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규 | 지난달엔 시간들이 잘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야간 좌담’을 해야 했는데, 어느덧 종강을 하고 이번엔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만났다. 오늘 <비평테이블>에는 신경숙의 소설이 놓여 있다. 최근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하 『어나벨』)가 출간되면서 신경숙 소설의 대중적 파급력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는데, 그 원인과 의미에 대해 토론해보는 시간이다. 먼저 신경숙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이랄까, 그런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김남혁 | 신경숙 하면 말줄임표를 많이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문체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에는 대체로 어떤 문제라든지 사태에 대해 단호히 결정 내리지 못한 채, 주저하고 돌아가고 머뭇거리는 인물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런 인물들은 큰 것보다는 작은 것에 연연하고 또 그 작은 것에 크게 상처받는다. 사람들과 쉽게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는 인물들이 기억에 남는다.
박 진 | 내 경우에는 신경숙 소설이 잘 안 읽히는 편이다. 답답하게 늘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연민이나 미련 같은 감상적인 정서들이 페이지들마다 덕지덕지 묻어있는 느낌이랄까. 『외딴방』은 비교적 의미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열여섯 살, 열일곱 살의 ‘나’에 대한 감상적인 자기연민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어서 읽기가 좀 거북했다.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경우에는, 엄마가 죽은 뒤 새가 되어 말하는 부분부터는, 사실 참고 읽기가 좀 힘들었다. (웃음)
장성규 | 개인적인 얘긴데 중학교 때 어머니가, 왜 아파트 부녀회에 마을문고 같은 것 있지 않은가? 거기 가서 이거 좋은 책이래, 하시면서 읽어보라고 빌려다 주신 책이 『풍금이 있던 자리』였다. 처음에는 오호, 이거 불륜 얘긴데,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웃음) 처음 읽었을 때 신경숙 특유의 서간체 형식의 가늘게 이어지는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개인적인 체험은 문학 공부한다고 하면서 부모님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는데, 그 유일한 예외가 신경숙인 듯하다.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경우는 나보다 어머니가 먼저 읽으셨다. 이런 것들이 대중적인 신경숙 신드롬을 실감하게 해준, 내게는 중요한 인상으로 남는다.
김남혁 | 신경숙 하면, 장성규 씨도 언급했지만, 일단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단순히 여성의 수동성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정직한 욕망을 이야기하고, 그러면서도 그 욕망을 추구할 때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들(소설에서 그 남자의 아내)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이야기로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그 남자와 한국을 떠나는 것을 단호히 결정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 남자를 가정에 보내 줘야하나 주저하다가, 결국 작품 말미에 가서는 이러한 판단도 주인공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수동적인 여성이고 모든 일에 주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단순히 결단력이 없는 여자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과 타인이 의존하는 제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욕망과 제도 사이에서 손쉬운 이분법을 작동시키지 않는 장면에서 주인공 여성의 윤리적인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박 진 | 그렇게 머뭇거리게 만드는 건 사실 과잉된 정서이기도 하다.
김남혁 | 박진 씨가 말한 정서의 과잉은 분명 신경숙 작품에 존재하는 부분이다. 예컨대 『바이올렛』같은 작품은 정서의 과잉 외에 남는 의미가 적은 것 같다. 반면 『풍금이 있던 자리』나 『외딴방』 등의 작품은 그런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읽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 본다.
장성규 | 자연스럽게 신경숙의 초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신경숙 소설의 원형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 외에, 또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있는지?
박 진 | 나는 『외딴방』에 좀 더 주목하고 싶다. 단순히 소재적으로 노동문제를 다뤘다거나, 한 여공의 성장 이야기라는 측면보다는, 이것이 자기 글쓰기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소설에서 ‘외딴방’은 여공들이 살던 쪽방처럼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 시절의 기억이 ‘나’의 생애에서 부자연스럽게 고립된 시기임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학교를 졸업하고 쪽방을 빠져나온 뒤 ‘나’의 글쓰기가 그들의 삶을 전혀 끌어안지 못했다고 하는 자각을 담은 말이기도 하다. ‘나’는 한때 공장에 다니긴 했지만 정말로 그들 속의 한 명이었던 건 아니고, 결국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 소설은 노동자 소녀의 성장 이야기라기보다는, ‘나’의 글쓰기가 그들 계급의 삶을 철저히 배제해왔다는 죄책감과 자기반성을 통해 작가인 ‘나’가 변화를 겪는 성장소설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소설 속의 ‘나’를 곧바로 작가 신경숙과 동일시하거나, 이 작품을 계기로 신경숙의 이후 소설이 실제로 변화했다고 판단하는 건 너무 단순한 해석이겠지만.
장성규 | 나는 박진 씨가 말해준 점들과 관련해서, 사실 불편함을 좀 많이 느꼈다. ‘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자의식을 강하게 표출하면서도 왜 굳이 그런 배경 설정을 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7,80년대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를 자신의 글쓰기와 길항하는 사회적 문제의식으로 차용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가 희재 언니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산업화 시대에 대한 추도의 글쓰기라는 자의식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정작 그 글쓰기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외딴방』이 이런 면에서 전작과 크게 구별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김남혁 | 『외딴방』에서 셋째 오빠가 군사정권과 유신정권을 문제 삼는 소설을 쓰라고 권하자, 주인공은 그런 사회 문제보다는 그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 쓰려져 있지 않았는지 하는 개인의 문제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부분이 『외딴방』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신경숙답게 개인의 내면에 섬세히 접근하는데, 그러한 접근이 단지 개인 속에 함몰되지 않고 사회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장성규 |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지?
김남혁 | 신경숙 소설이 사회 제도의 문제를 말할 때 그 출발점은 개인이지 사회가 아니다. 개인의 문제를 섬세히 읽다보니 사회의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외딴방』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글쓰기’이다. 신경숙 소설은 사회 제도의 부당함으로부터 1인칭 ‘나’를 지켜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고, 그 방법으로 끊임없이 글을 쓰고 기억을 더듬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글쓰기를 통한 기억의 복원은 항상 한계가 있고 불완전하다는 인식이 『외딴방』의 기법이나 화자의 발화를 통해 나타난다. 이 소설에는 글쓰기와 기억을 통해서 1인칭 ‘나’를 지켜낼 수 있다는 신념과 이런 방식 자체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공존한다. 개인에서 출발해 사회적인 문제까지 드러내고, 사회로부터 개인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글쓰기와 기억을 사용한 셈인데, 나는 이런 자의식이 좋았다.
장성규 | 의견은 좀 엇갈리지만,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외딴방』까지 신경숙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얘기들이 나왔다. 다음 순서는 아마도 『엄마를 부탁해』가 될 것 같다. 작년 출판시장에서 이 소설이 문학 부분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아닌가 싶은데? 아직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있고.
김남혁 | 김훈의 소설이 아버지를 생각하게 한다면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단순히 엄마에 대한 최루성 소설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신경숙이 항상 어떤 제도에서 출발하지만 억압적 제도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타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라든지 타인에 대한 책임감, 이런 것들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엄마를 부탁해』 역시 엄마에 대한 신화화된 모성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함께 가져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박 진 | 나는 이 작품에서 엄마가 과연 어떤 욕망을 지녔는지 의문이다. 이웃 남자에 대한 얘기라면, 사실 둘은 별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그 집 갓난아기가 굶어 죽어갈 때 젖을 물려준 걸 계기로 말벗이 되었으니, 모성의 확장이라 보는 게 더 어울릴지 모르고. 엄마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아이들을 위해 가정을 지켜냈고, 호감이 가는 남자가 생겼어도 일탈을 하거나 선을 넘지 않았다. 그게 과연 자기 욕망을 지닌 여성의 모습일지? 이 소설에서 부각되는 건 역시 엄마의 숭고하고 헌신적인 희생이고, 그래서 자녀들은 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죄책감은 심지어 달콤하기까지 하다.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하지만 내 엄마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몸바쳐주었으며, 그러고도 도리어 우리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는 존재로 그려지니까. 이렇듯 완벽하고 선량한 희생자에 대한 판타지와 향수 어린 그리움이 온 국민을 감동시켰다니, 『엄마를 부탁해』 열풍은 상당히 께름칙하다.
김남혁 | 『엄마를 부탁해』에 그런 낭만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경숙의 소설은 꼭 엄마가 아니더라도 타인을 무한하게 위로해주고,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그런 공간이라든지 인물을 항상 희구한다. 그런 측면에서 엄마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박 진 | 그렇지만 모성의 신화가 지닌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절대적 희생을 숭고하게 만들어 신비화하는 것은 보수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단적인 표현이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단지 한 가족 안에서의 여성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가족 이데올로기가 확장되면 얼마나 폭력적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단순히 엄마-여성의 희생을 신비화하면서 가부장제의 억압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생물학적인 모성애에 대한 강조와 혈연주의적 배타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가족의 테두리를 불가침의 영역으로 신성시하고 이질적인 다른 존재들과 다른 집단들을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족주의가 확장되면 집단을 위해, 사회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한다는 전체주의 논리와도 통할 수 있다.
장성규 | 박진 씨도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어머니의 딸인데 이렇게까지 말할 줄이야… (웃음)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의 모성은 대중의 심성과 연결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남혁 | ‘엄마’는 사실 보편성을 가진 주제이지 않나? 특정 시대와 장르를 넘어서 대중이 호응할 수 있는 주제다. 또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도 장이 분리되어 있다. 엄마와 다른 삶을 사는 작가인 딸,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장남, 아내에게 항상 의지했던 남편, 엄마가 유령이 된 후 진술되는 한 여자로서의 엄마. 이렇게 각기 다른 인물들이 엄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성별과 연령의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입장에 맞추어 작중 화자에게 동일시 할 수 있다. 이런 보편적인 주제와 화자를 교체하는 형식이 『엄마를 부탁해』의 대중적 성공을 이끌어낸 원인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장성규 | 지금 김남혁 씨가 한 얘기 중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어떤 위치이건 간에, 인칭을 ‘너’로 호명하는 효과를 내면서, 딸, 아들, 남편 각각의 위치에서 어머니의 모성이랄까, 이런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기법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분리된 장 속에서 다른 인물에 의해 서술되는 어머니가 각각의 시점에 따라서 다른 존재로 나타나는가? 오히려 다 똑같은 모성 이데올로기의 체현자로 서술되는 것은 아닌가? 만약 나와 오빠와 동생과 아버지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어머니를 봤다면 다른 어머니, 내가 못 봤던 어머니들이 드러나서 좀 더 입체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타자의 시점이 끝에 가서는 모두 숭고하고 희생적인 어머니 상으로 귀결되는데, 이건 결과적으로 작품의 통속성을 강화시키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나는 다른 시점 자체가 너무나 똑같은 발화로 귀결되면서 다른 어머니 이야기의 가능성은 아주 배제된다고 느꼈다.
박 진 | 동의한다. 결국은 서로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엄마의 모습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화자가 교체되거나 시점이 이동할 때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없는 채로, 오히려 하나의 관점을 더 확고하게 강화해 나간다면, 한 서술자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방적인 이야기가 되고 만다. 이 소설에서는 서술의 초점이 교체되는 방식이 텍스트를 다성적이 아니라 오히려 단성적으로 만들면서 매우 권위적인 방식의 발화로 변질되고 있다.
김남혁 | 솔직히 『엄마를 부탁해』는 비평적으로 개입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감정적으로 많이 이입하다 보니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이 그렇게 비판만 받을 작품인가? 지금 두 분이 말한 시점의 방식 같은 경우도 질문이 가능하다.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고 돌아가셨다. 그랬을 때 과연 각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엄마를 입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과 무관한 과거를 기억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물론 그때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 더 숭고해진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 각각의 화자들은 엄마가 없었으면 가족 자체가 해체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점이 보다 핍진한 개연성을 살리는 구성이라고 본다. 물론 엄마의 모성이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강조되다보니까, 가정 밖의 타자들에게까지 그런 무한한 애정이나 환대가 확장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 타자에 대한 어머니의 환대가 꼭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굶어 죽으려는 이웃집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장성규 | 김남혁 씨 말대로 사실 『엄마를 부탁해』는 다들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서 공감을 얻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 작품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는 효도해야겠다는 거고… (웃음) 또 하나는 ‘아니 이게 왜 많이 팔렸지?’라는 의문이었다.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경우에는 뻔한 이야기고 어떻게 될지 모두가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모두가 왜 그렇게 열광을 했는지 이상하다. 이런 류의 얘기들은 TV 드라마에도 항상 나오는 거고 라디오에서도 이런 류의 체험수기 같은 것을 항상 읽어주는데, 이 소설은 왜 이렇게 폭발적이었을까?
박 진 |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는 게 너무 힘겨운 세상에서 엄마의 사랑과 같은 무조건적인 위로와 보살핌을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대중적 필요 때문에 『엄마를 부탁해』는 놀라운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벽하고 절대적인 모성은 현실에는 없다. 『엄마를 부탁해』는 부재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 상실한 것으로 만들고,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완전한 모성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잠시 후 얘기할 『어나벨』과도 연결되는 부분인데, 신경숙 소설은 이제는 없는 것에 대한 향수, 그러니까 복고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경향이 짙다. 지금 우리 시대는 잃어버린 게 너무 많지 않나? 찬란한 청춘도 잃어버렸고, 혁명도, 문학도 잃어버렸다. 부재하기 때문에 회고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을 애도의 형식으로 전유하여 위로를 삼으려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엄마를 부탁해』가 굉장히 잘 활용했다고 본다.
김남혁 | 실제로 신경숙의 작품들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지점들이 많은 것 같다. 방금 박진 씨가 말한 엄마라든지, 모성성, 문학 등등에 대해서… 그런데 신경숙 소설은 그런 낭만적 과거를 현실에서 재현할 수 있다는 식의 낙관론을 펴지 않는다. 『어나벨』을 예로 들면, 이 소설은 타자와 낭만적으로 연대하는 것에 대해 시종 조심스럽다. 미래 누나와 미루와 명서가 한 집에서 살던 때는 이들에게 가장 좋았던 옛 시절이다. 미래 누나가 죽자 명서와 미루는 말 그대로 미래를 잃게 된다. 이때 이 소설은 미래 누나의 빈자리를 단순히 정윤이 채워서 낭만적인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상처 입은 타자와 연대하는 방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낭만적인 과거는 언젠가는 복원돼야 할 미래의 이상이지만, 성급히 복원될 경우 그들은 다른 타자들과 연대하지 못한 채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성규 | 이야기가 『어나벨』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같다. 먼저 전작과의 차이점이 있는지 묻고 싶은데?
박 진 | 글쎄, 멜로드라마풍의 연애소설이라는 점? 물론 『깊은 슬픔』도 있었지만.(웃음) 사랑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흠이 되거나 할 건 없는데, 이 사랑 이야기는 너무 낭만적이고 뭔가 공감이 되질 않는다. 우선 인물구도부터가 그렇다. 명서와 미루, 정윤과 단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영혼의 짝’인데, 태생지에서 같이 자라면 떨어져 있어도 끊을 수 없는 영혼의 파트너가 되는 건가? 이것도 상당히 비현실적인데, 더구나 두 커플이 똑같은 구도와 상실의 체험을 반복한다는 게 너무 도식적으로 느껴진다. 또 미루를 잃은 명서, 단이를 잃은 정윤은 그 고통마저도 쌍둥이처럼 서로 닮아 있는 운명적인 상대로 묘사된다. 이런 식으로 명서와 정윤의 사랑을 필연이나 운명처럼 묘사하는 것도 꽤나 어색하고 작위적이다.
장성규 | 사소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미루와 정윤이 지나치게 쉽게 친해지지 않나? 사실 미루하고 정윤은 친해질 수 없는 관계 아닌가? 둘이 친해지면 당연히 명서를 놓고 라이벌 관계가 되니까… (웃음)
박 진 |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미루와 단이의 죽음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미루의 언니 미래의 죽음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실제 미루의 죽음은 미래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미루는 언니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 하지만, 명서?정윤과 함께 살 수만 있었다면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행복했을 것처럼 묘사돼 있다. 그들이 함께 살기로 약속한 집을 부모가 팔아버린 뒤에 좌절한 미루가 죽게 되는 거니까. 미루의 죽음이 전체 이야기 속에서 미래의 죽음과 이어졌으면 정말 상처로 느껴졌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잘 와 닿지가 않는다. 단이 역시 군 생활에 회의를 경험하지만 그럭저럭 잘 견뎌오다가 ‘유일한 탈출구’였던 정윤에게 거절당한 뒤 총기사고로 죽게 된다. 이 죽음은 마치 군 의문사처럼 서술돼 있지만 정황상 자살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이는데, 면회 온 여자친구가 ‘하룻밤’을 허락하지 않은 것 이외에는 자살의 동기를 찾기 어렵다. 단이의 자살이 이렇게 애매하게 처리된 것을 의문사 문제로 보이게 하고 마치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굉장히 불편할 뿐 아니라 사랑이야기로서의 공감도 약화시키는 것 같다.
김남혁 | 설득력 있는 말이다. 그런 점에 거부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좋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고 본다. 그 지점을 크리스토프 이야기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엄마를 부탁해』와 크게 주제적으로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엄마를 부탁해』의 서사가 엄마의 실종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어나벨』은 윤교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앞의 소설이 사라진 엄마를 이해하는 것을 주제로 삼는다면, 뒤의 소설은 윤교수가 말했던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주제로 삼는다. 크리스토프 이야기가 요구하는 실천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사라진 엄마를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장성규 | 크리스토프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게 신학적인 얘기라서 조심스러운데, 솔직히 윤교수가 크리스토프 얘기를 꺼냈을 때는 ‘80년대적인 상황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지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퇴임하고 더 이상 제자를 가르칠 수 없는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정윤이나 명서나 지금 시대에 글을 쓰는 나는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하는데, 이야기가 그런 측면으로 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인물들은 그냥 툭 던져진 채로, 실제로 하는 일은 서울을 배회하는 것 이상이 아니지 않나? 이런 인물들은 실체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말을 바꾸면 크리스토프 얘기도 나오고, 사회적 문제도 삽입되고, 서사 구성에서 갈색노트와 같은 여러 장치들이 동원되는데, 이게 소재 차원에만 국한된 채 작품을 끌어가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박 진 | 작품 안에서 크리스토프 얘기가 상당히 핵심적인 대목인 것처럼 등장하지만, 사실 별로 구체적이지는 않다. 온 세상을 짊어지고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좀 모호하고. 굳이 얘기하자면 결국 구원의 문제일 텐데, 크리스토프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구원되는 자이면서 구원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게 신경숙의 문학론과 통할 수 있겠는데, 문학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거나 문학을 통해 함께 구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바람 같은 게 담겨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문학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듯한데… 이런 경향은 윤교수가 학교를 그만두는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윤교수는 사직을 하면서 동료들이 해직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거나,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학교를 떠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온갖 폭력적인 말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더 이상 ‘말에 대해 말을 하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나는 돌아가서 필사적인 사명감으로 시를 쓰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학교를 그만둔다. 차라리 그가 이런 시대에 더 이상 글을 못 쓰겠다고 말했다면 나로서는 좀 더 공감이 갔을 것 같다. 결국 오직 ‘시를 쓰는 것’만이 폭력적인 말들에 대항하는 행위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이 역시 크리스토프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가치를 그 자체로 절대화하고 이상화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장성규 | 자연스럽게 신경숙의 문학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좋겠다. 김남혁 씨의 의견도 듣고 싶다.
김남혁 | 나도 박진 씨의 지적처럼, 문학에 대한 신경숙의 자의식이 펼쳐질 때 다소 낭만화가 과잉된다는 것은 동의한다. 개인적으로는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프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작은 핵이고, 소설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며, 더 나아가 신경숙의 문학관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프 이야기는 타자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명서의 <갈색노트1>에 기록된 강아지 이야기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길에 버려진 두 마리 강아지가 있다. 이들 중 한 마리는 앞을 보지 못한다. 이때 앞을 보는 강아지는 앞에 나서서 눈먼 강아지를 이끌지 않는다. 항상 “앞 못 보는 개를 먼저 앞세우고 지켜본다.”(52쪽) 세상을 볼 수 있는 자가 앞 못 보는 타자를 제도의 정해진 길로 안내하는 게 아니다. 상처 입고 보지 못하는 타자가 자기 나름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다가 타자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언제든 달려가 도와주는 방식, 이 방식이 바로 타자에게 먼저 ‘내가 그쪽으로 갈게’라고 말하는 방식이고, 크리스토프가 등에 업은 자와 크리스토프가 서로에게 하느님이 되는 삶의 방식이다. 이 소설에서 정윤과 미루는 모두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큰 상처를 입은 눈먼 강아지라고 할 수 있다. 엄마와 단이와 사별한 정윤, 미래 누나와 사별한 미루, 이들에게 값싼 동정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이들을 모른 척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소설이다.
장성규 | 크리스토프와 관련해서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글 쓰는 예가 두 가지 등장한다. 하나는 명서가 갈색노트를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루가 먹은 음식들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이다. 신경숙은 그게 구원이 가능한, 그러니까 80년대적 상황 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글쓰기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진실들과 그 무게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먹는 음식을 일일이 쓰는 게 물론 미루 같은 거식증 환자에겐 중요한 일일 테고, 명서처럼 배회하는 인물에겐 사소하지만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사건들을 쓰는 게 중요한 일일 수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숨을 쉬게 할 수 있는 글쓰기 형식인가? 나는 이 부분이 신경숙 문학관의 한계라고 본다.
박 진 | 더구나 명서의 갈색노트는, 정윤이 알고 싶어 하는 얘기들, 정윤에 대한 명서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밖에 다른 얘기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 정윤에게나 독자에게나 너무 쉽게 명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궁금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좀 안일한 장치가 아닐까 한다.
장성규 | 그렇다. 갈색노트에서 특히 아쉬웠던 건, 분명 정윤과 명서의 캐릭터는 다르지 않은가? 정윤은 시골에서 올라와 어머니가 죽은 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명서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고민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학생운동에 가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갈색노트에는 명서가 가진 이런 고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노트에 정윤의 배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명서의 목소리가 좀 더 들어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런 둘의 차이가 너무 말랑말랑하게 서로 봉합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루가 쓰는, 자신이 먹는 것들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신경숙이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글쓰기 형식이 개인의 층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보편적인 층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김남혁 | 두 분이 단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했으니, 나는 이 소설의 미덕을 좀 더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소설을 괜찮은 청춘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청춘이라는 시기의 특성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청춘은 아마 사랑이 커지는 만큼 상처가 커지는 시기일 것이다. 청춘의 한 시기를 보내는 정윤의 경우도 그렇다. 미루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질수록, 미루를 이해하지 못했고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는 절망감은 정윤에게 점점 증대된다. 그 상처에 겁먹어서 애초부터 타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거나, 상처가 없다는 듯이 기만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또는 손쉽게 타인을 위로하는 것)을 이 소설은 반대한다. 상처를 예상하지 못하는 사랑의 순간도, 사랑을 기약하지 못하는 상처의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을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사랑에 스며있는 상처의 흔적을 기억하라고 말할 때 이 소설은 “어떤 이에게는 겸손한 힘을”주게 되고, 상처 이후에 도래할 사랑을 다시 한 번 약속하라고 말할 때 “어떤 이에게는 견딜 힘을 주”(11쪽) 주게 된다. 이 소설은 타자와 함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하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상처를 은폐하지 않는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상처를 기억하기에 이 소설을 나는 청춘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박 진 | 그냥 눈부시기만 해서는 청춘이 아닐 것이다. 어둠과 방황과 상처, 죽음까지 포함해서, 그런 것들이 있어야 청춘은 비로소 낭만화된다. 그것들 없이는, 청춘은 충분히 아름답거나 충분히 매혹적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 소설에서 청춘의 상처들은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뭔가 절망적이고 절박한 상처를 가진 것으로 설정돼 있지만, 거기에 실체가 없는 것 같다. 특히 시대 상황과 연결된 부분들이 그렇다. 단적인 예로 미래의 분신은 어떤가. 미래는 처음에 발레를 하다가 미루 때문에 무릎을 다쳐서 못하게 되고, 이후 ‘발레만큼 사랑한 남자’를 만나 열정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우연히 그 남자가 ‘운동권’이었고, 하필 그는 미래를 만나러오던 날에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래는 청춘의 맹목적인 열정으로, 사랑하는 그 남자 때문에 분신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게는 자신을 ‘불사를’ 대상이 다른 무엇이어도 상관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민주화운동이나 사회 문제 같은 것이 낭만적인 사랑과 청춘의 분위기를 위해 소비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냥 무대장치나 소도구처럼 말이다.
장성규 | 나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왜 80년대로 설정됐는지 다소 의아스럽다. 『외딴방』은 부족한 대로, 당시의 노동운동과 자신의 글쓰기가 서로 배치되긴 하지만 그 두 가지를 치열하게 상호침투하게 만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왜 굳이 80년대를 배경으로 설정하고 80년대적인 향수를 자극하려 했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김남혁 | 『어나벨』에 등장하는 학생운동이 단지 소재적인 차원으로 활용됐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이유는 명서가 소설에서 입체적으로 부각되지 못해서 그런 듯하다.
박 진 | 맞다. 첫 번째 가두시위 장면은 정윤이 명서에게 처음으로 업혀서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했고, 미래의 분신도 미루에게 뭔가 절망적인 상처의 그늘을 드리우기 위해 동원됐고… 80년대적 상황을 이렇게 얄팍하게 이용한다면, 그런 문제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이 소설이 이런 소재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온 것 자체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인 듯이 간주되는 것은 참 씁쓸하다.
장성규 | 동의한다. 그런데 소재적 장치의 한계가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그 장치를 썼는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박 진 | 아까 말했듯 향수는 그리워하는 대상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이 소설은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역시 지나간 한 시절의 추억으로 회상하고 있다. 사회를 변혁하려는 용기나 투쟁은 추억으로만 남아서, 낭만적 사랑이나 청춘의 방황과 어우러진 그리움의 풍경으로나 등장하는 건데… 이건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본다.
장성규 | 청춘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웃음) 왠지 청춘이라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사랑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고, 혁명에 대한 지향이 있어야 하고. 나는 이 소설에서 무척 난감했던 것이 회고라는 문제였다. 만약 80년대의 그 체험이 작중 인물들에게 중요한 원체험이 되었다면, 작품의 현재 시점에서 그것을 회고할 때, 단순하게 옛날에 그랬지가 아니라,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와 관련된 해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정윤의 경우에는 그런 단서 자체가 아예 텍스트에 기입되지 않았고, 사진작가가 된 명서의 경우에도 딱히 원체험을 살리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삶에 대한 의지 같은 것들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의 80년대적 회고가 2000년대 초반에 한창 유행했던 체게바라 열풍과도 비슷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설정이 상당히 불편한데, 뭐랄까, 80년대라는 표상이 고정화되고 박제화 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런 불편함을 가져왔을까? 나는 『외딴방』에서 보여준 부족한 대로의 긴장감이 『어나벨』에서는 완전히 소재의 차원으로 전락하면서, 중요한 문제들을 상업적인 측면으로 끌고 간 것은 아닌가 싶다.
박 진 | 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은 충분히 낭만적이고 충분히 비극적이고, 게다가 시대 현실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포장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청춘의 고뇌나 낭만적인 사랑과 더불어 80년대 시대 상황까지 말해주는, 굉장히 진지한 소설을 읽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는 그냥 좀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읽는 것보다 훨씬 큰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그걸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사실이다.
장성규 | 좋다.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보자. 작품과 관련해서 한국형 청춘소설 이라는 말도 나왔던 것 같다. 아직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단평 형식이나 마케팅 측면에서 이런 타이틀이 나왔는데, 이 작품을 한국형 청춘소설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을까?
김남혁 | 청춘소설이라는 표현은 작가 후기에도 쓰인 표현이다. 박진 씨도 지적했듯이 신경숙 소설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가 있다. 청춘이라든지, 문학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드러내는 방식이 나는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청춘의 사랑에 대한 열망을 그려내면서도 그게 불가능해지는 지점, 사랑의 열망과 사랑의 그늘을 같이 그리려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박 진 | 청춘에 대한 향수는 단지 지나간 젊은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건 2000년대의 현실과 결부된 문제인데, 사실 이 시대에 청춘이 어디 있는가? 다들 취업준비생이고 잠재적인 실업자인데. 지금은 던지고 불태울 청춘이 없지 않은가? 최근 들어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회고형 청춘소설이나 성장소설이 한 흐름을 만들고 있는데, 이 역시 이 시대에 부재하는 청춘을 향수로써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건 지금 여기의 젊은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회피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나벨』을 포함해서 그런 유형의 소설들이 한국형 청춘소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청춘소설을 쓰겠다면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빛나지 않는 청춘들 속에서 치열함과 에너지를 길어 올려야만 할 것이다.
장성규 |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박 진 | 아직까지 그런 소설들이 많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김주희의 『피터팬 죽이기』는 88만원 세대 젊은이들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넋두리와 냉소와 한탄에 머물러 있어 소설적 에너지는 약한 편이다. 이전 좌담에서 다룬 적이 있는 김기홍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이들의 암담함을 모호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모험담으로 처리하고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김혜나의 『제리』는 좀 더 주목할 만한 소설인 것 같다. 그 초라한 젊음의 절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소설이라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청춘의 회상이 아니라, 이런 청춘답지도 않은 청춘들의 이야기에서 한국형 청춘소설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장성규 | 동의한다. 이런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신경숙이 한국문학에서 대중적인 반향으로 따지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가인 건 분명한 것 같다. 물론 비판도 많이 있지만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현상의 원인이나 맥락 같은 것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김남혁 | 나는 신경숙 소설이 낭만적인 향수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작가 스스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고 본다. 이 소설은 지적으로 팽팽하게 하지는 않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 낭만적이라고 하면서 내버렸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않았나 생각한다.
박 진 |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신경숙 소설이 정서적으로 위로와 감동을 주고, 적당히 안락하면서도 진지한 얘기를 하는 듯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건 너무 안전한 선택이고, 또 지금 없는 것을 자꾸만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느낌이 든다.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회피하면서 안락한 만족감을 준다면,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에서 너무나도 멀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소설이 엄청나게 읽히고 있다는 이유로 좋은 문학작품의 모델처럼 된다면, 신경숙 신드롬은 결과적으로 우리 문학에 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이 한 권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소설이 훌륭한 문학의 전범처럼 간주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김남혁 | 신경숙 소설이 문학이란 이런 것 운운하면서 문학을 일반화시키는 건 아니지 않나?
박 진 | 이렇게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에 열광할 때 그런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실제로 꽤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부탁해』를 작년 최고의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평론가들까지 그렇게 얘기하지 않나? 신경숙의 경우처럼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소설이 이 시대의 문학을 살린다고.
김남혁 | 대중들이 양적으로 많이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학적 소통은 아닐 것이다.
장성규 | 두 분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 자리에서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신경숙은 분명 굉장한 대중적 반향을 얻고 있는 작가인데, 그런 만큼 더 큰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신경숙은 체험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작가인데, 문제는 신경숙 소설이 그 체험을 스테레오타입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고, 80년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다들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있겠지만, 신경숙 소설에서는 그 기억들이 어딘가 박제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신경숙 소설은 독자와 소통할 때 정형화되어 있는 과거를 호출하면서 위안과 안도감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작가가 읽는 사람들에게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그 이상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안전판을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신경숙 소설에 대한 문학 내적인 비판만큼 중요한 것은, 문학 외적인 요소들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일 것이다. 신드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도 오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못 다한 이야기들은 토론방을 통해 계속 이어가기로 하자. 오랜 시간 열띤 토론을 벌여줘서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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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
장성규
문학평론가.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문학과 현실의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해 관심이 많다. 리얼리즘의 급진적 재구성이라는 주제를 공부하려는 큰 ‘욕심’(만)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