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진 | 화창한 가을날이다. 이런 날엔 야외에서 좌담을 해도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다들 바빠서 저녁 시간에야 만났다. 오늘은 ‘6년 만에 나온 김영하의 신작’이라 화제가 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이하 『아무도』)를 중심으로 김영하 소설들을 다뤄보려고 한다. 김영하는 대중적으로 상당히 인기가 많고 이 시대 문화 아이콘 같은 느낌을 주는 작가이니, 김영하 소설을 통해 문학과 독서 환경을 둘러싼 지금의 문화적 상황도 함께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은 또 특별히 <비평테이블>의 ‘젊은 피’, 조효원 씨가 함께했다. (웃음) 와줘서 고맙다.
조효원 | (웃음) 불러줘서 고맙다.
장성규 | 반갑다.
박 진 | 조효원 씨는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문학평론가들 중에서 가장 젊은 층에 속하는데, 오늘 좌담에서 김영하 소설을 보는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을 잘 대변해줄 걸로 기대가 된다. 김영하의『아무도』는 단편집 치고는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책이 대중들에게 이처럼 어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성규 | 일단, 김영하가 지닌 특징일 텐데, 대중문화적 코드를 굉장히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시놉시스 같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는데, 설정도 기발하고 배경으로 사용된 장치들도 굉장히 세련돼 보인다. 어떻게 보면 CF를 보는 느낌도 든다.
조효원 | 칭찬인지…
박 진 | 욕인지? (웃음)
조효원 | (웃음) 아, 헷갈린다.
장성규 | 그냥 비평이다. (웃음) 어쨌든 간에 지금의 트렌드를 적절히 반영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게 좀 더 흥미로운데, 요즘 스토리텔링 열풍이지 않나? 거기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고전적인 소설 개념으로는 잘 파악이 안 되고, 이야기독물(읽을거리)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전에 좌담에서 다룬 베르베르 소설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이야기 자체에 대한 강조랄까? 재미있고 흥미로운, 신기한 이야기들이 대중들의 코드에 잘 맞았던 거 같다. 그런데 중요한 건, 흔히 말하는 장르소설가나 대중소설 작가가 이런 책을 썼다면 이만큼 어필하지 않았을 텐데, ‘본격문학’의 정점을 찍었던 김영하라는 작가의 소설이기 때문에 더 큰 호응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박 진 | 재미있는 지적이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베르베르의 『파라다이스』를 떠올렸다. 우리 좌담할 때, 다들 베르베르 소설이 훌륭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이야기 그 자체의 재미에 충실한 소설이 우리에겐 너무 없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김영하의 『아무도』 정도라면 그런류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효원 씨 생각은 어떤가?
조효원 | 나는 이 책이 이례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가 ‘짧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 책 자체가 얇기도 하지만, 김영하가 어떤 동물적인 감각으로 ‘무르익은 2000년대’의 시간 감각을 그대로 포착했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 감각이라는 건 내 나름의 화두이기도 한데…. 똑같이 2000년대를 살아도 시간 감각이 80년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고, 2010년에 벌써 2020년까지 나아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김영하는 딱 2010년의 시간 감각이 어떤 건지를 소설로 육화해서 보여줄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작가인 것 같다. ‘짦음’이란 시간이 압축됐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런데 그게 그냥 ‘압축’이 아니라, 사실은 그만큼 지루하고 의미 없는 시간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인생이 짧아진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김영하는 우리 삶의 시간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고발’하지 않고, 그 시간 감각을 본능적으로 포착해서 ‘타격’을 가했다는 느낌이다. 그것이 독서의 속도감과도 곧장 연결돼서, 이렇게 가독성 있게 잘 읽히는 게 아닐까 한다.
박 진 | 조효원 씨는 시간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김영하의 대중적 호소력을 설명해줬다. 두 분이 지적한 포인트는 달라도 전반적인 인상은 비슷하다. 가볍고 신기한 이야기들, 골치 아프게 파고들지 않고 감각적으로 소재를 다루는 솜씨, 스피디한 전개 등등이 모두 이 소설의 대중성과 가독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연결되는 문제이겠지만, 각도를 좀 달리해서 이렇게 질문해보자. 이번 소설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꼽는다면, 뭐라고 해야 좋을까?
장성규 | 한 마디로 하자면, 기존 소설 장르의 양식적 특성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아닐까? 수록된 모든 작품들이 특정한 주제의식을 담아내거나, 혹은 형식적 완결성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 이야기의 흥미성을 극대화하는 것에 철저히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앞서 말했듯이 김영하는 부정할 수 없는 90년대 본격소설의 한 정점인데, 그런 김영하가 소설의 일반적인 ‘룰’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조효원 | 이번 작품만 놓고 말하면, 정말 많이 가벼워졌다는 게 제일 큰 특징 같다. 여행으로 치면, 옷가지나 음식들을 잔뜩 실은 밴을 타고 여행하는 게 아니라 달랑 배낭 하나 메고 자전거로 여행하는 느낌과 흡사하다. 아마도 그 부분은 김영하가 굉장히 많이 노력한 결과인 것 같다. 이건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잘 읽힐 수 있는 무기이자 장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까 말한 시간 감각이 지닌 위험성을 노출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십년 전의 김영하라면, 자꾸 독자들을 멈칫하게 하고 갸우뚱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런 게 거의 없었다. 멈추지 않고 읽게 만든다는 게, 좋게 보면 능력인데 나쁘게 보면 너무 가벼운 게 아닌가, 그냥 읽어 치우게 만드는 소설이 돼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 진 | 비슷한 생각이다. 신기하고 기발해서 재밌는 이야기들인데, 그 모든 이야기들이 ‘사건’이 되지 않고 그저 황당한 ‘해프닝’에 머무르는 느낌이다. 제목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얘긴데, 물론 이 제목은 작가가 직접 정한 게 아니라 트위터 독자 투표로 정한 거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 ‘모른다’는 사실을 너무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인과적, 논리적,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워진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징후일 수는 있다. 예전 김영하 소설에도 이런 측면이 나타났었고. 그래도 그때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데 대한 자의식이나 냉소 같은 게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정작 중요한 걸 덮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건 질문을 던지는 일 자체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조효원 | 공감이 가는 얘기다. 분명히 소설이 진행되고 무슨 일이 계속 일어나긴 하는데, 그게 과연 문학에서 말하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것인지 의문이다. ‘정말 사건이 일어난 거야?’라는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게 장성규 씨가 말했던 ‘CF 같다’는 표현과도 연결되는 특징인 거 같다.
장성규 | 내가 말실수를 한 거 같은데… (모두 웃음)
조효원 | 아니, 너무 인상적이고 적합한 표현이다. 근데 김영하는 그걸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박 진 |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우리 얘기들이 다 서로 맞물려 있는데, 진실이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통해 찜찜하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던 지점들이 이 책에선 다 사라지고 그냥 매끄럽게 이야기 자체를 즐기면서 질문은 더 이상 던지지 않는 태도. 그런 게 조효원 씨의 ‘너무 가볍다’, 장성규 씨의 ‘CF 같다’, 그리고 좀 전에 한 ‘해프닝 같다’는 말들과 통하는 특징이다. 또 ‘사건이 되지 못한다’는 표현도 ‘기존의 소설 양식을 벗어난다’는 장성규 씨 지적과 이어지는 얘기일 것이다.
조효원 | 엽편소설이라고 하나? 이 책에는 그런 식의 아주 짧은 이야기들도 들어 있다. 물론 독일에 ‘노벨레’라는 전통이 있긴 하지만, 사실 「바다 이야기」 1, 2 같은 건… (웃음) 김영하니까 이런 것도 할 수 있다고 높이 사줄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쿤데라를 스승으로 삼는다고 공공연히 얘기했던 김영하가 이런 걸 쓰다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양가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박 진 | 좀 더 솔직하게, 이런 특징들에 대해 평가를 내려 보자. 그래서 이번 소설집은 두 분에게 어땠나?
조효원 |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김영하 답다’고 생각했다. (웃음)
박 진 | 조효원 씨가 처음이라 좀 조심스러워한다. (웃음) 그럼 장성규 씨의 평가는?
장성규 | 솔직히 나는 실망스러웠다. 과거에 김영하가 대중문화적 코드를 가져왔을 땐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나름의 날카로운 인식이 작동했고, 이 문제를 다루는 세대론적 감각이 돋보였다. 예컨대 「전태일과 쇼걸」(『호출』) 같은 작품이 그런데, 같은 영화관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쇼걸>이 동시 상영되는 소비문화 시대에 대한 김영하의 자의식이 무척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그것이 김영하의 대중문화 수용을 단지 소재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는 힘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 책에서는 대중문화적 감수성이 단지 소재적 차원이나 기법적 차원에만 한정돼 있어서 CF처럼 소비된다는 느낌이 굉장히 강하게 든다. 물론 기존의 소설 문법과 다른 것이 시도된 데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이렇게 소비되는 이야기라면 대중적 독서코드에 대한 영합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야기 중심의 소설이라도 베르베르 특유의 지적인 재미라든가, 에코처럼 하위장르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풀어내는 힘이라든가, 그런 게 전부 소거된 채로 이야기의 가벼움만 남아 있어서, 그런 점이 많이 아쉽다.
조효원 | 그걸 또 좋게 말하면…(웃음) 김영하의 변론은 아마 이런 게 아니겠나? ‘그렇게 흘러가는 게 변화지, 어떻게 항상 같을 수가 있겠나’ 하는 것. 「작가의 말」에도 ‘지금의 나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쓴 것들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렇게 완고한 자기 동일성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태도가 정말로 ‘김영하스러운’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달리 말하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일관성을 부정하는 태도일 수 있다. 작가가 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한 작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마련인데, 이런 면에서는 이번 소설집이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것 같다. 이전의 김영하 소설에는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걸 통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었다. 이에 비해 이번 소설집은 이렇게 멈추지 않고 읽힌다는 게, 아주 나쁘게 말하면 김영하 자신에 대한 변절일 수도 있다고 본다.
박 진 | 조심스럽고 애매하게 말하는 듯하지만, 잘 들으면 또 그렇지도 않다. (웃음) 이번에도 두 분이 ‘예전에 김영하 소설에서 보았던 것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비슷한 지적을 해줬는데, 그게 뭐냐에 대해서는 좀 다르게 짚어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김영하의 이전 소설들에서 주목했던 것은 기존의 권위적인 문학, 배타적인 리얼리즘 편향의 문학에 대한 도발적인 반항 같은 거였다. 90년대에 김영하가 아주 ‘껄렁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 그게 에너지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이걸 통해 ‘나는 다른 걸 하겠다’는 자의식이 팽팽히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90년대 김영하 소설은 쇼킹한 면이 있었고 상당히 불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그런 소설들이 이제는 꽤 많아지지 않았나?
장성규 | 흐름상 대세가 됐다고 할 수 있겠다.
박 진 | 그러다보니 그걸 통해 뭔가를 찌른다거나 부딪힌다거나 할, 그 대상이 없어진 느낌이다. 이번 소설집이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거나 쾌적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원래 김영하가 소비자본주의든 뭐든, 현실 자체를 직접 고민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영하의 감각이 집중됐던 것은 오히려 문학에 대한 메타적인 관심일 텐데, 자기 글쓰기까지 포함해서 기존의 문학을 가지고 놀고 교란하는 에너지가 이전 소설들에서는 굉장히 강렬했다. 하지만 과거에 자신이 반항하며 해왔던 것이 이제는 대세가 된 상황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기는 힘들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조효원 씨 표현을 이어받아 말하면, 자기가 해왔던 것과 모양이 비슷해도 이제는 그게 ‘변절’이 될 수가 있을 것 같다. 변절하지 않고 그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모습을 바꾸어야 하는 때인데, 그러는 대신에 그대로 흐름을 타고 더 멀리 나가려 한다는 느낌이다.
조효원 | 김영하가 현실 자체를 노린 작가가 아니었다는 말에 동의한다. 기존 문학의 구차하고 ‘징징거리던’ 정조를 깨고 등장한 소설가라는 점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사실 나는 김영하 소설을 읽었을 때, 그렇게 쇼킹하진 않았다. 장성규 씨가 세대론 얘기도 했지만, 내가 처음 김영하 소설을 읽었을 때가 대학 초년생으로 막 소설을 읽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그때 내 느낌은 ‘이럴 수가!’ 하는 놀라움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 그렇지!’ 하고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박 진 | 효원 씨가 몇 학번인지?
조효원 | 00학번이다.
장성규 | 2000년대 학번이네. (웃음)
박 진 | (웃음) 할 말이 생각났는데, 우선 효원 씨 얘기를 더 들어보자.
조효원 | 아, 그래서 내 느낌은, 김영하 소설이 기존 문학에 반항하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더 적절한 표현은 ‘반항’보다는 ‘무시’가 아닐까 한다. 김영하가 문학을 하는 근본 태도는 내가 보기엔 세상을 ‘티 안 나게’ 경멸하는 것이고, 그 방법을 스스로 연마하는 작가라는 생각도 든다. 티가 나게 경멸을 하면 매장되거나 안티를 달고 살거나 하겠지만, 김영하는 정말 영리한 작가라서 그걸 티 안 나게 교묘히 해낼 줄 아는 것 같다. 박진 씨 얘기를 내 식으로 바꿔 말하면, 그 경멸의 에너지가 이번 책에서는 매우 약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경멸이나 냉소가 아니라, 무슨 도사님처럼 무관심해졌다고 할까? 내가 느낀 ‘지나친’ 가벼움은 그런 면과 통한다.
박 진 | 어감 차이가 좀 있긴 한데, 비장하게 싸우겠다는 태도는 물론 아니고… 장난하면서 뒤집는 식의 ‘반항’과 내려다보면서 비웃는 식의 ‘경멸’, 이 두 가지 태도가 김영하의 이전 소설들에 함께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조효원 씨 얘기를 듣다가 생각난 건데, 나는 김영하를 386으로 분류하거나 세대론으로 묶는 데는 별로 공감이 안 간다. 세대론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적이거나 획일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고. 특히 김영하의 경우에는, 마치 뱀파이어처럼 나이를 안 먹는다는 느낌? 그런 게 있다. 원래는 자기 세대, 자기 또래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게 보통이지 않나? 대중 가수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서태지 세대, H.O.T 세대라는 말이 있기도 한데… 김영하는 따지자면 나보다 ‘윗세대’지만, 내가 20대에 김영하를 읽었을 때 정확히 내 세대 감각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00학번인 조효원 씨도 그랬고, 아마 지금의 대학생들이 『아무도』를 읽을 때도 같은 느낌을 갖지 않을까?
장성규 | 그럴 수도 있겠다.
박 진 | 그런 면에서, 김영하는 자기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간다기보다는 시대에 맞게 계속 변해가는 감각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건 단점이 아니고, 흉내 내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거라서 아마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놓고 봤을 때, 이렇듯 더 이상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더 많이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작가 김영하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 시대의 문화적 상황 전반에 대해서도 그렇고.
조효원 | 이건 짐작이지만, 김영하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라』는 산문집을 낸 게 작년 무렵이다. 한예종 교수로 있고, 라디오 진행자를 하고, 그러면서 바쁘게 살았던 시기가 지난 다음이다. 작가와 작품을 곧바로 결부시키는 건 문제이겠지만, 작가 김영하가 한국인의 일상을 제대로 체험하고 돌아온 것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자기가 직접 일상을 경험해보고 나니, 세상을 경멸하고 찌르던 그 감각이 느슨해지고 무뎌진 건 아닐지? 그 산문집에 보면 ‘나는 내가 굉장히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나와 보니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특이한 거더라’는 식의 얘기가 나오던데, 어쩌면 역설적으로 일상의 눅눅함이 김영하를 어느 정도 평범에 가까워지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박 진 | 생활인으로서의 개인적 체험이 작가 김영하의 ‘튀는’ 컬러를 무난하게 변색시켰다?
조효원 | 그리고 또 이런 면도 있지 않을까? 김영하 소설은 지금 전 세계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는데, 세계무대에서도 잘 통하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의식이 이렇게 매끄러운 이야기를 낳은 이유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장성규 | 나는 김영하 개인의 문제보다는 박진 씨가 던진 또다른 측면의 문제에 더 관심이 가는데… 이건 여담이지만, 김영하가 처음 출판한 책 『무협학생운동사』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학부 때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 책이 ‘금서’였다. 학생운동을 희화화한다고 해서.
박 진 | 학생운동 하는 쪽에서 금서였단 얘기?
장성규 | 그렇다. 암암리에 그랬던 건데, 금서라서 더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은 NL이고 여자 주인공은 PD 계열의 친군데, 이 얘기를 무협 양식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권법을 익혀서 광주학살부터 이어지는 학살에 대항한다는… (웃음) 이렇게 무협지라는 B급 장르와 학생운동의 진지한 변혁 의지를 결합시킨 것, 달리 말하면 형식적인 면과 주제적인 면의 불일치나 모순 같은 게 김영하 소설의 문학적 출발점이자 내적인 힘이었을 것이다. ‘학생운동’과 ‘무협지’가 만날 수 있었던 시대가 바로 김영하 소설의 에너지가 뿜어 나올 수 있었던 시대였던 셈이다. 문제는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거다. 일단 학생운동이 없으니까… 이건 어쩌면 80년대적 원체험을 문학적 출발점으로 지닌 작가들의 세대론적 문제일 수도 있을 듯하다.
박 진 | 무척 흥미로운 얘기다. 근데 다시 세대론 문제가 나왔다. (웃음)
장성규 | 나는 김영하 초기작들이 전반적으로 이런 세대론적 감각에 바탕을 둔다고 본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전태일과 쇼걸」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쇼걸>이 동시상영 되는 상황에 대한 강렬한 인식 같은 게 386적인 세대 감각이 아닐까 싶다.
박 진 | 그건 굳이 말하자면 70년대생의 세대 감각인데? 386은 ‘전태일’과 ‘쇼걸’을 함께 말하지 않을 거 같고…
조효원 | 맞다. 386은 ‘쇼걸’이 있음을 알고도 애써 부인하려 들지 않을까?
장성규 | 그런가?
조효원 | 우리가 지금 386을 너무 단순하게 일반화하고 있나? (웃음)
장성규 | (웃음) 아무튼 김영하의 경우에는 정치적인 감각은 386이면서 문화적인 감각은 90년대 다운 면이 있는 것 같고, 정치적인 진지함과 문화적인 발랄함의 충돌이 90년대 문학에서는 가능했다고 본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호출』)에서도 김영하는 혁명의 좌절과 386들의 전향에 대해서 특유의 자폐적 냉소로 대응하고 있는데, 이런 무거운 문제를 pc 게임을 통해 가볍게 풀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 특유의 냉소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부정적 상상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현실을 쉽게 초월해버리게 되면 더 이상 에너지를 뿜어낼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문화적 징후건 간에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될 때 진정성을 획득하는 법인데, 지금은 과거와는 달리 그 긴장감이 유지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다.
박 진 | 장성규 씨가 의미심장한 지적을 해주었다. 우리 그 얘기를 가슴에 담고, 김영하의 문화적 감각과 90년대 김영하 소설들이 지닌 의미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 김영하는 처음 등단했을 때부터 ‘신세대’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녔고, 지금도 여전히 ‘최첨단’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얼리 어답터(early adaptor) 다운 미디어 감각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김영하는 실제로 PC 통신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이기도 하고, 발 빠르게 영화판에 진출하는가 하면 지금은 명실상부한 멀티 콘텐츠 작가가 됐다. 트위터는 물론이고 일인방송 팟캐스트에도 흠뻑 빠져 지낸다고 들었다. 소설에도 그런 면이 잘 나타나는데, 호출기가 처음 등장했던 「호출」(『호출』)이나 PC 통신 동호회를 소재로 한 「피뢰침」(『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이후 『엘리베이터』), 인터넷 퀴즈방과 서바이벌 퀴즈 프로그램을 끌어온 『퀴즈쇼』 등은 김영하의 앞서가는 미디어 감각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면에 주목해도 김영하의 90년대 소설과 2000년대 소설은 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장성규 | 그렇다. 일단 김영하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일종의 문인-엔터테이너라는 느낌이 강하다. 쉬크하면서도 지적인 문화 평론가의 이미지와 미디어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가 맞아 떨어지면서 김영하라는 문화적 아이콘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런데 90년대 김영하 작품에 등장하는 pc게임, 영화, 삐삐 등의 코드는 당시 개체들을 소비주체로 호명하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징후로서 작동했다. 문화적 감수성이 단지 소재적 층위에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까지 돌아보게 하는 인식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90년대 김영하 소설은 의미가 깊다.
박 진 | 「호출」은 정말, 삐삐의 등장 자체가 신선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 새로운 소통의 미디어가 실은 얼마나 나르시시즘적인지를 민감하게 포착해냈다는 점에서, 미디어에 대한 반성적 성찰까지 포함하는 소설이었다.
장성규 |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김영하 소설에서 이러한 문화적 전위성이 상당히 약화됐다. 『오빠가 돌아왔다』에 수록된 작품들은 우스꽝스러운 세태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고, 『검은꽃』에서 시도된 ‘대문자 역사’의 해체라는 문제의식은 결국 역사적 허무주의에 귀속되는 양상을 보인다. 『퀴즈쇼』 역시 ‘잡퀴방’이 지니는 문화적 특성을 소재적으로만 차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나마 『빛의 제국』에서 흥미로운 문화적 코드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중국의 붉은 별』을 읽으며 페티시즘을 떠올리는 장면이나, 남파간첩이 귀환 명령을 받고 mp3를 가져갈까 말까 고민하는 장면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코드들도 사회적 징후를 포착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박 진 | 공감이 간다. 기존 문학에 대한 도전의 측면에서도, 90년대 김영하 소설의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호출』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김영하의 90년대 소설집은 그 자체로 무척이나 파격적이었고, 지금 돌아보면 2000년대적인 특징들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2000년대 소설이 90년대 김영하 소설의 후계자라 할 수도 있겠는데, 김영하 소설이 없었다면 2000년대 소설이 나올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호출』에 실린 「도마뱀」「내 사랑 십자드라이버」「총」「거울에 대한 명상」 등과 『엘리베이터』에 들어 있는 「사진관 살인사건」「흡혈귀」「피뢰침」「비상구」「고압선」 등이 다 그렇다. 이기호나 정이현 등의 탈내향적 1인칭 화자(‘내면’이 없는 1인칭 화자), 박민규의 판타지적 상상력, 김중혁의 사물들에 대한 마니아적 애호와 패티쉬적 특성들이 여기 이미 다 들어 있다. 특히 「흡혈귀」는 한국 상업영화에서도 뱀파이어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나온, ‘본격문학’ 최초의 뱀파이어 이야기다. (웃음) 추리-스릴러 문법의 본격적인 도입 역시 지금이야 너무 익숙하지만, 90년대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것이었다.
장성규 | 신경숙이나 윤대녕으로 대표되는 내면 고백의 촉촉한 소설들 속에서, 그런 흐름을 거스르고 엎어 놓았던 김영하의 소설들은 정말 상당히 문제적이었다.
박 진 | 맞다. 신경숙, 윤대녕 같은 소설들이 어떤 면에서는 나르시시즘적이었고 그 안에 잠겨 있는 경향을 드러냈다면,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같은 소설은 그 나르시시즘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을 가지고 90년대 문학의 키워드를 나르시시즘으로 보는 평문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김영하의 소설은 90년대가 그런 문화적 코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자의 자의식이랄까, 메타적 시선 같은 걸 지니고 있어서 ‘90년대적인 것’을 넘어서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호출」의 빠른 미디어 감각이 미디어에 열광하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시선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거리 감각이나 메타적 관점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고.
장성규 |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2000년대 김영하 소설에선 그런 점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빠가 돌아왔다』 이후로 김영하 특유의 냉소적 에너지가 약화된 것도 그런 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효원 | 나는 사실 90년대 김영하와 2000년대 김영하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아까 말한 대로 직업을 바꾸기 전, 2005년 무렵의 김영하와 그 이후의 김영하가 다르다는 느낌이 훨씬 강하다. 그 이전의 김영하는 어떤 인터뷰에서 직접 말했듯이, ‘리얼리즘이 리얼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인식을 소설로 풀어내는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물론 허구지만 다들 그것이 현실을 따라가는 허구라고 생각했다면, 김영하는 활자로 이루어진 세계를 두고 ‘이게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이후의 김영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경험하고 돌아오면서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에서 현실에 밀착하게 된 듯하다.
박 진 | 그럼 조효원 씨는 『아무도』부터 김영하 소설이 달라졌고, 그 이전 소설들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건가?
조효원 | 그렇다.
박 진 | 아, 그렇구나. 이번 소설집이 유난히 좀 그렇긴 한데…(웃음) 그럼 김영하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뭔가?
조효원 | 나는 「당신의 나무」(『엘리베이터』)다.
박 진 | 정말? 그거 제일 김영하 답지 않은 소설인데? 심각하게 무게 잡고 분위기 잡고 그래서 나는 사실 별로인데.
조효원 | 나는 오히려 ‘이 작가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이 좋았다. 「당신의 나무」는 특히 시간 감각에 대한 또다른 고민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에는 한 여자가 자기를 집요하게 쫓아오는 관계의 급작성과 숨 막히는 시간의 속도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아주 느린 9백년의 시간이 있다. 그 두 가지 시간 감각을 대비시키면서 시간의 양태가 변하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무도』에는 순간성만 있고 이 시대의 시간 감각이 그대로 체화된 점이 아쉬웠다면, 이 소설은 짧아서 길고 길어서 짧은 시간의 역설과 신비를 담고 있다.
박 진 | 시간의 문제가 역시 조효원 씨에게는 무척 중요한 테마인가 보다.
조효원 | 박진 씨는 어떤 소설이 좋은가?
박 진 | 나는 아까 말한 이유에서 처음 두 단편집 『호출』과 『엘리베이터』가 좋다. 장성규 씨는?
장성규 | 『호출』. 두 소설집 중에서도 이게 더 충격적이었다. 신경숙, 윤대녕 같은 소설들 속에서 ‘이런 것도 소설인가?’ 싶고 상당히 놀라웠다.
조효원 | 아, 충격적인 걸 좋아하는구나. (웃음)
박 진 | 이렇게 취향이 갈리네. (웃음)
조효원 | 나한테는 사실 두 소설집이 전혀 충격적이지 않아서…
박 진 | 조효원 씨가 김영하의 90년대 소설집을 읽은 게 언젠가? 00학번이니까 대학 들어가기 전에 나온 책인데.
조효원 | 『오빠가 돌아왔다』가 나왔을 때(2004년) 김영하를 처음 읽었고, 이전 소설집은 그 후에 읽었다.
박 진 | 그럼 윤대녕이나 신경숙 소설도 책이 막 나왔던 90년대에 동시적으로 읽고 반응한 건 아니겠다.
조효원 | 그렇다. 나중에 몇 권 읽었는데, 전혀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박 진 | 90년대적인 것이 조효원 씨한테는 이미 문학사적 과거였구나! 세대 차이가 여기서 이렇게 나타난다. (웃음)
조효원 | 김영하 소설이 내게 쇼킹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런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이전과의 단절이나 변화를 경험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속에 있었으니까.
박 진 | 그렇겠다. 이해가 간다. 어쨌든 김영하 소설이 90년대 문학의 지형을 변화시킨 지점, 나는 거기에 김영하 소설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영하 소설의 문화적인 의의가 가장 빛났던 시기에 김영하 소설의 문학적 의의도 있는 거라고. 아까 장성규 씨가 잠깐 언급했지만,『검은꽃』이나 『빛의 제국』 같은 2000년대 소설에서도 사실 그런 대로 문화적 의미를 찾아볼 수는 있다. 『검은꽃』 이전에 김훈의 『칼의 노래』가 나와서 역사소설 붐을 선도하긴 했지만, 이렇게 역사를 ‘텍스트’로 보고 ‘구멍’으로 보는 포스트모던한 역사관이 등장한 건 이 소설이 처음이었다. 『빛의 제국』도 북으로 귀환할 것인가 남쪽에 남을 것인가 하는 비장한 선택을 썰렁하고 초라하게 희화화하고 있다는 게 그런 대로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소설을 최인훈의 『광장』과 비교하면서 분단과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룬 묵직한 소설이라 말하기도 하던데, 실은 그런 소설들을 가볍게 비틀고 패러디한 소설로 보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2000년대에 나온 장편들에도 이렇게 김영하 다운 면이 있기는 한데, 그게 양식적인 면으로만 남아 있고 예전의 그 에너지는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
장성규 | 『빛의 제국』에서 정말 아쉬운 점은 이런 거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화가들의 그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서사적으로 긴밀하게 활용되고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지점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빛의 제국』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은 단지 마지막 장면의 묘사를 위해서만 사용됐을 뿐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렵다. 『퀴즈쇼』는 더 심하다. 나도 한때 ‘퀴즈방’에서 놀아본 경험이 있긴 하지만…(웃음) 나는 이 소설이 굉장히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김영하라면 이런 소재를 가져와서 인터넷 문화가 지닌 새로움이나 여기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구조 등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했을 텐데, 이 소설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위문화 같은 걸 계속 차용하고는 있는데, 의미부여가 안 된다.
박 진 | 『퀴즈쇼』에서는 인터넷 퀴즈방이라는 소재를 취하고, 거기에 고시원이라는 공간을 합쳐서 자살하는 옆방 여자 얘기도 끌어오고, 그러다가 중간에 또 완전히 딴 데로 빠져서…(웃음) 가상현실인지 사이비 집단의 사기극인지 목숨을 건 리얼 서바이벌 게임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 정도로 이질적인 걸 뒤섞어 놨다는 게 흥미롭긴 하지만, 나 역시 뭔가 노리는 게 없어 보여 허탈하고 황당했다. 그냥 신기한 이야기가 되면서, 그렇게 『아무도』를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조효원 | 세상을 향해 냉소와 거짓말로 대응하는 힘이 약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이미 판이 바뀌었으니까… 이전에는 김영하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지’ 하고 공감하는 측면이 있었는데, 『아무도』에 와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감각이 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김영하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장성규 | 김영하는 90년대 중후반에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뭐랄까, 거대담론의 몰락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체의 정치학이나 문화정치라는 패러다임에 굉장히 잘 부합하는 작가였던 것 같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오면서 문화정치라는 패러다임 자체가 상당히 약화됐다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의 전면 공세 속에서 하위문화의 전복성이 상품으로 포획되는 시기이기 때문일 텐데, 이런 상황으로부터 과연 김영하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게 90년대와 2000년대 김영하 소설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박 진 | 혹시 김영하와 비교할 만한 90년대의 다른 작가가 있는지?
장성규 | 우선 백민석이 떠오른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준 하드 코어적 하위문화와 이를 통해 주류질서를 전복하려는 상상력은 김영하 초기 소설의 문제의식과 일정 부분 공통되는 지점이 있다고 본다. 유하 역시 대중문화적 코드를 통해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사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더 이상 문학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민석은 작품 활동을 접은 지 오래고, 유하는 영화 쪽에 더 관심을 갖지 않나? 바꾸어 말하면 문학적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위문화의 전복적 기획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 진 | 마음에 와 닿는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난달에 다뤘던 주원규나 임성순 같은 작가들은 하위문화와 대중문화적인 것을 가져와서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든가 계급의 문제 같은 걸 건드리고 있지 않나? 하위문화 그 자체가 전복적이진 않지만 그걸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끙끙거리는 시도들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김영하의 최근 소설에선 그런 걸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장성규 | 하위문화를 가져올 때 어떤 자의식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할 것 같다. 문화적 징후들을 현실 속에서 날카롭게 인식하고, 이를 새로운 문법으로 형상화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더욱 더 절실하다. 개인적으로는 윤이형의 게이머-소설 같은 실험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실험이 보다 확장되지 않는다면, 하위문화의 전복성이 상실된 이야기독물만이 남을 것이다. 김영하의 이번 책이 주는 가장 큰 아쉬움이 여기에 있다.
조효원 | 김영하와 비슷하게 자기 색깔을 카멜레온처럼 바꿀 수 있는 작가가 박민규일 텐데, 그래도 박민규 소설은 지금 상당히 분투하고 있다고 본다. 김영하가 지쳐가는 건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김영하 소설의 존재 자체는 우리 시대 한국 문학의 수성(守成)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김영하가 무너지면 한국문학은 치명적인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본다.
박 진 | 잘 알겠다. 오늘 김영하 소설을 통해 둘러본 이 시대의 문화적 풍경은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위태롭고 공허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스토리텔링과 구별되는 문학의 정체성을 말하기 어려워진 시대, 문학에서 재미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촌스러워 보이는 시대, 작가가 엔터테이너나 대중 스타가 된 시대 등등. 물론 이런 시대를 거스름으로써 작가의 길을 걷는 좋은 소설가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배수아 같은 작가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좀 다르지만 김연수 역시 스토리 자체가 아닌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런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반드시 시대 분위기를 거슬러가야 하는 건 아닐지 모른다. 이 시대의 문화적 상황 안에서 그 감각들과 함께 가면서도 어떤 팽팽한 긴장감과 들끓는 에너지를 품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좀 전에 언급된 여러 작가들에게서 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김영하도 예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계속, 그런 에너지를 지닌 작가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쉽게 접을 수 없다. 김영하의 다음 소설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는 것 이상의, 또다른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길 기대하면서 오늘의 좌담은 여기서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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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
장성규
문학평론가.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문학과 현실의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해 관심이 많다. 리얼리즘의 급진적 재구성이라는 주제를 공부하려는 큰 ‘욕심’(만)을 가지고 있다.
조효원
문학평론가. 2008년 <세계일보>와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독문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조르조 아감벤의 책 『유아기와 역사』를 번역했고,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을 번역 중이다. 남들이 알려주지 않은 공부의 길을 뚫고 나가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