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진 | 이번 <비평테이블>에서는 최근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청소년문학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여러 편 글을 써온 문학평론가 소영현 씨를 특별히 초대했다. 와줘서 너무 고맙다.
소영현 | 청소년문학 전문가는 아니지만…(웃음) 만나서 반갑다.
박 진 | 그런 겸손의 말을.(웃음) 더구나 소영현 씨는 개인적으로도 절친이라서 꼭 함께 좌담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김남혁 | 나도 소영현 씨와 이 주제로 좌담을 하게 돼서 무척 기쁘다. 오늘 좌담은 분위기가 더 화기애애할 것 같다.
박 진 | 남혁 씨가 원래 누나들을 좋아해서…(웃음) 사실 청소년문학은 새로 출현한, 좀 낯선 영역이다. 예전에는 청소년 권장도서 같은 게 있었다면, 지금은 청소년문학이 독립된 영역이나 장르처럼 여겨지고 있다. ‘청소년문학’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청소년소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기도 한데, 청소년문학이란 영역이 생겨나고 이렇게 관심을 모으고 있는 현상을 어떤 배경이나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까?
김남혁 | 내 경우에는 가끔 주변사람들로부터 청소년이 볼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청소년에게 책을 권하는 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문학사적으로 검증받은 동서양의 고전은 우리 상황과 너무 멀리 떨어진 보편적인 문제들만 건드리는 것 같고, 또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그간 배워온 문학과 얼마나 차이가 날지 의문이 들어서 머뭇거리게 된다. 괜히 고전을 소개해줬다가 문학에 대한 거부감만 더 생길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이기호나 천명관같이 가독성 있고 유머러스한 당대 작가들의 작품을 권하는 것도 좀 망설여진다. 이들의 소설도 청소년들의 실제 삶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아마도 청소년문학은 청소년이라는 이질적인 독자의 요구를 그동안 문학이라고 불려온 고전이나 성인문학(?)이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청소년 독자층이 지닌 요구를 더 잘 충족시켜주는 문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청소년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출현하게 된 것 같다.
소영현 | 김남혁 씨 얘기를 들으니, 나는 어땠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나는 청소년문학이 그런 내적인 요구에 의해 생겨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소년문학은 기본적으로 출판시장의 요구가 만들어낸 측면이 강하고, 오히려 거기에 맞춰서 작가나 평론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동/청소년 문학 성장의 분기점을 이룬 2004~5년의 시기를 두고 말하자면, 문학 시장은 침체되고 아동문학 시장이 안정적 확장기에 접어드는 상황에서 아동문학 독자가 세분화되는 과정으로 청소년문학의 출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318식 구획에 기초한 청소년문학이라는 개념이 출판계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기획되고, 청소년문학상이 생겨나고 청소년문학이라는 이름의 문학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동청소년 문학계의 고전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대거 번역,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사실, 우리가 떠올리는 청소년문학의 상(象)도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소설들을 포함해서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들이 만들어낸 것에 가깝지 않나?
박 진 | 두 분 얘기가 다 공감이 가는데, 김남혁 씨 의견은 청소년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줘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닿아 있는 것 같다. 청소년문학이 정말로 청소년의 요구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실제로는 소영현 씨 지적처럼 출판시장의 요구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게 사실이다. 청소년을 타깃으로 하는 문화상품이 등장해 각광을 받고 있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고. 다들 알고 있듯이, 한동안 출판사들이 아동문학으로 ‘먹고 살았지’ 않나? 아동문학이나 청소년문학 붐은 우리나라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에 힘입어서 논술 교육용 책이 팔려 나가는 현상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청소년문학은 이미 이런 점을 지적하고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문화 현상이자 문학 현상이 되었으니, 청소년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오늘 더 깊이 생각해보기로 하자.
김남혁 | 나도 소영현 씨 의견처럼 청소년문학이 겉으로는 청소년이라는 새로운 독차층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하면서 실은 청소년이라는 새로운 소비자층을 발굴해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계기가 분리돼 있진 않은 것 같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청소년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소영현 |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예전에 비해 지금은 성인이 아닌 존재로서의 ‘청소년’의 연령대가 상당히 넓어졌다는 점이다. ‘청년’의 실체가 사라지고 학령기를 거쳐 사회의 일원이 되는 패턴화된 성장 과정에 변화가 생긴 것인데,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아직 성인이 아닌, 원해도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청년(청소년)의 사회화 과정이 길어지고 있는 현실 상황이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면도 있다고 본다.
박 진 | 그런 상황은 사회학적으로도 분석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십대 후반이면 다 ‘청년’이었고 청춘소설의 주인공이었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이들이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청소년문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따로 묶이고 있다. 이 울타리는 십대들이 더 약해지고 어려지고 사회적으로 무력해진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청소년을 학교와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시기로 간주하는 시선과도 관련이 깊은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청소년문학이란 게 한편으로는 청소년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몽의 대상,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반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영현 | 이건 여담이지만, 아동문학과 청소년문학의 대표적인 소비자는 386세대 부모라는 얘기가 있다. ‘386세대’라는 말 자체가 허구에 가까운 것이니, 농담이라고 해야겠지만. 386세대의 자녀들이 아동이었던 시절에 아동문학이 굉장히 활성화 되었다면, 이제 그 아이들이 십대가 되면서 청소년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이 문제가 아동이나 청소년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교육열에 불타오르는 그들 부모 세대의 움직임과 연동돼 있는 게 아니냐고 얘기하기도 한다.
박 진 | 무척 재밌는 얘기다. 386세대의 교육열과 문학에 대한 갈망 같은 것들이 청소년문학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는 건데…
소영현 | 따지자면 그렇다. 어쨌든 자녀를 더 잘 컨트롤하고자 하는 그 세대 부모들의 교육적인 욕망이 청소년문학에 대한 소비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김남혁 | 나 역시 청소년문학의 소비자가 정말 청소년들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계몽적인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을 텐데. 청소년문학 안에는 청소년 자신들의 요구보다는 교육적 효과를 원하는 부모들의 욕망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청소년문학이 『완득이』 같은 교훈적인 성장소설류에 한정돼 있는 건 아닐까 한다.
박 진 | 성장소설이란 사실 참 폭넓은 개념이다. 회고형 성장소설도 많고, 성장에 실패하거나 성장을 거부하는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 청소년문학은 김남혁 씨 지적대로 유독 희망적인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는, 계몽적인 성장담의 틀에 갇혀 있는 편이다. 성장소설과 청소년문학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소영현 | 청소년문학이 성장소설과 어떤 지점에서 변별적인가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청소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고, 성장소설이 아닌 방식의 청소년문학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쉽게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청소년문학에 대한 논의에서는 성장소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를 좀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문학과 성장소설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는 기존의 문학 범주 외곽에 놓여 있던 청소년문학이 ‘문학’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논의로 보아야 할 듯하다. 문학 범주 안에서 아동문학이 따로 영역을 할당받았었다면, 청소년문학은 이제 위상 정립을 해나가는 과정인 것이고, 이 과정에서 성장소설의 영역을 청소년문학이 점유해 들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따지고 보면, 성장소설이라는 다소 ‘애매한’ 범주가 재고되고 있는 것은 청소년문학 관련 논의가 시작되면서부터가 아닌가?
박 진 | 내 생각에도 청소년문학이 성장소설과 확연히 구별되는 또 다른 영역이라기보다는 성장소설의 한 구체적이고 특수한 형태가 아닐까, 아동문학이 범주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성장소설과 만나고 겹치게 되는 영역이 아닐까 싶은데… 성장소설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청소년문학이란 개념은 상당히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청소년문학이 청소년을 위한 것이냐,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냐, 아니면 청소년이 창작하는 문학이냐에 대해서도 의견들이 분분하다.
김남혁 | 청소년문학은 정말 애매한 말이다. 장르라는 건 문학작품 그 자체를 두고 설정되는 개념이니까, 청소년문학이 장르는 아닐 것이다. 청소년문학은 문학작품보다는 수용자나 창작자를 중심에 두고 설정된 개념 같다. 오늘 다룰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들이 내세운 청소년문학이라는 이름은 수용자를 고려한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청소년이 읽어 볼만한 문학 또는 읽어 봤으면 하는 문학이다. 그런데 과연 청소년이 읽기에 적당하고, 청소년이 읽어 봐야 하는 작품을 어느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청소년문학이라는 명칭은 이렇게 모호하고 심지어 무용할 정도인데, 작품에 대한 구속력은 상당하다. 청소년문학이라는 설정이 작품의 특이성을 억압할 정도다.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들만 봐도 판타지니 SF니 하는 여러 하위장르들이 활용되고 있지만 대체로 계몽적인 성장소설로 수렴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청소년이 읽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책에 대한 어른들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소영현 | 외국의 경우에도 청소년문학이란 게 따로 있지는 않은데, 넓은 의미에서 아동청소년 문학에는 청소년이 독자가 되는 문학,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문학, 청소년이 창작하는 문학, 이 세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다. 그 중 한두 개를 충족시키는 경우도 이 안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고. 아무튼 외국의 사례를 봐도 합의된 개념이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박 진 | 새로운 문화현상이나 용어의 경우, 명확한 개념 규정이 먼저 이루어지기보다는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들과 진행 중인 움직임들 속에서 사후적으로 그 의미를 정리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 나타나는 현상을 놓고 보면 청소년문학은 청소년 독자층을 위한 소설이면서 내용적으로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거나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재와 등장인물 면에서도 청소년이 중심이 되는 건데, 여기에도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 청소년이 직접 경험하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청소년이 읽을 만한 소설을 상당히 좁은 범위로 제한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안 그래도 요즘 학생들은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는데, 청소년문학이 읽을 만한 책을 대표하게 되면 가족이나 학교 얘기 말고 다른 소설은 이전보다 더 안 읽게 되는 건 아닐지… 또 청소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식으로 가볍고 쉬운 읽을거리들이 양산되면서, 청소년층의 독서 수준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
소영현 | 물론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에 친숙한 청소년들은 계속해서 다른 책들도 읽을 테고. 좀더 긍정적으로 보자면, 청소년문학이라는 범주가 그간 책에 관심이 없었던 청소년들을 독서층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현재까지는 청소년문학만의 고유성이 무엇이고, 그런 것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가 더 많은 편이다. 이런 문제들은 청소년문학이 처한 딜레마와 연관되어 있다고 해야 하는데, 내가 볼 때 결국 청소년문학의 딜레마는 ‘청소년’과 ‘문학’ 사이의 간극에서 생겨난 것이다. 청소년문학에 대한 입장 차이 역시 청소년과 문학에 대한 입장, 그 관계에 대한 입장에서 발생한다. 특히 이런 입장 차이는 문학 관련 종사자들과 아동문학 종사자들, 특히 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들과의 인식 차이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용’ 문학이냐, 청소년 ‘문학’이냐, 이렇게 방점이 어디에 찍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정의가 나오게 된다. ‘청소년용’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 그럼에도 먼저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인데… 대개는 교육적 효과와 미학적 완성도의 ‘적절한 조화’가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정도의 애매한 타협으로 논의가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박 진 | 중요한 얘기가 나온 거 같다. 아쉽지만, 실제로 문학 전공자와 교육 전문가 사이에는 쉽게 합의될 수 없는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 논란에는, 좀 껄끄러운 얘기긴 하지만, 교육 전문가와 문학 전공자 사이의 ‘영역 싸움’(?) 같은 것도 개입해 있다.(웃음) 그래서 누가 청소년문학 전문가냐 하는 소모적인 논쟁이 되고 마는 경우도 많다.
소영현 |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면 청소년문학이 뭔지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끊임없는 논의들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고민을 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문제제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측면일지 모른다. 청소년문학을 정의하는 작업이 불러온 부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청소년문학에 대한 논의가 결국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고, 현재의 문학, 혹은 문학 범주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포함한 논의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우리가 이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다면 큰 수확이지 않을까 한다. 또 서로 다른 관점의 논의에서 자기 입장이나 정체성, 자기가 서 있는 지반 같은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문학하는 사람들로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데, 이런 입장을 스스로 명확히 함으로써 더 생산적인 논의들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박 진 | 동감이다. 그런 입장의 차이들을 인정하면서도 청소년문학을 둘러싼 여러 논점들 속에서 우리 사회의 청소년에 대해, 그리고 지금의 문학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제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세 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나눠보자. 창비 청소년문학상은 청소년문학이라는 영역과 그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청소년문학을 문화적인 키워드로 부각시키는 데 상당히 기여한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특히 1회 수상작인 『완득이』가 한 역할이 크다. 두 분은 세 권의 수상작 전반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았고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남혁 | 일단 이런 시도는 환영한다. 책에 대한 청소년들의 이질적인 요구를 수용하고, 또 청소년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안하는 데 긍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세 작품이 다 계몽적인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다양성이 부족해 보인다. 『완득이』, 『위저드 베이커리』, 『싱커』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색깔의 소설들이지만, 모두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그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리게 된다는 식의 공통된 구조를 보여준다.
소영현 | 세 권이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박진 씨가 아까 말한 것처럼 독자의 수준을 배려한 탓인지 몰라도 갈등들이 너무 쉽게 처리돼 있고,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 없이 너무 편하게 읽힌다는 점이 아쉽다. 그렇긴 해도 다른 청소년문학 작품들에 비해서는 장점이 많은 소설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와 있는 청소년문학들을 보면 문장이 안 되거나 서사가 너무 미약한 경우들이 많다. 더구나 비행불량청소년 백서라고나 할까, 폭주족이나 임신이나 가출 같은 청소년 문제들을 현상으로만 나열한 보고서 같은 소설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 있다. 그런 소설들에 비하면 이 세 권에는 일반적인 문학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것이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까지 끌어들인 힘은 잘 짜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김남혁 | 그렇긴 한데 나는 너무나 웰메이드 소설 같다는 게 오히려 거슬린다. 스토리를 구성하고 사건이나 인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있는데, 그게 너무 관습적인 서사라는 생각이 든다.
소영현 | 이야기가 무척 관습적이긴 하다. 캐릭터도 전형적이고.
김남혁 | 예를 들면 『완득이』를 읽으면서는 만화 <달려라 하니>가 생각났다.(웃음) 완득이가 하니, 김동주 선생이 홍두깨 선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영현 | 나는 <슬램덩크>가 생각났는데. (웃음) 완득이가 강백호의 캐릭터 그대로여서 그림이 그려졌다.
박 진 | 그래도 1, 2, 3회 청소년문학상이 뭔가 구색을 잘 맞춰서,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엿보이기는 한다. 『완득이』는 밝고 건강하고 모범적인 성장담이라면 『위저드 베이커리』는 판타지이면서 ‘어둠의 포스’가 담겨 있는 소설이고, 『싱커』는 SF적인 모험 이야기다. 이중에서는 특히 어떤 소설이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소영현 | 청소년문학과 관련해서 ‘의의’가 있는 작품이라면 『완득이』를 들고 싶다. 이 소설은 서사적 새로움이나 미학적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만화적 감수성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에게 하위문화(대중문화)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주요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완득이』의 만화적 감수성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남혁 | 개인적인 느낌으로도 『완득이』가 제일 재미있었고 내 취향에도 잘 맞았다. 특히 이동주 선생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점이 좋았다. 이동주 선생이 완득이를 돕는 방식과 완득이가 이동주 선생을 바라보는 방식은 선과 악의 손쉬운 대립구도를 의심하게 한다. 이동주와 완득이의 관계는 이동주의 선행이 위선이 되지 않게 하고, 이동주의 위악이 악행이 되지 않게 한다. 『완득이』는 유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삶을 진지하고 폭넓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박 진 | 나는 『완득이』가 특별히 좋았던 건 아니지만, 김남혁 씨 말대로 이동주 선생이라는 인물 때문에 이 소설이 어른들한테도 재미있게 읽히면서 교훈을 주는 면이 있을 것 같다. 어른들과 완득이가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풀어가는 방식이 잘 그려져 있고, 다문화 가정이나 장애인 가족, 결손 가정, 빈곤과 불량 청소년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에도 편견이나 연민이 없다는 게 장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점들이 너무 전형적이고 교과서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사실 이 소설에 별로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계몽성이 매우 강한 소설인데, ‘그러면 안 된다’, ‘싸움질 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네가 하고 싶은 것(킥복싱)을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계몽성을 감추고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소영현 | 박진 씨 얘기와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볼 때 이 소설은 이전의 리얼리즘 문학론에 나타났던 의의와 한계를 고스란히 연상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완득이』가 보여주는 전형성의 획득,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점, 문제적 지점에 대한 포착 같은 게 물론 중요하긴 하겠지만, 소설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될 때 나타나는 문제점들(문학의 범위를 협소하게 만드는 한계 같은 것)을 이 소설도 그대로 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완득이』는 내용이나 미학의 차원에서 보면 말 그대로 건전한 성장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이 의미 있다면, 역시 아까 말한 만화적 혹은 하위문화적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김남혁 | 『완득이』는 정말 표지도 그렇고 중간 중간 첨가된 삽화도 그렇고 만화책 같은 느낌을 준다. 청소년들에게 문학책이라면 으레 진지하고 지루하고 정신적인 무언가를 다룬다고 여겨질 수 있을 텐데, 이 책의 표지와 삽화는 문학을 둘러싼 무거운 환상들을 거둬내고 있다. 이런 점이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였을 것 같다. 또 완득이의 아버지는 난장이이고 어머니는 외국인 노동자인데, 실제로 이런 가정이 있다면 완득이네 집처럼 건강하고 밝게만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완득이』는 독자들이 보기 싫어하는 불편한 이미지들을 걷어내고, 익숙한 서사와 인물을 통해 안정감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런 면들 때문에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박 진 | 『완득이』가 1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서 청소년문학의 한 모델을 제시하는 모범적인 작품인 건 분명해 보인다. 이에 비하면 『위저드 베이커리』는 그리 전형적인 청소년문학은 아니다. 판타지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마법과 시간여행이란 모티프가 제공할 수 있는 소망충족의 판타지를 뒤집는 점이 인상적이다. 세 작품 중에서는 교훈성이 비교적 약한 소설이기도 하고. 두 분에게 이 소설은 어땠는지?
김남혁 | 마법이 서사적 흥미를 유도하고, 마법에 대한 성찰이 서사의 빠른 진행에 무게추를 달아준다. 이 소설은 현실의 고통을 마법으로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마법은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게 한 방법적 선택이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서사 전개방식과 주제가 『위저드 베이커리』의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근데 이 소설에서 아쉬웠던 점은 결말부분이다. 마법을 사용한 경우(Y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N의 경우)에 놓인 주인공이 상당히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Y의 경우’에 나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견을 떳떳이 주장하고, 마법을 사용해서 현실의 고통을 피해간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 ‘N의 경우’에 나는 환상을 거부하고 현실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용기를 획득한다. 두 경우에 놓인 인물이 다 어떤 성장을 하게 되는데, ‘Y의 경우’와 ‘N의 경우’가 좀 더 분명히 대비됐다면 좋았을 것 같다.
박 진 | 두 경우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게 오히려 이 소설의 개성이자 장점일 텐데? 김남혁 씨는 두 경우에 다 주인공이 성장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내가 보기엔 둘 다 힘들고 별 볼 일 없는 상황이라는 게 더 중요할 듯하다. 마법을 쓰든 그렇지 않든 장밋빛 미래 같은 건 펼쳐지지 않고, 양쪽 다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메시지라면 메시지일 것이다. ‘Yes’냐 ‘No’냐, 어느 쪽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Yes’와 ‘No’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우선 중요할 것 같다. 전에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야 했고 이런 삶을 왜 견뎌야 하는지 그 의미조차 몰랐다면, 이제는 자기 앞에 어떤 선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서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지만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고 그래도 견뎌나갈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주인공이 조금은 성숙해지는 게 아닐까?
김남혁 | 그런가? 나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쓰기를 포기하고 현실의 문제를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라는 얘기로 이 소설을 읽었다.
박 진 | 그럼 너무 심하게 교훈적이 되지 않나? (웃음)
김남혁 | (웃음) 왜 그렇게 잘못 읽었지?
소영현 | (웃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나도 박진 씨 의견에 동의하는데, 이 소설은 사실 그렇게 흡인력 있는 작품은 아니고 균형 감각도 떨어지는 편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과도하게 무겁고 폭력적이며, 그래서 어떤 면에서 경직된 이분법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른의 세계와 청소년의 세계가 권력의 위계 구도 속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쪽과 일방적으로 그 폭력에 희생되어야 하는 쪽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 정도 미덕을 찾을 수 있겠는데, 그 하나가 바로 지금 얘기한 결론 부분이다.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은 별다르지 않다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관적인 세계관이다. 마법을 써도 네 인생은 달라지지 않고 어차피 청소년기라는 건 그렇게 우울한 거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거의 ‘죽지 말고 살아나가자’는 게 이 소설의 메시지인 셈이다. 그러나 선명하게 대조되지 않는 결말 때문에 이렇게, 크게 보면 계몽적이지만 그 전형성을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박 진 | 그럼 다른 한 가지는?
소영현 | 또 하나의 미덕은, 보통 청소년문학이 청소년을 세대 개념으로 묶으면서 청소년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취급하는데 비해 이 소설은 그 안에 계급의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갈등이 고조되는 동안에만 집중적으로 드러나서 좀 아쉽기도 한데.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 주인공은 집을 뛰쳐나가지 않고 끔찍한 부모와 가족을 견딘다. 이런 행동은 그 아이의 성격이라기보다 교양 있는 중산층 집안의 아이로서 안온한 자기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과 연관된다. 이건 일종의 체념이면서 타협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가족과 살고 있는 모든 청소년이 그런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계급적 정체성을 가진 중산층 청소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건, 미약하긴 하지만 청소년을 세분화해서 조명하고 있는 걸로 볼 수 있고, 이 점이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박 진 | 좋은 지적이다. 사실 이 소설은 소영현 씨 말대로 서투르고 거친 면이 많고 『완득이』에 비하면 절대로 잘 쓴 소설이 아닌데, 그래도 나는 『완득이』보다 솔직히 이 소설에 더 끌리는 편이다. 근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청소년에게 추천하기는 좀 꺼려진다는 점이다.
김남혁 | 왜 그런가?
박 진 | 왜냐하면… 이 소설은 재혼가정 문제와 가정 내 성폭력 문제라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 상황을 다루고 있는데, 소재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걸 다루는 방식이 너무 냉담하거나 무책임한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 상처를 가진 청소년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완득이』와는 정 반대의 문제인 건데… 『완득이』가 너무 건강하고 상처를 상처 같지도 않게 그려서 고민할 지점을 그냥 무마해버린다면, 『위저드 베이커리』는 상처를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대하는 게 아닐까, 상처를 덧내거나 편견을 가지게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이게 바로 교육 전문가들이 집중하는 문제일 텐데, 교사 분들 생각은 아마 나보다 훨씬 더 완고할 것이다. 이런 게 청소년 문학에서 피해가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소영현 | 정말 어려운 얘기다. 『완득이』에 대해서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과되지 않은 ‘욕’에 우려를 표명하는 ‘어른’ 독자들도 있는데, 이런 건 좀 지나치게 청소년을 보호와 규제의 대상으로 다루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내 생각에 창작의 측면에서는 어떤 청소년문학도 나올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작품을 청소년에게 권할 것인가, 권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층위에 있는 것 같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같은 게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박 진 | 중요한 지적이면서도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우려도 든다. 지금도 초등학교 5학년용, 6학년용 하는 획일적인 분류나 교과서용으로 부적합한 문학작품들, 예를 들면 주인공이 자살해도 안 되고 엄마가 죽어도 안 되고, 너무 폭력적이어도 안 되고 분위기가 어두워도 안 되고 하는 기계적인 기준들이 존재하는 상황인데, 청소년문학에도 그런 식의 가이드라인이 생기면 안 될 테니까. 교육적 효과라는 말을 너무 좁은 의미로 생각하지 않고 문학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가이드라인이란 말은 어감이 좀 그렇고, 청소년문학 비평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어떨까? 섬세한 감수성과 문학적인 안목으로 청소년문학을 비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소영현 | 그렇다. 지금도 청소년문학 평론가들이 새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하는 비평이 아직까지는 내용 요약이나 소재 분석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더 전문적이고 수준 높은 청소년문학 평론가들이 나와 줘야 하는 상황이다. 필요하다면 문학평론가들이 청소년문학에 더 관심을 갖고 비평적으로 개입하는 일도 의미가 있겠다. 김남혁 씨가 한번 해보는 건 어떤가? (모두 웃음)
박 진 | 좋다. 이제 『싱커』로 넘어가자. 김남혁 씨는 이 소설을 어떻게 읽었나?
김남혁 | 내가 독자로서 등장인물들과 잘 ‘싱커(동조)’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나는 이 소설이 가장 지루했다. (웃음) 『싱커』에서 거슬리는 지점은 선과 악, 싱커와 바이어옥토퍼스, 아이들과 노인, 아군과 적군의 대비가 너무 선명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물들의 성격 또한 단선적으로 나타난다. 선한 자들은 계속해서 선하고, 악한 자들은 계속해서 악하게 그려진다. 문명과 자연의 대립도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희디흰 세계’와 바이오옥토퍼스가 세상의 온갖 쓰레기와 바이러스를 청소하고 구축한 시안의 세계가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두 세계 모두 자신들의 이상과 어긋나는 것들을 배제하고 구축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박 진 | 깊이 있는 소설은 물론 아니고, 장르소설로 봐도 무척 전형적이고 뻔한 측면이 있다. 상당히 계몽적인 소설이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그 교훈들에 흥미로운 면이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노회한 세계에 사는 ‘늦둥이’들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을 꾸고 그 꿈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은 기존의 가치체계를 그대로 물려주고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하는 방식의 교육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의 정치적인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강하게 나타나고. 이 소설은 또 공권력의 문제, 환경과 생태 문제, 폭력의 문제, 사이버 세계의 윤리 문제 등 꽤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을 계기로 청소년들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말고도 이런 폭넓은 사회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면, 괜찮은 청소년문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영현 | 기본적으로 다 동의할 수 있는 얘기들이고, 이 정도면 꽤 잘 쓴 소설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김남혁 씨 얘기와도 통하는 문제지만, 나 역시 원시적인 순수 자연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읽는 내내 좀 불편했다. 지금 청소년들에게 원시성에 대한 그런 동경이 과연 있을지, 청소년들이 이 소설의 그런 면에 공감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의미들은 아마도, 이런 소설을 청소년에게 읽히고 싶은 어른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박 진 | 그럴 수 있겠다.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을 건지 생각해보면 나도 좀 회의적이다.
소영현 | 내가 작품성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완득이』에 주목한다고 말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싱커』는 게임이라는 소재조차도 너무 문학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에 비해 『완득이』는 청소년들의 문화적인 감각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들이 이 소설에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완득이』의 감수성은 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문화 주체, 즉 문화의 소비자일뿐 아니라 생산자이기도 한 프로슈머로서의 십대의 가능성을 흡수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남혁 | 수상작 세 편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앞으로 등장할 창비 청소년문학상 작품들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이 세 편의 소설은 모두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그들이 정말 실감 있게 그려지기보다는 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겠다는 거리감 같은 게 느껴진다. 장르적 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완득이』가 현실적으로 보이긴 해도, 실제 청소년들의 삶은 이렇게 밝기만 한 게 아니라 더 답답하고 어둡지 않을까? 이들이 무엇 때문에 답답해하는지, 이들의 내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박 진 | 그런 면에서는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이 쓴 『우아한 거짓말』이 청소년들의 삶에 더 밀착돼 있는 것 같다. 이건 따돌림 문제를 다룬 소설인데, 가해자나 피해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따돌림과 심리적 갈등을 정말 잘 포착한 느낌이다. 문학성이나 밀도는 좀 떨어지지만, 김남혁 씨가 지적한 맥락에서 의미 있는 청소년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소영현 씨도 추천해주고 싶은 다른 청소년소설이 있는지?
소영현 | 이경자 선생님의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소설이 있는데, 자살한 친구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얘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더듬어가는 이야기다. 특히 연애감정이 아닌 이성 친구, 진짜 ‘그냥 친구’사이를 그려낸 게 흥미롭다. 자기들은 서로 좋아하는 애가 따로 있고 그런 얘기를 서로 다 나누는 사이인데, 어른들은 집에 놀러 가면 ‘방문 열어놓고 놀아라’ 그러면서 왔다 갔다 하시고…(웃음) 이런 게 정말 우리도 예전에 느꼈던 청소년들 자신의 감수성인 것 같다. 김해원 씨의 『열일곱 살의 털』도 괜찮은 청소년소설이다. 이 소설은 두발자유에 대한 건데, 모범적인 헤어스타일을 가진 모범생 아이가 머리 잘리는 장면을 보게 되면서 난생 처음 반항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틀 속에서도, 그 반발심이나 심리 변화가 무척 설득력이 있게 묘사돼 있다.
박 진 | 김남혁 씨는 또 어떤 소설이 좋았나?
김남혁 |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김사과의 『미나』가 좋다. 이런 소설을 청소년한테 읽히면 안 된다고 하는 의견도 있겠지만, 『미나』는 친구들의 우정에 얽혀 있는 권력 관계, 계급의 문제 같은 것을 무척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박 진 | 내 생각에 『미나』는 리얼리티 때문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심리적 이유로 친구를 죽이게 되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소설인 것 같다. 이렇게 청소년들이 겪는 갈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조명할 수 있다는 건 청소년문학이 지닌 중요한 가능성이 아닐는지?
소영현 | 좋은 지적이다. 아까도 비행청소년들을 다룬 청소년문학에 대해 잠깐 말했었지만, 그들의 일탈은 결과일 뿐이고 그 결과를 낳은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이거나 우리 사회의 문제일 수 있다. 청소년문학은 이 문제를 충격적인 소재로만 다루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을 매개 고리로 해서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 이것이 청소년 문학의 저변이 확대되고 더 보편적인 문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아닐까 한다. 또 그렇게 해야만 집, 학교, 아니면 제도 바깥의 버려진 아이들이라는 세 가지의 뻔한 공간을 넘어선, 더 다양한 청소년문학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이건 『미나』 같은 소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도 만날 수 있는 문제다. 청소년문학을 하시는 분들은 『미나』는 절대로 청소년문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청소년을 통해서 이렇게 사회 문제를 다룰 수 있다면 청소년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구분은 사실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박 진 | 정말 중요한 얘기를 해줬다. 청소년문학이 성장소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성장소설에는 바람직한 성장을 이루는 얘기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