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혁 | 만나서 반갑다. 오늘 우리는 여성 작가들의 신작 장편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하성란의 『A』,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조경란의 『복어』 이렇게 세 편이다. 이들 세 작가는 비슷한 연배이고, 또 비슷한 시기에 등단해서 90년대 이른바 ‘내면성의 문학’이란 흐름 안에 놓여 있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먼저 이들 세 작가의 이전 소설들 중에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했던 작품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장성규 | 세 작가 중에 개인적으로 하성란 씨의 작품을 좋아한다. 먼저 하성란의 「곰팡이 꽃」(『옆집여자』, 1999)이 떠오른다. 매우 디테일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나아가 쓰레기봉투 하나에 대한 묘사를 통해 현대사회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비판적 인식까지 보여주는 문체의 힘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
박 진 | 나 역시 하성란의 이전 단편들이 좋다. 「곰팡이 꽃」 말고도 「옆집여자」「악몽」「즐거운 소풍」(『옆집여자』), 그리고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파리」「기쁘다 구주 오셨네」「고요한 밤」(『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2002) 등이 기억에 남는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괴물 같은 악마성을 고요하고도 섬뜩하게 드러내는 소설들이다. 특히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는 독자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단편집이다. 편혜영의 두 번째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2007) 이상으로 일상의 악몽을 생생히 그려낸 소설들이다.
김남혁 | 우리 모두 하성란 소설의 애독자인가 보다. 보통 ‘현미경적 묘사’라고 표현되곤 하는 하성란 소설의 기법적 특성을 장성규 씨가 언급해주었다. 하성란은 이런 방식의 묘사를 통해 사태에 대해 꽤 집요하게 접근한다. 그런데 이런 접근 방식은 기억을 통해 과거의 사실에 접근할 때도 비슷하게 작동된다. 이를테면, 「강의 백일몽」(『웨하스』, 2006)이나 「알파의 시간」(『2009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같은 소설들은 과거를 끈질기게 기억하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복구할 수 없는 기억 불가능한 지점들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렇지만 하성란의 소설은 그 기억 불가능한 지점들 때문에 진실은 없다는 식의 차가운 냉소에 빠지는 대신, 자기동일성으로 구축된 진실을 반성하게 하고 더 나아가 타자를 더 많이 이해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하성란의 이전 소설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못다 한 이야기들은 조금 있다가 신작 『A』와 함께 말해보자. 조경란과 한강의 이전 소설들은 어떤가?
장성규 | 조경란의 경우에는 데뷔작인 『식빵 굽는 시간』(1996)이 기억난다. 아마 당시 함께 신인상을 수상했던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대비되어 더욱 그런 것 같다. 간결하면서 여운이 남는 작품이라고 기억한다. 다양한 빵들의 이미지와 결부된 각 장의 구성도 깔끔했었다. 한강은 『검은 사슴』(1998)이 떠오른다. 뭐랄까, 공감은 잘 되지 않았지만, 예술의 구도적 성격이랄까, 이런 것을 착실하게 파고드는 작가라는 느낌이 강했다. 모두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특히 문체의 힘이 인상적이었다는 기억이 공통적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 제기도 가능할 것 같다. 하성란을 포함해서 이들 세 작가는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작가들임에는 분명한데, 조경란 소설과 한강 소설은 문제의식이 조금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 진 | 비슷한 생각이다. 조경란 소설은 『식빵 굽는 시간』과 『불란서 안경원』(1997)에서부터 강조됐던 가족, 소통, 죽음 같은 키워드들을 반복해온 경향이 있고, 한강 소설은 『내 여자의 열매』(2000)에 도드라져 보이는 식물성과 여성성의 세계를 고집해온 듯한 인상을 준다.
김남혁 | 그런 한계는 흔히 ‘내면성의 시대’라 불리는 90년대 문학 전반에 대한 반성과도 통하는 문제일 것이다.
박 진 | 그렇다. 정치, 사회, 역사 같은 큰 틀에 주목하느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실존적 문제들에 눈을 돌리고 거대담론으로 포착할 수 없었던 내면의 미세한 결들에 집중하는 90년대 문학은 당시로서는 신선하기도 했고 우리 문학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움직임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차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상투성에 빠져들기도 했고, 또 개인의 내면에 미치는 사회적 문제의 긴밀한 작용을 간과하고 문학적 관심의 영역을 한 편으로 치우치게 만드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2000년대 문학은 개인과 사회,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형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90년대적 맥락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녔던 ‘내면성의 문학’이라는 좀 이상한 수식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실존과 내면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내면성의 세계란 어디에도 없다는 뜻에서도 그렇고.
김남혁 | 장성규 씨와 박진 씨의 말에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이번 좌담은 90년대를 대표했던 여성작가들의 작품세계가 2000년대 이르러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2000년대 문학이 개인과 사회,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어떻게 그리는지 알아보는 데 있다. 그렇다면 먼저 한국문학이나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2000년대에 처음 만난 독자들을 위해 90년대 문학의 한 특징을 설명하는 말인 ‘내면성의 문학’이 무엇이고,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지녔는지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세 작가와 관련해서 간단한 설명을 부탁한다.
장성규 | 글쎄, 내면성이라는 말 자체가 광범위해서… 한편으론 이들 작가들이 내면성의 문학이라는 틀로 모두 수렴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90년대에, 과거 8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급속한 퇴조 속에서 개체의 내면 고백이나 존재에 대한 탐색 등이 주된 화두로 등장했고, 이를 내면성의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것 같다. 조경란은 데뷔작부터 오늘 다룰 『복어』까지 지속적으로 ‘태생’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과정에서 초점은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백으로 모아진다. 한강의 작품들은 내면의 심연에 놓인 ‘기억’의 문제를 그녀 나름의 예술관과 연계시켜 형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문학 예술의 근본적인 주제 중 하나인 ‘존재’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작업이 다소 일반론적인 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존재의 유한성과 구도로서의 예술이라는 메시지는 지나치게 뻔한 얘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미 1920년대 김동인이 보여준 인식에서 벗어난 지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하성란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구별되는 것 같고, 그래서 하성란의 작품을 내면성의 문학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다소 어렵다고 생각한다.
박 진 | 세 작가 가운데 90년대적인 내면성의 문학이란 말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가는 조경란일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채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하염없이 자기 안을 응시하는 여리고 깊은 눈길 같은 것. 안경점의 통유리 안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지키려 하는 「불란서 안경원」(『불란서 안경원』)의 ‘나’, 다른 사람을 위해 짜던 스웨터를 풀어 자기 옷을 뜨개질하는 「나의 자줏빛 소파」(『나의 자줏빛 소파』, 2000)의 ‘나’가 90년대 문학의 징후로서의 내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장성규 씨도 언급했듯이, 특히 하성란 소설은 내면성이라는 규정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김남혁 | 하성란의 소설에도 유폐된 개인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이 종종 등장하지 않는가?
장성규 | 하성란 소설에서 핵심은 단지 유폐된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그러한 개인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극사실주의적 묘사라고도 언급되는 그녀의 묘사는 단순히 대상을 치밀하게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의 묘사를 통해 그 이면의 다양한 진실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하성란의 소설은 한강이나 조경란과 다르게 현실에 대한 나름의 사유를 표현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하성란은 내면성이라는 프레임에 한정되지 않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박 진 | 덧붙이자면, 하성란 소설이 “현실에 대한 나름의 사유”를 표현한다고 할 때, 그 같은 문제의식을 곧바로 리얼리즘적이라고 한정할 수는 없다. 하성란의 극사실(hyper-real)적 묘사는 리얼리즘의 강화가 아니다. 미술사에서도 그렇듯이 극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는 통하는 점이 있는데, 하성란 소설의 과장된 극사실적 묘사에는 자연스러운 리얼리티 감각을 교란하고 파열시키는 지점이 있다. 사실적이라는 게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재현의 리얼리티를 회의하는 지점들이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하성란의 『웨하스』에 담긴 환각적인 분위기의 소설들(「극지호텔」「강의 백일몽」 등)은 이 점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김남혁 | 좋은 문학은 어쩌면 ‘무슨무슨 문학’이라는 식으로 문학의 의미를 포장하는 수사를 넘어서는 것들인지 모르겠다. 박진 씨와 장성규 씨의 말대로 이들 소설이 내면성의 문학의 한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내면성’이라는, 그렇게도 광범위한 카테고리를 비좁게 여기는 것 자체가 이들 소설이 새로운 소설로 언급될 가치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들 신작에 대해서 말해보자. 어떻게 읽었는가?
박 진 |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와 하성란의 『A』는 무척 흥미로웠고, 조경란의 『복어』는 좀 식상하고 실망스러웠다. 조경란 소설에서 존재론적 고독과 죽음에 대한 본능적 친화 같은 게 잘 와 닿지 않았고,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여주인공이 삶으로 돌아서는 대목도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예술적 창조성과 죽음 충동을 신비화하는 측면이 마음에 걸린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운명론적인 관점을 보여주지 않나 생각한다.
장성규 | 나 역시 하성란의 『A』가 흥미로웠다. 유사종교 사건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추리적 기법이 겹치면서 읽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었다. 소규모 공동체라고 할까, 그런 꼬뮌적 가능성은 물론 그 불가능성까지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박진 씨와 다르게 한강의 『바람의 분다, 가라』는 그녀의 이전 작품인 『검은 사슴』의 반복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미술 모티프의 전면화도 그렇고, 궁극적인 예술관에 대한 작가의 사유 역시 십여 년 전과 동일하다. 그래서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한강은 어떻게 보면 자폐적인 예술가 상을 그리는 데 집중하는 듯하다. 물론 나름의 무게감을 지닌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우리 시대의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고민이라기보다는 공허한 진공 상태에서의 작업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 사실이다. 조경란의 『복어』는 마지막 결말이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정작 ‘복어’가 지닌 ‘독’이 너무 쉽게 두 사람의 만남으로 해소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김남혁 | 재미있는 표현이다. 일단 박진 씨와 장성규 씨는 하성란의 작품은 흥미로웠다는 점에서, 조경란의 작품은 조금 실망스러웠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한강의 소설은 박진 씨와 장성규 씨 의견이 엇갈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먼저 한강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는 게 재미있을 것 같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서인주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찾아내려는 추리소설같이 읽히면서도 다성적 목소리의 화자가 등장하고, 서사의 시간이 비일관적이며, 우주의 탄생이나 미술 작품과 관련된 서술이 정교하게 등장한다. 이처럼 추리소설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장치들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
장성규 | 한강 소설에서 추리적 요소는 이미 『검은 사슴』에서부터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바꾸어 말하면, 한강에게 추리적 기법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양상을 띤다. 일반적인 추리가 사건의 ‘해명’에 초점을 맞춘다면, 한강의 추리는 사건을 미궁으로 끌고 가면서 현실을 상대화하는 기능을 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사건도 해명될 수 없다는 특유의 세계 인식을 표현하는 것 같다. 추리가 불가능한 세계라고 할까? 한강 특유의 세계 인식인데, 이것이 결국 구도로서의 예술이라는 예술관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박 진 | 어떤 사건도 ‘해명될 수 없다’고 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은 하나뿐인 진실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과정인데, 한강은 이 같은 구조를 차용하면서도 하나의 목소리로 규정할 수 없는 또 다른 진실들을 써나가려 한다. 이를 위해 다성적 목소리의 화자와 시간의 비일관성 같은 서사적 장치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추리소설의 구조와 어울리지 않는다기보다는 추리소설의 구조를 재해석하고 절묘하게 변형한 방식이라 본다. 그리고 미술작품은 스토리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추리물의 구조를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지닌 또 하나의 우주라는 주제와도 잘 연결된다.
김남혁 | 갑자기 중요한 말들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잠깐 정리해보자. 한강의 소설을 장성규 씨는 이렇게 보는 건가? ‘진실은 없다, 다만 진실을 왜곡하는 권력자들에 맞서서 구도자적으로 예술을 수행하는 사람만이 권력자들이 왜곡하고 은폐한 작지만 소중한 진실들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다’라고. 나 역시 장성규 씨와 비슷한 의견인데, 예술가와 권력자의 대립은 이 소설에서는 정희가 미래에 쓰려는 평전과 강석원이 이미 발표한 평전의 대립으로 볼 수 있고, 한강의 이전 소설에서는 식물성과 육식성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랑, 죽음, 예술과 관련해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지만, 시작부터 강석원을 비판하고 정희를 옹호하는 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독해하면 좀 식상한 소설인 것 같기도 하다. 박진 씨 역시 한강의 추리소설은 단일한 진실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장성규 씨와 같은 의견인가?
박 진 | 좀 다르다. 우선 이 소설에서 다성적인 목소리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체에 의해서 완전히 통어되는 단성적인 글쓰기는 강석원의 책뿐 아니라 정희의 원고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정희 역시 강석원과 마찬가지로 인주를 자기 방식대로 이해할 뿐 그 내면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정희는 강석원이 폭력적으로 왜곡한 인주의 진실을 밝히려고 고군분투하지만, 그녀 역시 자기가 생각한 인주의 모습에 사로잡힌 채 강석원과 다름없는 행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정희 안에서 비어져 나오는 이질적인 목소리들은 이 소설에서 이탤릭체로 표기돼 있는데, 그 정체불명의 목소리들은 강석원과 정희의 글에서 누락되고 배제된 또 다른 진실들을 드러낸다. 소설 결말부에 이르러 정희가 의식을 잃었을 때 인주의 또 다른 진실(오랫동안 정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이 희미하게나마 발화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남혁 | 그럼 이탤릭체로 드러나는 이질적인 목소리들 때문에 강석원과 정희 가운데 진실을 은폐하는 자는 강석원이고 진실을 밝혀내는 자가 정희라는 식의 해석이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에는 강석원과 정희의 대립구도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말인가?
박 진 | 그런 셈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강석원과 정희의 대립 구도 안에서 정희의 태도를 옹호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명백한 진실이 존재해서 누군가 착한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나쁜 사람이 왜곡한다는 식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 소설은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전통적인 추리소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인주와 관련된 진실은 한 마디로 규정될 수 없으며 심지어 정희조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 진실은 복잡 미묘한 것이고, 정희의 기억과 매끄러운 글쓰기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희미하게 비어져 나온다.
장성규 | 근데, 나는 이탤릭체로 누설되는 것들이 심정적으로 불편하기도 했고, 그게 정말 이질적인 목소리인지 의문이 든다. 그 이탤릭체는 정희 내면의 목소리 같기도 하지만, 박진 씨 말 대로 정희의 일상적인 목소리를 넘어서기에 충분히 이질적이다. 하지만 그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강석원이나 류인섭 소장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목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목소리들은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하나같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에서 볼 때 동일한 목소리라고 여겨진다.
박 진 | 그런 생각은 안 들었는데… 그렇게 희미한 목소리가 권위적일 수 없고, 도덕적 우월성을 점유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내가 한강 소설의 이질적이고 다성적인 목소리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평은 단일 주체의 발화나 일관된 해석의 논리 안에 온전히 통합되지 않는 또 다른 목소리들을 섬세하게 들어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남혁 | 꼭 당위적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목소리가 장성규 씨 말 대로 도덕적으로 우월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또 한편 그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면 한강의 소설은 강석원으로 대변되는 권력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는 약자들을 옹호하는 흔하디흔한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두 견해 모두 상당히 흥미롭다. 그럼 이 소설에서 인주가 그리던 미술 작품과 삼촌이 즐겨 말해주던 천체 물리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장성규 | 우선 천체 물리학에 대한 논의들은 구체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부분이 작품의 추상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것 같다. 미술 작품의 경우에는 조경란의 『복어』에서도 한강의 소설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잘 모르지만, 미술은 음악에 비해 정적이지 않나? 문학 사조사에서 음악이 낭만주의와 관련되고, 미술이 이미지즘과 관련되는 것도 이 때문일 텐테… 조경란이나 한강 작품에 미술이 큰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동적인 실험의 인상보다는, 정적인 구도의 인상을 강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비극적인 요소들 역시 이상하리만큼 예정된 것으로 느껴지고, 뭔가 숙명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 부분에 미술의 속성이 부합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박 진 | 한강 소설과 조경란 소설에서 미술 작품이 놓인 자리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복어』에서는 바람이 들어갔다 빠져나갔다 하는 실리콘 작품이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등을 가시화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주인공이 반드시 조각가여야 할 이유는 없다. 작가여도 좋고, 음악가여도 상관없다. 그냥 죽음에 대한 친화와 예술가적 기질을 연결시킨 고전적인 방식이 아닐까 한다. 이에 비해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는 인주가 남긴 그림들이 서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활용된다. 모든 사건들이 인주의 먹그림들(삼촌의 그림을 다시 그린 별 그림들)과 얽혀 있고, 이로 인해 정희-삼촌-인주의 복잡한 관계가 먹이 번져가듯 서서히 드러나며, 은하 곳곳에 숨어 있는 검은 구멍들처럼 인물들 각자의 내면에 깃들인 깊은 심연들이 형상화된다.
김남혁 | 소설에 등장하는 천체 물리학은 어떤가? 박진 씨도 관념적이라고 느꼈는가?
박 진 | 그 자체로는 관념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서사적 필연성을 지닌다는 점이 중요할 것 같다. 천체 물리학은 무한의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인주의 내면세계는 한 가지 논리로 다 설명될 수 없는 무한한 우주와도 같다. 그런데 꼭 인주만 그런 내면을 지닌 게 아니다. 오래 전 인주 엄마를 불행으로 몰고 간 고등학생 진수와 또 한 명의 과외 선생 류인섭까지도 알고 보면 모두 상처받은 자들이고, 단순히 강자나 가해자로 규정될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을 지닌 사람들이다. 사랑과 죄의식 때문에 찢기고 부서진 이들의 내면 또한 무한한 심연을 품고 있으니까. 이렇게 읽으면 천체 물리학과 관련된 별 이야기는 소설 안에 굉장히 의미 있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김남혁 | 단순히 미술 작품이 소설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한강과 조경란의 작품을 묶을 수 있다면, 독특한 능력을 지닌 화자와 관련해서는 한강의 소설과 하성란의 소설을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한강의 소설에는 하나이면서 여러 개의 목소리를 지닌 화자가 등장한다면, 하성란의 『A』에서는 일인칭이면서 전지적인 화자가 등장한다. 심지어 이 화자는 눈이 멀었고 기억을 왜곡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자이기도 하다. 이런 화자가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장성규 | 하성란 소설의 경우, 현재 시점에서 신신양회를 재건하려는 주인공의 시선은 일인칭인데, 과거 신신양회의 일들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주는 시점은 전지적이다. 주인공이 ‘어머니’의 다음 세대여야 ‘재건’이 가능할 테니, 이러한 설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음 세대니까 신신양회 설립 당시의 일들은 일인칭으로는 서술 불가능하고. 결국 ‘어머니’의 실패를 극복(또는 반복)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관점에서 신신양회를 재해석하기 위해 이와 같은 기법적 장치를 사용했다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눈이 멀었으며 기억이 불명확한 존재가 화자로 설정된다는 것인데, 작품 내의 진술처럼 눈이 멀었기에 신신양회 사건을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기억이 왜곡되기에 유사종교의 집단 자살과는 다른 ‘오대양’ 사건의 재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사종교 사건을 모티프로 삼으면서 이와는 다른 ‘사건의 재구성’을 목적으로 한 작가의 의도가 잘 표현된 장치라고 본다.
박 진 | 신신양회 여자들의 집단 자살 사건은 도무지 의미화할 수 없는 실재의 구멍이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광적인 행동이라거나 권력의 희생양이라거나, 그 어떤 단일한 논리로도 말끔하게 이해되고 봉합되지 않는다. ‘나’는 작화증 환자처럼 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유일하고 변할 수 없는 진실을 밝히기보다 그런 식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또 다른 진실들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한강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화자의 독특한 성격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김남혁 | 하성란 소설에 대한 박진 씨의 해석은 한강의 소설에서 다성적인 목소리 때문에 진실은 정희의 것도 강석원의 것도 아니라는 해석과 연속되는 것 같다.
박 진 | 내가 대체로 그런 독법에 이끌리는 편이거나 거기에 예민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웃음) 하성란의 『A』는 외상적인 사건에 대항하는 실존적 고투이자,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진실을 창조해가는 글쓰기의 수행성이 강조된 소설이다. 그리고 비극적 운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지만 결국 같은 길을 되밟게 되는 인물들의 상황도 무척 인상적이고, 전통적인 가족 구조를 뒤엎어버리는 여성들만의 공동체라는 상상력도 파격적인 데가 있다.
장성규 | 박진 씨 언급처럼, 하성란의 소설에서 가족의 문제 역시 중요한 지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조경란 소설과 비교해보면 하성란의 소설의 새로움이 잘 드러난다. 조경란의 『복어』는 2000년대 가족 구조의 변모를 간과한 채 추상적인 층위에서 가족과 기억을 더듬는 느낌이 강하다. 이에 반해 하성란의 소설은 일반적인 가족이 아니라 소규모 여성 공동체의 성격을 지닌다. 이를 통해 비로소 가족이라는 고전적인 키워드는 작가의 고유한 문제의식으로 표출된다. 나는 『A』에서 ‘A’를 얼터너티브(alternative)로 읽고 싶다. 전일적인 시장의 독재 속에서 하성란이 그린 신신양회의 기획은 또 다른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상상하게 하고, 더 나아가 소규모 꼬뮌의 가능성과 대안을 제시한다. 하성란의 소설이 내면성의 문학에서 벗어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세계와 좀 더 교감하려는 의지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김남혁 | 그런데 앞서 장성규 씨가 말했듯이, 『A』는 대안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보여준다는 게 중요한 거 같다. 어떤 하나의 대안을 확정된 진실로 전달하지 않으려는 하성란 소설의 태도는 한강의 소설과 연결되는 것 같다.
박 진 | 한강과 하성란의 소설에서 진실을 확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글쓰기에 대한 변화된 인식과도 연관된다. 이들 소설에서 글쓰기는 이미 있는 진실을 찾아내어 그것을 언어화하는 행위가 아니다. 한강의 소설은 기존의 글쓰기(단성적인 목소리)가 왜곡하고 억압하는 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하성란 소설은 도무지 의미화할 수 없는 외상적 상처를 글로 씀으로써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부단한 과정을 보여준다. 과거에 글쓰기는 고백의 행위, 진실을 토로하는 행위였고, 그런 의미에서 ‘내면성’을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 내면적 주체를 넘어서는 행위이고, 주체가 전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자기동일적인 주체를 지우면서 또 다른 의미의 주체(탈중심적 주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이 주체와 타자의 관계나 주체의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강과 하성란 소설에서 전통적인 일인칭을 교란하는 화자의 이질성은 내면의 고백과는 구별되는 글쓰기의 새로운 층위로서도 90년대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장성규 | 그런데 그 같은 생각은 종국에는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식의 회의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하성란의 소설이 한강의 소설보다 흥미로운 이유는 고정된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과 대안을 소설 속에 끌고 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성란의 소설은 진실을 확정적으로 단순화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꼬뮌의 가능성을 생각하기에 2000년대 소설로서 충분히 좋은 소설로 생각된다.
박 진 | 장성규 씨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진실은 없다는 식의 회의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단성적인 목소리에 의해 억압되고 배제되는 또 다른 진실들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진정 윤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한다. 하성란의 『A』에서도 내가 좀 더 주목하고 싶은 점은 이런 거다. 이 소설에는 남성적인 지배 질서와 사회 제도, 권력 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두드러지는데, 그럼에도 이에 대항하려는 여성인물들 역시 진정으로 그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어쩌면 그들과 결탁관계를 맺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제도와 질서가 너무도 완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속의 욕망과 탐욕’, ‘우리 속의 그들’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 이런 또 다른 목소리가 얽혀 있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김남혁 | 한강과 하성란의 소설을 말하는 과정에서 조경란의 소설에 대해서도 핵심적인 부분들이 많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복어』는 홀수 장과 짝수 장이 병치되면서 서술되는데, 나는 홀수 장은 조경란의 이전 소설들과 유사하고, 짝수 장이 붙음으로써 이전 소설의 문제의식이 확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조경란의 소설은 개인의 가족사적이거나 내면적인 문제를 다뤘다. 「나의 자줏빛 소파」에서 남자의 스웨터를 풀어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옷을 뜨개질하는 여자의 태도는 자신의 문제를 타인과 연루시키지 않은 채 스스로 해결하려는 강인한 의지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복어』에서 짝수 장은 개인의 문제를 타인과 함께 해결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것 같다. 일인칭 ‘나’를 사랑하는 문제에서 타자를 사랑하는 문제로 확장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박 진 |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홀수 장의 여자 입장에서 볼 때 짝수 장에 등장하는 남자는 사실 타자라고 하기 어렵다. 여자와 어딘가 닮아 있고, 단번에 마음을 꿰뚫어보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상대를 전폭적으로 이해하고 무조건 도와주는 것이 과연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국자 이야기』(2004)와 『풍선을 샀어』(2008) 같은 소설에 비해 퇴보했다는 인상이 든다.
김남혁 | 더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그런가?
박 진 | 일단 조경란의 90년대 소설에는 『복어』와 유사하게 가족의 문제와 죽음에 대한 친화가 두드러진다. 가장 가까운 타자(가족)와 단절감을 경험하면서 절대적 타자(죽음의 이미지)와 교류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이것이 타자에 대한 협소한 관점과 죽음에 대한 신비화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국자 이야기』와 『풍선을 샀어』 같은 2000년대 소설에 오면 자기 안의 타자성을 매개로 하여 타인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타자 이해의 윤리가 발견된다. 네가 나를 다 이해하지 못하듯이 나 역시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구멍’을 지닌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타자에 대한 진전된 인식과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된다. 하지만 『복어』에서는 그냥 첫눈에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방식으로 서로에게 위안을 줄 뿐이다.
김남혁 | 박진 씨 의견대로면 『복어』는 짝수 장이 붙음으로 해서 기존의 조경란 소설의 문제의식이 더 확장됐다기보다 더 낭만적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장성규 씨는 어떻게 읽었는가?
장성규 | 홀수 장의 여자가 갑자기 짝수 장의 남자를 만나게 되고, 남자가 여자의 자살을 막으려 하며,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우선 비평적 분석 이전에 실감이 가지 않았다. 작가가 그렇게 결론으로 나아가기까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박진 씨 말 대로 지나치게 위안에 집중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복어를 다루는 일본인이 단순히 복어를 손질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 같았는데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메시지를 잘 담아낸다는 느낌보다는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실감의 차원에서 와 닿지 않는 장면을 하나 더 말하자면, 짝수 장의 남자가 사귀던 여자와 갑자기 이별하고 주인공 여자와 갑작스레 교감하게 된다는 설정도 좀 작위적이다. 작품 내에서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오로지 작가의 의도 안에서만 배치되는 것 같다.
박 진 | 죽음의 문제는 이번 한강의 소설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기존 소설에서 많이 다루어진 문제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니기보다 그것이 어떻게 다루어졌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죽음을 미화하거나 신비화하지 않고 실존적 고통의 층위(죄의식, 욕망, 가난, 육체적 고통 등)와 연결함으로써 자연스런 공감을 자아내고, 서로 다른 상처를 지닌 존재들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복어』와 같이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친화와 동경이 드러난 낭만주의적 접근방식은 식상하고 상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남혁 | 박진 씨와 장성규 씨의 의견을 토대로 보면 어쩌면 조경란의 소설만이 90년대적인 ‘내면성의 문학’이라는 범주를 아직까지 잘 지켜내고 있는 작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 같은 평가는 조경란의 소설이 내면성이라는 범주를 너무 좁게 설정하고 있다는 말일 수 있고, 작가의 문제의식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는 뼈아픈 지적의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알려줬듯이 개인의 내면이라는 것이 지배담론의 효과일 뿐 인간의 고유한 자질이 아니라면, 지배담론의 메커니즘을 사유하지 않는 채 이루어지는 내면성의 옹호는 한낱 작가의 판타지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배담론의 효과 운운하며 개인의 고유한 자질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지배 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과 대안을 꿈꾸지 못할 것이다. 이런 가르침들을 고려하면서 오늘 우리는 내면성의 문학으로 불렸던 소설가들이 새롭게 나아간 지점을 살펴보았다. 긴 시간 좋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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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
장성규
문학평론가.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문학과 현실의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해 관심이 많다. 리얼리즘의 급진적 재구성이라는 주제를 공부하려는 큰 ‘욕심’(만)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