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규 | 이번 <비평테이블>에서는 조금은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오늘 우리는 사회적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최근 작품들을 같이 살펴볼 것이다. 물론 사회적 상상력이라는 용어 자체는 매우 광범위한 말인데, 그럼에도 이 주제를 택한 것은 최근 젊은 작가들에 대한 그야말로 광범위한 ‘편견’ 때문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고 형식적인 층위의 실험에만 함몰되었다는 평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거의 리얼리즘 문학과 다른 지점들이 있을 텐데, 이런 부분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오늘 다룰 작품은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 임성순의 『컨설턴트』, 최진영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이렇게 네 편이다. 먼저 이들 작품에 대한 첫인상을 듣고 싶다.
김남혁 | 첫인상은 항상 덜 보거나 더 보는 인상일 경우가 많다. 작품의 경우도 그런데, 맨 처음 읽었을 때는 최진영의 작품이 제일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5부에 걸쳐서 ‘가짜엄마’를 만나는 과정이 반복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데 이 작품의 면면을 여러 번 생각하다보니 네 작품 중 가장 흥미로웠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말하기로 하고, 오늘 다룰 작품들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모두 정치적으로 온당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독자를 차렷 자세로 경청하게 만들지 않는 미덕이 있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가 문학을 따라다니는 두 개의 중요한 질문이라면, 이 작품들에서는 첫 번째 질문에 집중하면서도 두 번째 질문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열정이 느껴졌다.
박 진 | 이 네 권의 작품은, 느슨하게 말하면 사회적 상상력이고 좁혀 말하면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더욱 완강해진 계급의 문제와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강하게 환기시키는 소설들이다. 사회 변혁의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 보이고, 출구도 바깥도 없어 보이는 시대에, 그럼에도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붙들고 늘어지는 문제의식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개별 작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익숙한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정면 대결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젊은 감각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포착하고 소설화한 시도들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장성규 | 나는 네 권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분노’의 파토스가 넘쳐흐른다고 느꼈다. 일반적으로 현실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 문제에 대한 핍진한 묘사와 객관적 조망, 나아가 나름의 전망 등이 제시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들 작품은 그런 일반적인 문법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현실을 얘기할 때 분노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 분노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승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 선명히 잡히지 않았다. 네 작품이 전부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고 형식 역시 모두 다른데, 뭔가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적대적인 분노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박 진 | 맞다. 그런데 이런 ‘분노’의 파토스는 개별 작가들의 개성이나 세계관을 떠나서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일 것이다. 지금은 다 같이 가난해서 살기 힘들던 때와는 또 다른 박탈감과 분노가 팽배해 있고, 어떤 대상이든 걸리기만 하면 거기에 대고 한꺼번에 분노와 적개심을 분출하는 상황이다. 이런 양상은 IMF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와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바닥에서 위로는 절대로 올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명확한 대상 없는 사회적 분노로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
장성규 | 공감이 가는 얘기다. 이른바 90년대적인 것이 전면화되면서 폐기되었던 계급이나 혁명 등의 문제가 2000년대에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다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런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을 것이다.
박 진 | 그렇다. 개인과 내면의 문제에 집중한 90년대 문학부터 한동안 문학비평에서도 계급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80년대 문학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겠지만, 계급이란 것이 개인의 특수성을 획일적으로 일반화하고 경제적 조건에 중첩된 복합적이고 다양한 차이들(문화적 기호나 수준과 같은)을 섬세하게 고려하지 못한다는 한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그 자체로 절박한 문제가 되어버린 포스트 IMF 시대에 계급의 문제는 다시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게 되었다. 실제로 지금은 계급의 문제가 우리 삶과 의식을 철저히 구속하고 있다. 어디에 사는가, 연봉이 얼마인가 하는 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거의 결정적인 기준이 됐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모두의 ‘꿈’처럼 되어버렸다.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거나 속물적인 게 아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무능하거나 정신 못 차린 사람으로 취급 받는 게 당연해졌다. 가진 자들이 똘똘 뭉쳐 자기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는 ‘계급투표’ 방식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남혁 | 세계적으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IMF 이후에 시장 만능주의가 일반화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얘기했듯이, 과거에는 생산자 사회였고 그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적어도 노동자나 산업예비군으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지니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 사회에 적응 못하면 누구라도 ‘인간쓰레기’로 전락하는 소비자 사회가 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취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점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다. 백수, 취업 준비생,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문학작품에 대거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변화된 현실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박 진 | ‘루저’라는 유행어가 이런 상황을 씁쓸하고도 정확하게 반영해준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접수해 버린 이 사회는 말 그대로 거대한 서바이벌 게임장이다. 살아남는 것이 절대 명제가 되었고, 살아남으려면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무능해서 낙오된 루저들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고, 이에 대해 다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낙오될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나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 같은 것은 배부른 얘기가 되고 말았다. 특히 예전에는 계급의 문제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로 나타났다면, 지금은 노동자 대 노동자, 비정규직 대 비정규직의 구도로 나타나고 있다. 나보다 더 약한 자를 밟아야만 내가 살아남는 상황이니까.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의 탈락에 안도를 느끼지만, 내일이 되면 다시 자기들끼리 적이 되어 누군가를 밀어내야 하는 것이다.
장성규 | 공감한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계급의 문제는 언제나 있었을 것이고, 한국문학에서는 특히 80년대에 이 테마가 전면화된 바 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계급의 문제는 방금 두 분이 말해준 것처럼 확실히 전 시기와 변별되는 지점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적과 아(我)가 뚜렷했고 연대를 통한 저항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선 자체가 없는 상황이랄까.
김남혁 | 2000년대 소설에 누가 등장하는지를 떠올려보면 2000년대 사회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8,90년대 소설에는 민중, 시민이라는 혁명 주체가 등장했다. 그런데 2000년대 소설에는 속물, 마니아, 백수가 등장한다. 백수하면 이기호, 마니아하면 김중혁, 속물하면 정이현 등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백수들은 자포자기해서 골방에 있고, 속물들은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한 채 강남을 활보하고, 마니아들은 자기 관심사 외에는 세상과 단절된 채 유폐되어 있다. 이 세 무리는 사회가 변혁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사회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사회는 원래 이런 거라고 냉소한다. 이 세 무리가 만들어내는 2000년대 사회는 이른바 출구 없는 감옥이다.
장성규 | 그런 의미에서 분노와 냉소는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김남혁 | 그렇다. 사실 모든 사람이 쓰레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때문인데 사람들은 이 원인을 원인으로 보지 않고 해결책으로 보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생겨난 문제를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강화함으로써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 문제인 것은 국가가 자본주의의 문제를 감추기 위해 밖에서 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장의 내재적 한계를 은폐하기 위해 국가는 시장 외부에서 적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는 개인적 상태(백수, 속물, 마니아)에 안주하고, 개인들은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원인을 해결책이라 착각하고, 국가는 더더욱 교활한 방식을 활용하여 개인들의 사회변혁 의지를 망각하게 하는 데 2000년대적 상황이 놓여 있다.
박 진 | 좋은 지적이다. 지금은 사회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밑에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시대다. 그런데 이 같은 사회 분위기는 소설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십억> 같은 영화는 오지에 사람들을 풀어놓고, 경쟁자들을 다 죽이고 살아남으면 10억을 준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영화가 나온 것 자체가 징후적이라 하겠는데… 한편 서바이벌 시스템은 퀴즈 프로 <1:100>부터 <슈퍼스타K>까지 요즘 가장 각광받는 TV 프로그램의 기본 구도이기도 하고.
장성규 | 역시 박진 씨의 비평적 감각은 문학을 넘어 문화로 뻗어 있다. (웃음)
박 진 | 여담이지만 조금만 더 얘기하자면, <하녀>와 <방자전> 같은 영화들에서도 계급의 문제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원작인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비교해보면, 김기영의 ‘하녀’는 중산층의 여주인을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런데 임상수의 ‘하녀’는 어찌해도 여주인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는 존재, 철저히 짓밟히는 희생자일 뿐이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고 하녀들끼리 충성을 경쟁한다. 마지막에 하녀가 분신을 하는데, 그런다고 주인의 삶에 무슨 타격을 줄 수 있겠나. 그저 재수 없는 일이 하나 일어난 거지. <방자전>에서도 방자는 춘향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 있는 남자지만, 가진 자인 이도령과 신분상승 욕구에 가득 찬 춘향에게 맥없이 이용당한다. 이도령을 조롱하고 풍자하던 방자의 활기 있는 에너지는 찾아볼 수 없고, 아무리 잘났어도 계급의 벽에 절망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가여운 ‘하인’만 남아 있다. <방자전>에서는 방자란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훨씬 더 주목을 받는 것 같지만, 계급과 신분의 장벽은 오히려 더 절대적이 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전 <맨발의 청춘> 같은 영화들에서도 남녀 주인공의 신분 차이는 멜로드라마의 기본이었지만, 지금의 부자는 드라마 <꽃남>의 경우처럼 아예 접근 불가능한 다른 세계의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넘을 수 없이 고착화된 계급의 간극이 이렇게 대중문화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김남혁 | 흥미로운 얘기다. 좌담에선 항상 여담이 더 재미있다.(웃음)
장성규 | 본론으로 돌아와서…(웃음), 오늘 다룰 작가들이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90년대 중후반 이후에 대학을 다닌 세대인데, 이 세대들에겐 어떤 이중적인 균열이 있는 것 같다. 전 세대는 IMF 이전 세대였으니까 삶의 조건이 이들보다는 나았고 민주주의나 해방 같은 대의명분을 사회과학적 사유를 통해 인식하고 실현하려 한 세대였다. 반면 이들은 IMF 이후 대안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다. 문제는 이 세대가 가장 강하게 억압받는 세대가 되었는데도, 이들에겐 어떻게 그것을 탈출할 것인가에 대한 정밀한 사회과학적 사유가 부족하거나 전망의 제시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다.
김남혁 | 약간 맥락은 다른데, 김사과나 최진영처럼 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은 이미 무한 경쟁 체제가 갖춰져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해도 이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나의 계급적 정체성도 바뀔 수 없다는 데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임성순과 주원규 같은 70년대 생 작가들은 대학에서 사회과학 서적도 보고 데모에 참가했던 경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니 모든 게 시스템이었구나라는 허탈함, 씁쓸함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김영하도 그렇게 나온 작가인 것 같고. 거칠게 말해서 80년대 생 작가들은 절망하고, 70년대 생 작가들은 허탈해하고, 386은 냉소하는 것이 아닐까?
장성규 | 더불어서 아까 김남혁 씨도 말했지만 이 네 편의 작품뿐 아니라 여러 텍스트들이 루저나 속물 등등을 많이 형상화하는데, 그 방식이 매우 세련돼 보인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대학가에서 많이 나온 얘기가 문화정치라는 패러다임인데, 정치적으로는 약간 패배적이면서 문화적으로는 래디컬한, 그런 측면도 있다. 이것이 세대적인 특성일 수 있는데, 왜 이들의 작품에서 계속 분노와 무기력함이 나오는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인 것 같다. 예컨대 플롯도 문제를 알고 연대하고 실천하고, 비록 실패할지라도 비장하게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삽화적인 형식의 플롯을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세대론적으로 이 작가들에게는 세계를 변혁하려 시도했던 경험도 없고, 담론적으로도 하나의 폐쇄적이고 완결적인 체계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싶다. 오늘 다룰 작품들이 문제의식은 굉장히 무거운데 기법 면에서는 하위장르적인 특징을 많이 활용하는 것 역시 세대론적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작품들을 가지고 좀더 얘기해보면 좋겠다.
박 진 | 우리가 다룰 네 편의 작품에서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컨설턴트』에는 구조는 조정되지 않는다, 사라지는 건 구조의 구성원들일 뿐이다, ‘회사’는 전지구적이어서 물이나 공기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강조돼 있다. 『풀이 눕는다』는 온 세계가 돈에 짓눌려 있고 다들 같은 것을 욕망하고 있으며,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의 절망감을 그려 보인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서도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틀과 원리는 비슷해서 맞는 사람은 항상 맞고 으스대는 사람은 항상 으스댄다는 좌절감이 짙게 깔려 있다. ‘혁명’의 패러디라 할 수 있는 『열외인종 잔혹사』는 혁명을 게임업체의 리얼 서바이벌 이벤트로 뒤집어놓은,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 소설에서 미약하나마 어떤 저항의 가능성이 발견된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장성규 | 구체적으로 어떤 소설이 그런가?
박 진 |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과 『열외인종 잔혹사』에는 분노와 적개심, 세상을 죄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충동 등이 지배적이라면, 『컨설턴트』에서는 주입된 욕망의 충족을 포기하는 것(이를테면 예린을 떠나는 것), 그리고 회사의 비밀을 폭로하는 이 글을 남기는 것(문학)이 미약한 저항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풀이 눕는다』에는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의 삶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 대항의 가능성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빌딩들은 갖고 싶고 사고 싶다는 욕망, 그 관념 자체의 덩어리인데, “사람들이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면 저것들은 순식간에 무너져버”(146쪽)릴 것이라는 인식이 눈길을 끈다. 물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잘 나타나 있지만, 이 소설은 다른 것을 욕망하고 다른 꿈을 꾸는 것이 이 견고한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김남혁 | 『풀이 눕는다』에 대한 박진 씨의 독해에 동의한다. 이 소설에서 김사과는 제도에서 단절한 채 자신이 원하는 일을 끝까지 실천하는 게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마치 히피들의 삶처럼, 제도에 기생하는 대신 무위도식하면서 자신들의 허기를 강렬한 사랑을 통해 해결하는 태도를 작가는 제도와 단절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위선과 교양으로 뒤범벅된 예술가 집단에서 이들의 히피적인 태도는 얼마나 제도를 불편하게 하는가. 그런데 이 작품은 이들의 반항적인 행동에 대해 반성적 거리를 확보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장성규 |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지?
김남혁 | 나는 화자가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둘러싸인 LA의 거짓된 세계보다 누더기를 걸친 LA의 거지가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빈민의 폭동을 지지하는 동정적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이 로데오 거리에서 쇼핑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이 거지처럼 보이지 않겠냐고 풀이 화자에게 묻자, 화자의 대답은 ‘거지가 어때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때서!”(128쪽)다. LA의 거지를 그렇게도 칭송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거지가 되는 것은 거부하는 장면 아닌가. 또 이 소설의 인물들은 옥탑방에서 비루하게 살면서도 돈을 하찮게 여긴다. 정말로 돈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본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자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들이 지닌 낭만적인 성향을 보여주기에 일차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지만 혁명 속에 내재한 모순을 철저히 사유하지 않은 채 ‘혁명 없는 혁명’을 낙관하는 자유주의자 같은 이들의 행동이 예술가 집단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박 진 | 물론 주인공이 어려서 치기어린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매 장면이 일관성 있게 짜여 있지 않다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들에게 낭만적 성향이 나타난다는 점을 부인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나는 그런 약점들보다는 이 소설의 의의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풀은 온 세계가 돈에 짓눌려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에 대한 기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모두가 원하고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거대한 빌딩들에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화자 ‘나’는 풀을 사랑한다. 세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풀이 저것들을 사랑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풀은 파괴당할 것이다, “너는 절대로 못 이겨”, “그러니까, 풀, 너는 절대로 지면 안 돼”(147쪽)라는 ‘나’의 말이 너무도 절박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풀이 노동하지 않길 바라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불확실성 속으로 삶을 완전히 밀어 넣고자 하는 것도 세상에 집어 삼켜지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저항의 한 방식이다.
김남혁 | 이 소설이 세상은 변하지 않을 테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체념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박 진 | 중간에 마리화나를 하는 여자 안나가 나오는데, 안나와의 대비가 그 점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안나는 체제는 견고하다, 우리는 체제 내 존재다, 그래서 “그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해 쓴다”(227쪽)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쓰려고 발버둥 친다. 물론 완전히 빈곤 속으로 떨어지고 풀과 헤어지게 된 다음에는 나도 안나와 비슷한 말을 하게 되고, 풀 역시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는 ‘돈 벌어야 돼’라는 말을 되뇐다. 이렇듯 체제에 저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드러나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불안정하고 위태롭지만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김남혁 | 나 역시 박진 씨가 말한 측면 때문에 이 작품을 손쉽게 비판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미덕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소설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풀과 화자는 무조건 이견의 여지없이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이들에 대해 반성적 거리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장성규 | 개인적으로는 김사과의 『미나』를 재밌게 읽었다. 이 작품에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잘 표현된 것 같았다. 『미나』의 ‘현실’에서는 문화자본에 의한 구별짓기와 계급 생성이 이루어진다. 이런 측면이 과거 계급 문제를 다룬 텍스트들이 간과한 문제를 잘 짚은 것처럼 보였다. 『풀이 눕는다』에서 좀 아쉬웠던 것은, 『미나』에서 보여준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대신 분노의 파토스가 전면화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박 진 |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 더 심화된 건 분명하다.
장성규 | 그런데 그 원인이 모호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박 진 | 누구도 명확한 대안이나 전망을 제시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닌가? 결국 이 소설은 ‘나’는 정신병원에 다니고 풀은 자살하고 마는, 겉보기엔 전혀 비전 없는 결말을 보여준다. 하지만 “매일매일 풀을 생각하며 조금씩 그곳으로 가고 있다”(294쪽)는 ‘나’의 말은 아무리 힘들어도, 미친 사람 취급당하고 루저로 낙인 찍혀도 다른 삶을 꿈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읽힌다. 결말도 이렇게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어서, 이 소설은 여러 가지로 미묘하게 끌리는 작품이었다.
장성규 | 『풀이 눕는다』는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점이 많은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은데?
김남혁 | 김사과 작품에서는 사건에 의한 전개보다는 인물 간의 대화가 매우 중요하게 등장한다. 『풀이 눕는다』에서 낭만적 성향의 인물들이 다소 어울리지 않게 대단히 사실적인 대화를 나누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그 같은 서술 방식의 배경에는 인간이 타인과 끈끈하게 연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같은 세계관은 절망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런 대사들은 복수의 인물들이 하나로 동화될 수 있다는 판타지를 거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박 진 | 인물 관계뿐 아니라, 스토리 자체도 하나로 매끄럽게 통합되기보다는 장면의 순간성을 부각시킨다. 이는 과장되게 쏟아져 나오는 대화들이 경험적인 리얼리티를 초과하거나 일그러뜨리면서 무수한 균열을 만들어내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파열된 각각의 장면들과 언어들의 틈새로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 김사과 소설의 매력이다.
장성규 | 나는 그런 특징을 극적 구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플롯을 해체하면서 대신 장면을 전면화시키는 극적 구성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일반적인 개연성 있는 플롯이란 인과율과 관련되는데, 인과율로 해명되지 않는 현실을 다룰 때 플롯이 해체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극적 구성을 통해 순간적으로 억압된 것을 강렬하게 분출하는 방식이 적합한 시대인 듯도 하다. 그런 점에서 김사과의 기법적 특성은 단지 형식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고 나름의 현실 인식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김남혁 | 내게 이 작품은 지금까지 김사과의 소설들을 읽으며 가졌던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못한 것 같다. 나는 최진영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 좀 더 주목했다. 나머지 세 작품이 혁명의 좌절로 끝난다면, 최진영은 혁명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집을 나서는 인물들의 실천이 단순히 사회에 반항하려는 정서의 표출이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혁명이었는지를 구분하려면 혁명 그 다음날 아침을 살펴보면 된다. 사건보다 후사건적 실천이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이다. 다른 세 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집을 나서든 메시아를 기다리든 콩고에 가든 현실과 단절하는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이내 죽어버리거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반면 최진영의 소설에서 인물은 무력하게 죽거나 현실은 변할 수 없다며 냉소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세상 속으로 개입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때리지도 않고 자신을 동정하며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가짜엄마’들의 유혹으로부터 ‘진짜엄마’에 대한 믿음을 지켜낸다. 집을 나서는 게 사건이라면 후사건적 실천은 이런 가짜엄마들의 유혹을 이겨내는 활동이다.
박 진 | 글쎄, 가출을 곧바로 혁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작품은 성장의 과정에서 계급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설이다. 진짜엄마를 찾는다는 것이 실은 세상의 낮은 곳, 가난하고 배고프고 고통 받는 자의 진짜 얼굴을 찾아다니는 일이고, 그 과정이 주인공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세상을 두루 돌며 사람들을 만나는 건 『젊은 날의 초상』부터 『개밥바라기별』까지 수많은 성장소설에서 볼 수 있는 구성 방식이라서, 좀 상투적이거나 식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여정이 가난한 자에 대한 낭만적 미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의미 있어 보인다. ‘맞고도 가만있는 건 진짜엄마가 아니다’라는 믿음이 점차 ‘진짜엄마에게도 오직 중요한 건 자신의 생존이다, 진짜엄마는 너무 많아서 알아보지 못했던 거다’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면서, 그들의 미화되지 않은 맨얼굴을 인정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비관주의를 강화하기도 하지만.
김남혁 |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독립하는 게 성장이 아니고, 진짜엄마와 만나서 서로 행복해지는 게 성장이라고 보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보통 성장소설은 내가 자율적 주체성을 찾는 데서 끝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개인의 자율성은 타자와 관계 맺을 때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처럼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로 존중하면서도 절대화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렇지만 결국 진짜엄마는 없는 거고, 나리의 아빠와 대결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진짜엄마가 된다는 결말도 인상적이었다.
박 진 | 나는 나리 아빠와 대결하는 그 결말이 불만스러웠는데. 이 소설에서 분노와 적개심은 전쟁이 나서 다 죽든지 아니면 다 부서져서 모두 가난한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면 좋겠다는 상호의 말, 세상이 끝장나면 가장 높은 곳에서 지켜볼 거라는 ‘나’의 말 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 분노가 나리 아빠라는 한 개인을 죽이려 하는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나마도 실패하여 죽고 마는 결말은 과거의 신경향파 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대목에서 좀 다른 상상력을 보여줬다면 좋았을 텐데, 결국 리얼리티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면서 이런 결말밖에는 나올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한다.
장성규 | 최진영 작품은 참 요즘 소설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게 말하면 핍진한 묘사와 감동을 주는 문장이 있는 거고… 예컨대 철거촌에서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용역깡패가 되는 철거촌 청소년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출과 엄마 찾기가 계속 반복되는 느낌이 강하다. 단순한 반복에 그치지 않으려면 각각의 가출과 엄마 찾기의 차이가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주인공의 성장이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이 다소 아쉬웠다.
박 진 | 내가 보기에도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생생하고 인상적인 인물들이다. 우선 백곰은 자신이 루저이면서도 마치 다른 계급에 속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인텔리 백수의 모순적인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고시 준비하다 빚지고 극빈자가 된 폐가의 남자는 타락이란 곧 계급적 추락임을 너무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다. 그가 과거에 운동권이었다는 사실은 세상을 바꾸려는 꿈이 얼마나 무력한지, 망상과도 같은지를 말해주는 듯해 마음이 착잡하다. 나리, 유미, 상호 같은 가출 청소년의 모습도 무척 생생한데, 지난 시간에 다뤘던 상투적인 불량 청소년 백서 수준을 넘어서는 리얼리티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장성규 | 불만스러운 점도 많이 있었지만 최진영은 무엇보다 기본기가 단단한 작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보다도 이후의 작품이 더 기대되는 작가였다. 이제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보자. 박진 씨는 『풀이 눕는다』, 김남혁 씨는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 주목했는데, 나는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가 제일 재미있었다. 우연히도 세 사람의 의견이 다 달라서 흥미롭다. 김사과는 예술가 소설의 형식으로 주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최진영은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주인공의 성숙 과정을 보여주는데, 두 작품 모두 형식상 자신이 겪는 사건을 통해서만 구조를 인식하는 데 그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주원규는 시스템 전반을 인식하려는 메타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다. 구조의 문제 자체를 위에서 조망하려는 야심이 보여서 좋았다. 물론 『열외인종 잔혹사』는 고전적인 소설 문법에서 보면 논란이 많은 소설일지 모른다. 분명히 개연성도 좀 떨어지고 작위적인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루저 네 명을 전형적으로 설정하면서 그들의 다층적인 시각을 통해 현실을 재현한다는 점이 야심차게 느껴졌다.
박 진 | 『열외인종 잔혹사』는 흥미롭긴 한데 아쉬움이 많았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혁명의 패러디라 하겠는데, 혁명이 게임업체의 리얼 서바이벌 이벤트로 변질된다는 상상력이 이 시대의 징후를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장성규 씨 지적대로 이 소설은 장영달(극우 퇴역군인), 윤마리아(외국 다단계 제약회사의 인턴사원), 광록과 김중혁(노숙자), 기무(게임중독 백수) 등을 통해 이 사회의 축도를 그려내는데, 특히 연금생활자인 ‘극우 보수세력’과 데이비드교의 ‘종교적 카니발’은 지금 한국 사회의 마이너 버전이라 할 만한 재밌는 설정이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상상력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장성규 | 아쉬운 점은 뭔가?
박 진 | 혁명이 전도된 리얼 서바이벌 게임을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하나의 이벤트”(263쪽)로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그 난장판이 아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잊혀져버리는 결말 등에서 비관적이고 허무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 어느 날 갑자기 양머리로 변한다는 상상력 또한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누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인데, 이것도 현실에 대한 통렬한 인식인 동시에 패배주의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사이비목자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들을 사살하는 장면도 분노의 극단적 표출 말고는 별다른 의미를 던져주지 못한다. 누구도 우리 자신을 대신 구원해줄 수 없다는 자각은 어느 정도 의미를 지니겠지만.
김남혁 | 『열외인간 잔혹사』는 서사 자체도 흥미롭고 문제의식도 분명한 소설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비판 대상이 선명한 반면 소설이 건드리고 있는 문제는 협소한 게 아닌가 한다. 특히 이 작품은 ‘열외인종’의 전형을 뽑았는데, 이는 우리가 2000년대 이후 소설에서 너무 많이 본 유형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열외인종 잔혹사』에서 1부는 이 시대를 견뎌내고 있는 세대들에 대한 스케치로 읽을 수 있다. 10대 비행청소년, 20대 비정규직 노동자, 40대 노숙자, 60대 퇴역군인 등의 모습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느 한 세대도 빠짐없이 모두 ‘열외인종’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근데 주원규는 비행청소년, 비정규직 노동자, 노숙자들이 열외인종이 된 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며 그들을 편드는 반면, 퇴역군인이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시종 조롱한다. 소설 초반부에 서술됐듯이 퇴역군인 장영달 역시 기초생활수급자 아닌가. 장영달이 보수적인 신념을 유지하게 된 원인을 생각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조롱하는 모습이 불편하다.
장성규 | 그런가? 개인적으로는 『열외인종 잔혹사』의 기법이 재미있었다. 독자가 읽으면서 스스로 슈팅 게임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슈팅 게임처럼 자기 한 사람의 시선으로밖에 세상을 보지 못하는 네 사람이 각기 다른 이유로 남한 자본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으로 모여드는데, 독자들은 교차하는 네 개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사건의 정체를 찾아가야 한다. 읽는 사람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능동적 효과를 낳는 것이 매력적이다. 흔히 거시적인 얘기를 하면 상투화되거나 추상화되기 쉬운데 그런 느낌이 없어서 좋았다. 1인칭 슈팅 게임의 시점은 이 작품의 인물들이 일종의 편집증을 보이는 것과도 잘 어울린다. 이들은 하나의 사건을 자신의 프레임으로 재단하고 그것만 보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나는 이 편집증이라는 세계 인식 자체가 일종의 징후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띤다고 본다.
박 진 | 장성규 씨의 지적처럼 편집증이 아니고서는 사회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일지 모르겠다. 거칠고 단순한 점이 있는 대로 이 소설의 의의를 좀더 말해보자면, 추상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게 눈길을 끈다. 보수 우익인 퇴역군인의 모습이나 과장된 종교 집단의 모습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병적인 지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구조를 단순히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이다.
장성규 | 다소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주원규에게는 기독교가 중요한 테마인 것 같다. 최근 작품인 『무력소년 생존기』에서도 천국과 지옥, 거짓 선지자 등의 알레고리가 강하게 나타난다.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인데, 일종의 해방신학이라고 해야 하나? 그 쪽에서 얘기하는 소규모 초기교회 공동체? 이런 부분에 대해 주원규가 생각이 많은 거 같다. 그런 코드로 읽어도 흥미로울 것 같다. 이제 임성순의 『컨설턴트』를 보자. 이 소설은 기법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하위장르의 문법, 추리와 스릴러가 전면화된 소설이고 영화적 기법 역시 많이 차용된 작품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박진 씨가 해줄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박 진 | 『컨설턴트』는 『열외인종 잔혹사』에 비하면 한국적 특수성이 약하긴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 질서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 자체에서 일단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장르 문법을 동원한 방식 역시 절묘하다. 누군가를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회, 그 배후에 살인 컨설턴트의 공모살인이 있다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온 세상을 거대한 ‘회사’의 구조조정에 빗댄 설정이 이 사회의 알레고리로서 설득력을 지닌다. 특히 추리물과 스릴러의 장치를 통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죽음에 대해 우리가 과연 책임이 없는가를 끈질기게 질문한다. 그렇게 해서, 그저 큰돈을 버는 일(이윤의 추구) 자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는지 환기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 폭력성을 짚어낸다. 다소 단순하긴 해도 문제의식과 장르적 기법이 잘 어울려 만들어진 괜찮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장성규 | 박진 씨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런데 결론이 너무 일반적이지 않은가? 모두가 가해자라는 인식, 예컨대 내가 마시는 커피가 결국 제3세계 농민에 대한 가해 행위라는 진술 같은 건 너무나 원론적이어서 분명 타당하지만 무척 뻔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인 결론이 먼저 놓여 있어서인지 회사 외부, 시스템 외부의 가능성들을 아예 봉쇄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음이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개체의 윤리랄까, 그런 부분을 부차적으로 만드는 듯했다.
박 진 |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점은 주인공이 체제에 순응하는 자신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전지구적이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회사에 고용된 입장에서, 그는 자신의 구조조정 행위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는 동시에 그런 자신을 스스로 비웃고 있다. 그리 대단한 저항은 아니지만, 지금 자신의 행복이 ‘피비린내 나는 행복’임을 인정하는 것, 이게 미약하지만 의미 있는 성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김남혁 | 내 생각도 비슷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늘 다루는 네 편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열외인종’이 아닌 중간 관리자다. 하지만 관리자 역시도 결국에는 열외인종이라는 걸 말해주는 작품이다. 관리자도 살아남으려면 사랑하는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고, 피비린내 나는 행복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점이 좋았다.
장성규 | 네 편의 작품을 살펴보았는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네 작품 모두 결론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현실은 이따위인데 할 수 있는 건 없구나’라는 인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것이 2010년 지금, 우리의 객관적인 현실인 건 사실일 것이다. 세계에 대한 완결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현실에 맞서는 용기와 밀도가 부족하게 느껴져서 아쉽다.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깊이 있는 정치경제학적 사유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 같고.
김남혁 | 나는 이 소설들의 결말 처리 방식에는 큰 불만이 없다. 장성규 씨가 말했듯이 전망 부재를 알리는 이들 소설의 결말은 현재 우리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방식이 소설 속에서 반복되거나 막연하게 나타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피씨방, 옥탑방, 고시원, 비정규직 등등, 작가들은 이런 사례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좀 더 이질적이고 다양한 주제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옥탑방, 피씨방 등을 반복하는 소설들에서 정치경제학적 사유의 빈곤을 지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고 자본제를 비판하기 위해 작품 안으로 들고 오는 구체적인 사례가 반복적이고 협소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와 연결된 의회민주주의 문제를 비판하는 작품은 보지 못한 것 같다. 투표로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했다고 믿게 만드는 의회민주주의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말이다.
박 진 | 나 역시 전반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이 네 편 안에 나타나는 편차에 주목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독해가 아닐까 한다. 낙관적 비전을 무책임하게 제시하지도 않고, 분노와 적개심을 분출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는, 힘겨운 저항의 작은 가능성들을 섬세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김남혁 | 이들 소설에 두드러진 하위장르적 성격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제는 하위장르를 활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거나 파괴력을 지니지는 못한다. 어떻게 보면 하위장르의 요소들이 단지 불편하고 무거운 주제를 세련되고 가볍게 소비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는 건 아닐까? 이 네 편의 작품 역시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본다. 잘못하면 사회적 상상력마저도 금방 상품성의 논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 문학에는 주제가 무겁더라도 전달 방식은 가볍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점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도 역설적으로 문학 시장의 논리에 포획될 수 있다. 사회 변혁뿐 아니라 사회 변혁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고민하는 문학이 필요하다고 본다.
박 진 | 중요한 지적인데, 나는 장르적 상상력에 잠재된 또 다른 가능성에 좀 더 기대를 걸고 싶다. 도무지 비전이 없어 보이고 리얼리즘적인 총체적 인식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장르적이고 환상적인 기법을 통해 정치적 가능성을 찾는 방식이 지금은 더욱 필요할지 모르겠다.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서 말이다. 장르적, 환상적 기법들이 더욱 필요해졌다는 것은 현실이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리얼리티가 더 이상 예전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로, 전쟁의 폭력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보다 전쟁 영화의 CG들이 지금은 훨씬 더 리얼하고 잔혹하다. 이런 시대에 고전적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얼마나 와 닿을 수 있을까? 리얼리티를 적극적으로 변형하는 실험적인 시도들이 오히려 현실의 폭력성을 더 극명하게 그려낼 수도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상품화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리얼리티 역시 상품화되고 있다는 점, 리얼리티 쇼나 휴먼 다큐 방식으로 리얼리티 그 자체가 매력적인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장성규 | 역시 장르냐 아니냐, 환상이냐 리얼리티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어느덧 좌담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오늘 <비평테이블>은 젊은 작가들의 사회적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 작가에 대해 얘기할 때는 항상 발랄함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