과 열린 결말, 이것도 재미있는 생각이다. 두 소설집 중에서 장성규 씨는 역시 윤고은 소설이 더 좋은가?
장성규 | 윤고은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과 환상의 대위법을 통해 환상의 전복성 자체에 대해 성찰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작가들이 환상적인 기법을 사용하지만, 환상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현실의 메커니즘에 대해 사유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윤고은 소설의 의미는 이런 데 있다고 생각하고… 최제훈은 흥미로운 작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의’를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가 보여주는 메타 픽션이 이미 김연수와 한유주를 경유한 우리 문학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더해줄 수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보다 세련된 김연수를 보는 느낌도 좀 들었다.
김남혁 | 그런가? 취향 탓이겠지만, 나는 『퀴르발 남작의 성』이 더 좋다. 열심히 읽고 공부해서 쓰는 소설이라 마음에 드는지도 모르고…(웃음) 특히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는 정말 재미있었다. 마치 영화 <토이 스토리>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소설집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퀴르발 남작의 성에 모여 있다. 독자가 책을 열기 전에 책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독자와 무관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한바탕 난장을 벌이기도 한다.
장성규 | 그 소설은 정말, 최제훈의 문학적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집 구성상으로도 재미있는 에필로그라고 생각한다.
김남혁 | 이 마지막 단편에서 최제훈은 작품이 작가나 독자보다 강력하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는 것 같다. 작품은 일종의 타자로서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는데, 독자 몰래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이 같은 최제훈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에 비하면, 윤고은의 단편들은 한자리에 모아서 읽다 보니 문제의식이 조금 반복되는 것 같았다. 상황을 설정하는 것은 다양하고 흥미로운데, 문제의식은 좀 단순한 게 아닐까 한다.
박 진 | 나도 취향은 『퀴르발 남작의 성』 쪽인데, 지적인 소설이어서는 아니고… 사실 표제작 「퀴르발 남작의 성」처럼 텍스트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니컬한 시선이 두드러진 소설은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소설에 출몰하는 온갖 괴물들에 정서적으로 끌리는 편이고…(웃음) 추리물과 호러 같은 장르코드들이 뒤섞이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도 흥미롭다. 특히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가 만든 자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현실에 개입하는 모습들, 허구가 현실을 변형하고 뒤바꿔버리는 양상들이 눈길을 끈다. 이 책에도 “많은 이들이 똑같은 상상을 하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상상이 아니다”(「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 189-190쪽)라는 문장이 나오지만, 실제로 허구 또는 시뮬라크르가 우리 삶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소설들이 여러 편 들어 있다.
김남혁 |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도 그렇다.
박 진 | 맞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서 홈즈가 코난 도일의 자살 사건을 수사한다는 설정은 정말 기발하다. 자신이 허구의 인물임을 알지 못하는 홈즈의 모습도 흥미롭지만, 자기가 창조해낸 인물 홈즈로 인해 자살에 이르게 되는 코난 도일의 모습이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이런 양상이 「그림자 박제」와 「그녀의 매듭」에서는 스스로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가 ‘나’를 점령해버리고, 거짓말과 합성사진이 전혀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야기들은 기존의 텍스트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들보다 더 섬뜩하고 실감 있게 느껴진다. 허구 또는 시뮬라크르의 강렬한 자율성이랄까, 현실을 구축하고 작동시키는 환상의 이데올로기적 실제성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장성규 | 그렇지만 텍스트 다시 쓰기에 집중하는 소설들의 경우에는 이미 2000년대에 김연수나 한유주가 보여준 메타 픽션으로부터 나아간 지점이 무엇인지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연수가 텍스트 이면의 리얼리티들에 주목했고, 한유주가 텍스트를 기술하는 행위 자체의 불가능성에 주목했다면, 최제훈에게는 화려한 기법들에 비해 텍스트를 바라보는 독창적인 관점이 다소 불분명하다는 점이 아쉽다. 더구나 지금은 누구도 단일한 텍스트의 존재를 믿지 않는 시대 아닌가? 이제는 단일한 텍스트가 무엇을 억압했고, 그래서 무엇을 복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기존의 텍스트를 전복함으로써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 안티테제가 아니라 진테제가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최제훈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팔짱끼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김남혁 |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얘기다. 최제훈의 소설은 모든 진실은 담론의 효과일 뿐이고, 마녀니 괴물이니 하는 타자는 주인의 욕망이 투영된 환상의 구성물이라는 식의 결론으로 수렴된다. 이런 문제의식은 현실의 고정된 의미를 교란하는 정치성을 이끌어내면서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며 자포자기하는 반정치에 함몰되기도 한다. 전자의 문제의식은 이번 소설집에 많이 등장하는데, 후자의 부정적인 경향에 대한 인식은 볼 수 없었다. 이런 점을 더 깊이 사유하는 소설이 발표됐으면 좋겠다.
박 진 | 윤고은 소설에 대해서도 좀 더 얘기해보자. 「박현몽 꿈 철학관」이나 「로드킬」 같은 소설이 가장 윤고은다운 소설일 텐데, 재기발랄한 환상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후기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초라하고 비참하게 전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선명하게 가시화한다. 이 몇 편의 인상적인 작품만으로도 우리 소설에서 윤고은이 지닌 자리는 분명하다고 해야겠다.
김남혁 | 윤고은 소설의 소재나 상황 설정은 현실적이지 않기에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동시에 비현실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서 이 시대 상황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혼자 밥 먹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학원(「1인용 식탁」)이나 백화점 화장실에서 글을 쓰는 소설가(「인베이더 그래픽」), 꿈을 대신 꾸어주는 역술인(「박현몽 꿈 철헉관」)이나 자판기로만 관리되는 무인 모텔(「로드킬」) 등이 그렇고, 이 소설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음주 통화를 받아주는 서비스업(「해마, 날다」)의 등장도 그렇다. 이런 식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은 취향의 문제를 떠나서, 윤고은 소설이 지닌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박 진 | 그런데 『1인용 식탁』은 작품들 사이에 편차가 크다는 게 좀 아쉽다. 좀 덜 좋은 작품일수록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인 인상이 들기도 한다. 「달콤한 휴가」가 그런 예인데… 그리고 「인베이더 그래픽」이나 「타임캡슐 1994」처럼 경쾌함이나 유머 코드가 약화되고 초라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전면에 부각되면 매력과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도 약점이다.
김남혁 | 나 역시 「홍도야 울지 마라」는 소설집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윤고은의 이번 소설집에서 「로드킬」이 나에게는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죽어야만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하는데, 발랄하고 흥미로운 상상력 이면에 씁쓸한 정서를 느끼게 한다.
장성규 | 나도 이 책에서 「로드킬」이 가장 좋았다. 인간의 욕망이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상품이 욕망을 생산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화폐를 지니지 못했을 경우 비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주체의 허상에 대한 폭로, 그리고 루저들을 종국에는 ‘야생동물’로 퇴화시키는 메커니즘에 대한 냉철한 형상화 등등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솔직히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웃음)
박 진 | 가진 돈이 줄어들수록 모텔 천장이 낮아지는 장면 같은 건 정말…(웃음) 「1인용 식탁」과 「아이슬란드」처럼 꿈이나 환상이 초라한 현실을 벗어나는 탈출구가 될 수 없다는 데 대한 정직한 실감을 보여주는 소설들도 꽤 좋았다.
김남혁 | 윤고은과 최제훈 소설을 묶어서 정리하자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이 두 작가의 소설은 현실보다 환상이 더 리얼하다는 식의 진부한 결론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런 결론은 환상을 옹호함으로써 기존의 상투화된 리얼리즘에서 벗어나는 것 같지만, 환상과 현실을 둘로 나누는 리얼리즘의 이분법을 고스란히 따르는 한계를 지닌다. 이들의 소설은 환상이 현실보다 리얼하다는 식의 주장을 하지 않고, 도리어 현실(또는 진실)은 환상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알려준다. 기존의 리얼리즘을 대체하기 위해 구체적인 현실 대신 환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은 현실과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진정 리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가 우리 문학에서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박 진 | 김남혁 씨가 두 소설집의 의의를 잘 정리해줬다. 이제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과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로 넘어가자. 두 작품(집) 역시 재현적인 리얼리티를 넘어서고 있지만, 앞의 소설들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소외된 자, 여리고 약한 자들에 대한 애정이 두드러지고 전반적으로 따뜻한 정서가 흐른다.
김남혁 | 이들 소설은 현실에서 배제된 자들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을 재현하지 않으려는 긴장을 보여준다. 재현이라는 형식 자체가 이들에 대한 이해보다는 또 다른 방식의 배제를 낳기 때문이다. 가령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는 전부 다르게 생긴 가마를 가마라고 부르면 편리하기는 한데 상당한 폭력이라는 말이 나온다. 비슷한 맥락에서 슬럼이라는 단어에 대한 성찰도 담겨 있다. 황정은과 이장욱의 소설은 이런 언어의 재현성에 주목하고, 아무리 약자들의 편에 있다 하더라도 재현이라는 형식 자체에 의해서 약자들의 이질성을 단순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걸 일깨우는 소설들이다. 그렇기에 재현 불가능한 인물들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자나 유령이 중요한 모티프로 차용된다. 존재하지도 부재하지도 않는 어떤 경계에 걸쳐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려 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하는 소설들이다.
박 진 | 유령처럼 있어도 없는 듯한 희미한 존재들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미미한 목소리 되살려내려는 노력,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고 붙잡아주려는 욕망 같은 건 무척이나 소중하다. 다만 이장욱의 단편들 중에서 이들의 모습이 유령이나 귀신으로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매너리즘에 빠질 우려도 있어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형식의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미 트렌드가 되어버린 경향도 있고…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절실했다 해도 반복되면 어쩔 수 없이 상투화되기 마련이니까.
장성규 | 그런데 두 작가가 마이너리티를 다루는 방식에는 좀 차이가 있다. 연민과 교감의 차이라고 할까? 이장욱의 경우에는 ‘이런 소외된 사람들이 있구나’ 하면서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황정은 소설은 직접 그 삶 속에 들어가서 함께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황정은에게는 ‘그림자’로 표상되는 마이너리티의 삶 그 자체가 중요하다. 『백의 그림자』에서도 핵심은 현실의 비루함 속에서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자에게 잠식당하는 인물들의 삶이다. 황정은에게 마이너리티의 문제는 단순히 배경이나 소재적 층위에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문학적 근거로 작용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에 비하면 이장욱의 경우 마이너리티를 둘러싼 현실적 상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초점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고.
박 진 | 연민과 교감. 이번에도 장성규 씨가 두 작가의 특징을 선명하게 비교해주었다. 최제훈과 윤고은 소설처럼 이장욱과 황정은 소설 역시 ‘위로부터/아래로부터’라는 말로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이장욱은 상당히 지적인 작가고, 고전적인 미학과 균형감각을 갖추고 있다. 「고백의 제왕」이나 「변희봉」 같은 소설은 정말 한 마디도 빼거나 더할 것이 없이 완벽하게 짜여 있는 느낌인데, 신비평 용어로 하면 ‘잘 빚은 항아리’라고 부를 만하다. 문예창작과 수업 교재로 쓰일 법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법한, 그런 소설이다. 이게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을 거 같다. 너무 꽉 짜여 있어서 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좋다’는 느낌보다 ‘잘 썼다’는 느낌이 먼저 드니까. 반면에 황정은의 경우는 잘 썼다 못 썼다를 떠나서 ‘참 좋다’는 느낌이 확 오는 경우다. 오히려 약간 허술해 보이기도 하고 만들어냈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드는 소설인데, 정서적으로 끌어당기고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굉장하다.
김남혁 | 황정은 소설은 언어의 재현성을 거부하듯이, 빈틈없이 구축되고 직조되는 언어를 거부하는 듯하다. 그래서 황정은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언어의 여백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서사가 사라지거나 언어에 대한 추상적 사유로 나아가지 않고, 지금 당대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점이 황정은 소설의 독특한 매력이다.
박 진 | 그래도 김남혁 씨는 이장욱 소설을 더 좋아하지 않나?
김남혁 | 이번에도 취향 탓일지 모르겠는데…(웃음)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소설이나 영화 등이 수시로 등장하는 이장욱 소설의 스타일이 무척 흥미롭다. 「곡란」에서는 여관에서 벌어지는 자살소동과 인물들의 맥락 없는 대화와 ‘꿈틀거리는 것’ 운운하는 표현 등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1965)을 연상시킨다. 또 「안달루씨아의 개」에서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마다 여지없이 기어 나오는 개미들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안달루씨아의 개>(1929)를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독자들은 자기 나름의 문화적 경험치에 따라 이장욱의 같은 소설에서도 다른 시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수없이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기차 방귀 카타콤」을 읽은 독자 가운데 주인공이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주목한 사람은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나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처럼 기억에서 사라졌던 작품들이 유령이 되어 되돌아오듯 이장욱 소설 안에서 계속 부유한다는 점이 내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박 진 | 역시 지적인 독법이다.(웃음) 웰메이드라는 측면에서 이장욱 소설에 대해 좀 더 말하면, 이장욱은 작품집을 묶으면서 처음 잡지에 발표했던 소설을 공들여 개작했다. 냉소적이거나 서늘하거나 모호한 지점들을 다 깎아내고, 따뜻하게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고백의 제왕」이나 「동경소년」이 그런 예들이다. 그래서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더 선명하고 깔끔하고 완결성이 높아졌는데, 이것이 꼭 좋은 개작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좁히고 또 다른 매력들을 축소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김남혁 | 그랬었나? 중요한 지적인 것 같은데?
장성규 | 덧붙여서 이 두 작가는 발화의 측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여준다. 황정은의 경우에는 발화할 수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결핍이나 침묵의 형식으로 증언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인다. 이런 의지가 종종 투명한 진술에 반(反)하는 불투명한 웅얼거림으로 표현된다. 한편 이장욱은 진실된 발화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고백의 제왕」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발화하는 주체의 행위이지 발화의 진실성 여부가 아니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단단한 소설적 발화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허무주의적 인식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장욱은 주체와 타자간의 소통 가능성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주체와 타자간의 소통을 위한 시도가 소설적으로 치열하게 진행된 것 같지는 않다. 황정은이 그야말로 윤리적인 층위에서 비존재들의 발화를 어떻게든 복원시키려 한다면, 이장욱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탐색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든다.
김남혁 | 그런 면도 있긴 하다. 제도에서 누락된 타자의 비극적인 삶을 그려내는 「곡란」의 경우, 이들의 사회적 소통 가능성은 비관적으로 나타난다. 「고백의 제왕」은 타자와 대화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을 방어하기 위해 유쾌한 게임의 방식을 도입하고, 다른 인물들을 받아주는 척하면서 세련되게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변희봉」 같은 소설은 「곡란」에 등장하는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소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박 진 | 작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아르마딜로의 공간」처럼 비교적 초기에 쓴 소설들에서 이장욱 소설의 ‘웅얼거림’은 확실히 혼자 중얼대는 독백의 성격을 띤다. 황정은 소설의 ‘웅얼거림’이 논리적이고 정돈된 언어로는 불가능했던 소통의 다른 가능성으로 열리는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장성규 | 이장욱 소설은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보다 치열하게 탐구했으면 한다. 그래야만 자폐적 고백이 공감의 발화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 진 | 의미 있는 지적이다. 시인으로서, 비평가로서 이장욱이 보여준 탁월한 능력이 있고, 그런 만큼 이장욱 소설에 거는 우리의 기대도 큰 것이 아닐까 한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 대해서도 좀 더 말해볼까? 황정은 소설에서는 언어에 대한 섬세한 감각으로, 결코 누구에게도 폭력이 되지 않을 문학의 언어를 구현하려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 아까 김남혁 씨가 말해준, ‘가마’나 ‘슬럼’이란 말에 대한 자의식이 대표적인 예일 텐데… 황정은 소설의 언어 감각은 일상적이고 지배적인 언어, 무감각한 언어의 폭력성을 문득 일깨우는 힘이 있고, 일상 언어를 돌연 시적으로 변환시켜 다른 목소리로 울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사소한 예일지 모르지만, 그림자를 따라가려는데 자기 목소리가 ‘차마, 차마’하면서 따라온다거나(45쪽), 등에 들러붙은 그림자가 ‘어차피, 어차피’라고 속삭인다거나(134쪽) 하는 부분에서, 나는 그 말들이 참 특별한 울림을 지닌다고 느꼈다.
김남혁 | 나는 오무사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오무사라는 협소하고 열악한 공간에도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점, 오무사를 평생토록 지켜온 할아버지의 투박한 고집과 섬세한 배려, 오무사처럼 작아서 보이지 않고 세상에서 지워진다고 해도 누구하나 아쉬워할 것 없는 공간에 대한 정성 어린 묘사 같은 게 참 인상 깊었다. 이런 대목에서 ‘가마들’을 ‘가마’라는 단어로 평균화시키지 않으려 하고 ‘가난’을 ‘슬럼’이란 단어로 대체하지 않으려 하는 작가의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박 진 | 유곤 씨 이야기도 잊히지가 않는다. 철거될 건물 안에 세 들어 있는, 그림자가 일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모두 마음을 찌르지만, 특히 유곤 씨의 이야기는 고통스러울 만큼 가슴 아프다. 그의 아버지가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타워크레인의 추가 떨어져 깔려 죽었을 때, “죽음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세 시간이나 추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66쪽)는 이야기나, 장례식장에서 그의 어머니가 “저것은 네 아버지가 아니다,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를 어딘가에 숨겨두고 네 아버지라며 돼지 한 마리를 가져다 두었더라”(66-67쪽)고 말하는 장면은 눈을 감고 싶을 만큼 참혹하다. 그런데도 절규하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장성규 | 이 소설에서 마이너리티의 삶이란 그림자를 평생 업고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다. 그런데 역으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림자가 있지 않은가? 그림자가 없는 인간, 즉 메이저리티란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황정은 소설에서는 그렇다. 이점이 마이너리티의 삶에 대한 황정은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박 진 | 나는 특히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환상 자체나 그것이 암시하는 암담하고 희망 없는 현실 상황보다, 그림자를 따라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마음 상태, 말하자면 ‘차라리 다 놓아버릴까’, ‘그냥 죽어버릴까’ 하는 심정 같은 게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기도 마찬가지로 힘들고 지쳤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는 마요’, ‘너무 깊이 따라가지는 않도록 조심해요’라고 당부하는 서로의 마음들이 무척 간절하게 와 닿았다.
김남혁 | 박진 씨는 이 소설이 정말로 좋았나보다.
박 진 |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진다. 두 번째 읽을 때가 더 좋았고, 세 번, 네 번을 읽어도 여전히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결말은 어땠나? 중간에 툭 끝나버린 느낌이 들 수도 있겠는데…
장성규 | 장편소설로 본다면 구성이나 완성도가 약해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소설은 경장편이고 연작소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모아지는 게 아니라서, 결말에 오면 약간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좀 허망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꽉 짜인 소설과는 다른 따뜻함을 전해주기도 하고.
박 진 | 어떻게 보면 완성도를 높이는 결말이 오히려 작위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누가 죽거나, 철거가 된 폐허에서 울부짖거나, 아니면 더 행복한 해결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런 어두운 상황을 함께 헤쳐 나가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며 손을 잡고 걸어 나가는 이런 진행형의 결말이 더 실감 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결말이 아쉬웠다면, 나는 이 소설이 좀 더 계속되기를, 벌써 끝나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거 같다.(웃음)
김남혁 | 오늘 다룬 네 작가 모두 당대의 문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당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준 소설가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도 이들이 고루한 선생님이 되지 않고, 이들의 작품이 뻔한 고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 진 | 그러기 위해서 이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잘 살려나가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힘 있게 자기 세계를 확장해나갔으면 한다. 이제 좌담 최종회를 마무리하면서 2010년의 출판/독서 경향과 그동안의 비평테이블을 정리해보자.
김남혁 | 아, 마음이 짠하다.(웃음) 우리가 좌담에서 다룬 12개의 크고 작은 주제를 보면 올 한 해 출판 경향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올해는 장편소설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해였고, 그 기대만큼이나 많은 수의 장편들이 번역되거나 창작된 해였다. 장편소설에 대한 기대는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짜인 한국문단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에서 비롯됐는데, 그런 의도와 다르게 상업적인 측면으로 왜곡된 경향도 없지 않았다.
장성규 | 다양한 문학적 흐름들이 활발히 공존한 한 해였지만, 공동의 가치를 진지하게 모색하려는 문학적 경향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몇몇 한정된 작품들만 관심을 끌고 유통되는 구조가 반복되기도 했다. 우리 문학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열린 시각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박 진 | 그렇다. 특히 2010년은 대형작가의 초대형 베스트셀러 장편소설들이 시장을 점령하면서 승자독식 현상이 더욱 극심해진 한 해였다. 침체됐던 문학 시장이 살아났다지만, 오히려 읽히는 책의 다양성은 줄어들고 독서 경향은 단순해지기도 했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좌담을 비롯해 우리가 소개한 젊은 작가들의 활발한 움직임에도 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한다. 끝으로, 그동안 환상의 호흡으로 비평테이블을 함께 만들어준 김남혁, 장성규 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
김남혁 | 좌담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청소년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스크린셀러 등을 다루었던 좌담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좌담이 아니었다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작품들과 주제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문학장을 살펴보지 않은 채 작품에만 함몰된 비평이 내재적인 분석 없이 고공비행하는 비평만큼이나 고루하고 비정치적일 수 있다는 점을, 여기 좌담에 참석했던 동료들이 일깨워준 것 같다.
장성규 | 나 역시 비평테이블을 통해 나와는 다른 독법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래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고답적인 비평과는 달리 인터넷 상에서 직접 다수의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도 무척 매력적인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다른 자리를 통해 이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길 바란다. 다소 딱딱할 수 있는 비평가들의 좌담을 꼼꼼히 읽어주신 독자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박 진 | 그동안 비평테이블은 전문 비평과 일반 독자의 거리, 비평 담론과 출판 시장의 간격을 좁히고자 노력했는데, 독자 분들 보시기에 어땠는지 모르겠다. 아쉬움은 뒤로 하고,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자. 이제 우리, 송년회 겸 ‘쫑파티’ 하러 자리를 옮길까? 독자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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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
장성규
문학평론가.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문학과 현실의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해 관심이 많다. 리얼리즘의 급진적 재구성이라는 주제를 공부하려는 큰 ‘욕심’(만)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