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원 | 달력을 보면 분명 봄이고, 가방 대신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은데, 문을 열면 아직도 겨울이다. 오늘도 햇살 대신 비가 내리고 있다.
박 진 | 알고 있나? 오늘, 비오는 수요일이다. 빨간 장미가 생각나는.
서희원 | 난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같은 오래된 가요는 모른다. (웃음) 지금은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소녀‘시대’다. (웃음) 밖에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좌담은 진행해야 한다. 자, 일 하자. 이번 달 대상 작가와 작품은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 편혜영의 『재와 빨강』, 천명관의 『고령화가족』이다. 공교롭게도 세 작가의 세 번째 책이다. 2000년대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젊은’ 작가 이기호와 편혜영의 고대하던 첫 장편, 넘쳐나는 서사를 보여준 이야기꾼 천명관의 두 번째 장편이다. 아무래도 비평 활동 시기가 이들의 작품 활동 시기와 비슷한 박진 씨가 먼저 이 세 작가들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그 다음엔 남혁 씨가.
박 진 | 편혜영, 이기호, 천명관은 2000년대 젊은 작가, ‘새로운’ 소설의 대표주자다. 이들의 작품은 기존의 소설 문법을 교란하고 전복하는 파격적인 개성과 참신함으로 주목을 받았다.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은 시체들이 범람하고 역병이 창궐하는 그로테스크한 환상의 세계를,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기존의 담론 체계를 비틀고 조롱하는 발칙하고도 유머러스한 상상력을 보여줬다. 천명관은 또 어떤가. 『고래』는 이야기들의 ‘빅뱅’이라고 할 정도로 유기적인 서사구조에 아랑곳하지 않는, 말하기 그 자체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선보였다. 이들의 소설은 근대소설 이후의 소설을 예감케 하는 불온하고 발칙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김남혁 | 이기호 하면 나는 ‘시봉’이로 대표되는 비루한 인물들, 이런 인물들을 드러내기 위한 형식 실험, 이 두 가지가 생각난다. 파격적이고 유쾌한 형식 실험에 담긴 애잔함이라고나 할까. 편혜영은 높은 완성도의 단편을 선보인 작가다. 『아오이가든』이 일상의 이면에 우글거리는 유기된 시체와 부패된 사체 등을 보여준다면, 『사육장 쪽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답답한 일상의 표면을 보여준다. 천명관 하면, 당연히 『고래』가 떠오른다. 넘쳐나는 이야기의 힘! 장르들 간의 혼성적인 접속을 유도하며, 소설의 규범을 교란하고, 거대서사의 그늘 아래 가려졌던 작은 이야기들을 해방하던 그 힘이 생각난다.
서희원 | 두 분의 간략한 정리 잘 들었다. 이제 개별 작가에 대해 심도 깊게 말할 시간이니, 신작 장편과 이들의 기존 작품에 대한 흉중의 진실을 감추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먼저 이기호부터. 그의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로 시작해 2009년 말에 출간된 첫 장편 『사과는 잘해요』까지 가보자. 이런 방식으로 좌담을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 솔직하게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을 들고, 그 이유를 약간은 비평가적인 방식으로, 약간은 개인적인 방식으로 말해보자. (잠시 침묵)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겠다. 나는 이기호의 단편 중 「수인」을 가장 좋아한다.
박 진 | 나도 「수인」이 좋던데.
서희원 | 2005년으로 기억한다. 그때 문학을 계속 해야 하나, 한다면 정말 할 수 있을까 등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적어도 ‘문학’을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그러지 않아도 ‘문학’은 죽어간다는데. (웃음) 「수인」을 읽었을 때가 그즈음이었다. 「수인」에는 자신이 성장했던 국가라는 공동체가 붕괴한 후 스스로 소설가임을 증명해야 하는 인물이 나온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가 소설가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는 소설책이다. 존재의 슬픈 유물론이라고나 할까. 폐쇄된 대형서점으로 굴을 뚫고 들어가 어두운 서가에 앉아 라이터 불꽃과 함께 명멸하는 소설(책) 혹은 문학, 존재를 보여주는 장면에 완전히 매혹된 경험이 있다. 내 자신의 고민도 겹쳐지고. 물론 교보문고의 내부공사로 인한 폐쇄를 예언한 이기호의 직관도 빛났고. (웃음)
박 진 | 「수인」은 문학에 대한 이기호의 작가적 자의식이 담긴 수작이다. 소설을 쓰는 일도 수많은 직업과 노동 가운데 하나로 세속화되어버린 시대에,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곡괭이’와 한 몸을 이룰 때까지 노동을 해서 소설가로서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한편, ‘노동 없는 곳에 존재하는 소설들’의 신성한 지하무덤에 경의를 표한다. 소설쓰기에 대한 자기 성찰과 정직한 고백이 들어 있어서 나 역시 이 소설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기호 하면 떠오르는 그만의 색깔은 「최순덕 성령 충만기」, 「버니」,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과 같은 작품에서 더 잘 드러난다. 아무래도 이기호의 개성은 기존의 소설 문법을 조롱하는 파격적이고 유희적인 언어,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그럴 듯하게 만들어놓는 뻔뻔함이 아닐까 한다.
김남혁 | 나는 이기호의 소설론처럼 읽히는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보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더 좋아한다. 특히 「햄릿 포에버」, 「백미러 사나이」,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간첩이 다녀가셨다」에 담긴 이기호만의 색깔이 좋다. 이기호 소설 하면 수많은 시봉이들이 생각난다. 보도방에서 일하거나, 자해공갈로 생계를 꾸려가거나, 조직에 들어가려고 이력서를 쓰거나, 국기봉에 올라가 블랙코미디 같은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 말이다. 이들은 삶의 어두운 지점과 맞닿아 있지만 어딘가 삼류 냄새가 나는 인물들이다. 된소리를 포기한 ‘시봉’이라는 단어처럼 말이다. 그 단어는 표준어의 산뜻한 질서에 포함되진 못하지만, 표준어의 권위 있는 질서를 파괴하는 힘도 지니지 못한다. 표준어의 질서에 불만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질서 전면에 나서서 파괴력 있는 위반도 시행하지 못하는 ‘시봉’이라는 단어처럼, 이기호 소설의 인물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개조하기 위해 앞장서지 못하는 비루한 인물들이다. 그야말로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인데, 이들의 ‘갈팡질팡’이 이기호 소설에 담긴 유쾌하면서도 애잔한 정서를 잘 드러낸다.
서희원 | 두 분 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선호하고 있다. 이 소설집이 이기호만의 개성을 문단에 알렸다면,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메타소설로 읽힐 만큼 문학에 대한 사유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김남혁 |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대부분이 이기호의 소설론으로 읽힌다. 오히려 난 그런 점들이 소설적 흥미와 이기호만의 개성을 반감시킨다고 생각한다.
서희원 | 난 오히려 두 번째 소설집에 담긴 메타소설들을 좀 더 흥미롭게 읽었다. 그래서 이기호의 장편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높았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에서 보여준 확연한 개성,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 담긴 농익은 문학적 사유, 그리고 장편. 이러한 삼위일체적 전개를 기대했기에, 이전의 행보들이 장편으로 가는 이기호의 문학적 여정처럼 읽혔다.
박 진 | 그리고 이기호는 편혜영이나 천명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소재들을 많이 다뤄온 작가이기도 하다.
서희원 | 이기호의 작품에 군사정권의 독재자, 교회와 종교적 언술, 국가의 은유인 군대와 폭력조직 등, 문학에서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했던 소재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미 선구적 문학작품, 학문, 언론, 대중문화 등을 통해 상당기간 비판되었던 대상이다. 반면에 이기호가 2000년대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는 말을 잘 못하고 있다. 약간의 비유를 쓰자면, 이기호는 이미 체포되었거나 현상수배 된 범죄자에 대해서는 잘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거나 옥죄고 있는 당대의 숨은 범죄자에 대해서는 그것이 누구다, 라고 말하고 있진 못하다. 이렇게 보자면 오히려 편혜영이 더 최근의 문제에 접근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남혁 | 이기호 소설이 조롱하는 대상이 그동안 대중에게 빈번히 비판되어 온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과는 잘해요』에도 관리자와 관리되는 대상이 너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 소설은 시설 원장과 복지사들을 무조건 악의적인 인물들로 그리고 있다. 이들 역시 시봉이와 주인공 ‘나’만큼이나 제도의 피해자 같은데 말이다.
서희원 | 아무래도 그런 점들이 이기호 작품의 의미를 확장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자꾸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읽게 만든다.
박 진 | 어느덧 『사과는 잘해요』로 논의가 넘어갔다. 나에게 이 소설은 조금 모호하고, 이상하게 읽혔다. 인물들의 성격이 이전처럼 선명했다면 시봉과 진만이 희생자의 느낌만 주었을 텐데, 실제로 그들은 순진하고 멍청한 외양으로 악인 이상의 범죄를 저지른다. 이들은 연민을 자아내는 불쌍한 인물들이지만, 마치 진짜 영악한 사람들처럼 방해자를 제거하고 목적을 이뤄간다. 나는 이런 모호함 때문에 이 소설이 알레고리로 읽히지 않았다. 예전의 시봉이가 어딘지 변화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기호의 다음 장편은 이전의 소설들과는 다른, 더 새로운 얘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김남혁 | 나는 『사과는 잘해요』가 이기호의 이전 단편들보다 완성도 면에서 떨어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시설, 반장, 알약, 사과(고백) 등등의 알레고리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고, 체제 질서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상징 질서를 의미하는 ‘시설’과 겉으로는 사회복지 운운하면서 속으로는 가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상징 질서의 외설성, 그 외설성을 공유하는 자들에게 ‘반장’이라는 직책을 부여하는 지배 메커니즘, 그 반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시설의 지배 메커니즘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향유하는 인물들, 시설 밖에 나와도 시설 안에서 유지되던 상징적 정체성(반장)을 유지하려 하고 그곳에서 먹던 ‘알약’을 자발적으로 복용하는 인물들, 죄가 있어서 사과(고백)하는 게 아니라 사과하기 위해 죄를 발명하는 사람들. 단어만 들어도 연상되는 익숙한 해석을 소설화했기 때문에 『사과는 잘해요』는 전혀 새롭게 읽히지 않았다.
박 진 | 나는 이랬던 것 같다. 지금 남혁 씨가 분석했던 그 의미 위에 주인공들이 가진 모호한 측면, ‘시봉이적’ 성격의 미묘한 변화가 더해져서 단순한 이분법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에 잡음을 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불일치가 주는 묘한 불안정함, 이런 것이 이 소설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남혁 씨와는 좀 다르게, 내가 소설을 읽는 기준은 대체로 완성도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나는 괴상함이랄까, 규격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지점들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사과는 잘해요』에서도 딱 떨어지는 분석을 미묘하게 피해가고 어긋나게 만드는 인물들의 성격과 뉘앙스들이 관심을 끌었다. 기존의 ‘시봉이들’이 변화하고 있고, 이 소설이 단편에서 장편으로 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면, 더 높은 완성도는 다음 작품쯤에서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서희원 | 난 ‘시봉’과 ‘진만’이라는 두 주인공 중에 ‘시봉’이가 죽고 ‘진만’이만 살아남는 것을 읽고, 이것을 이기호가 ‘시봉’이로 대표되었던 자신의 문학적 과거와 결별을 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일종의 출사표로 봤다. 유머와 입담의 관점에서 이 소설을 보면 진일보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기호가 재현하고 있는 출구 없는 세계와 그 미로 같은 시공간에 갇힌 인간의 모습이다. 가령 시봉과 진만이 사용하고 이해하는 언어도 그렇다. 시봉과 진만은 시설을 떠난 후 ‘균형감각’을 상실한다. 그들은 폐쇄된 시설로 돌아가 ‘알약’을 찾고 그것을 다시 복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균형감각’을 찾았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언어적 균형을 잃는다. 그들의 언어에는 일체의 비유법이 없고, 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상징계의 언어가 아니라, 상상계의 언어를 사용한다. 목숨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말에 진짜 살인으로 사죄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성경에 근거한 죄와 속죄의 문제, 사과가 죄를 만드는 도착의 문제로 읽는데, 그것이 소설가의 의도일 순 있겠지만 실제 씌어진 내용은 아니다. 읽어내야 하는 것은 소설가가 아니라 작품이다.
김남혁 | 흥미로운 말이다. 근데 설명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서희원 | 아마 이기호에게 소설적 명성을 안겨준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같은 작품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사과는 잘해요』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수인」의 세계에서 이기호의 문학적 본령을 본 사람에게 이 소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보면 더 그렇다. 「수인」의 어두운 서고에서 라이터 불꽃과 함께 명멸하던 소설과 세계에 대한 묵시록적 이미지는 『사과는 잘해요』에서도 반복된다. 그들은 ‘시설’을 나왔지만,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시설에 불과하다. 『사과는 잘해요』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시봉의 누이를 업고 ‘병원’을 탈출하지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거대한 병원의 십자가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다. 시선의 방향에 따라 희망과 절망이 명멸한다. 구원은 내가 절망에서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부인할 때만 존재한다.
김남혁 | 나도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수인」의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 해도 그것이 잘 표현됐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서희원 | 그 점엔 동의한다. 멋지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아마 이기호는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유머와 입담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박 진 | 이야기가 반복되며 공전하는 것 같다. 이제 편혜영의 『재와 빨강』으로 가자.
서희원 | 좋다. 편혜영은 유래(由來)를 찾을 수는 있지만 유사(類似)를 찾을 수 없는 작가, ‘하드고어 원더랜드’(이광호)라고도 불린 자기만의 공간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작가다. 개인적으로는 고대하던 편혜영의 첫 장편 『재와 빨강』이다. 편혜영 소설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보자. 먼저, 음, 김남혁 씨에게 편혜영이란? (웃음)
김남혁 | 편혜영 하면 우선 등단작을 첫 소설집에 포함하지 않은 작가라는 점이 생각난다. 등단작 「이슬털기」와 등단한 후 바로 발표한 「웨딩드레스」라는 소설이 『아오이가든』에 묶이지 않았다. 「웨딩드레스」는 『사육장 쪽으로』에서 보여준 작품들과 유사하지만, 「이슬털기」는 두 작품집에 어울리지 않는 소설이다. 단지 발표된 소설을 기계적으로 묶어서 하나의 소설집으로 발표하는 게 아니라 한 권의 소설집을 작가의 문제의식에 따라 선택하고 배치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문제의식을 선명히 하기 위한 열정이 다소 지나쳐서 소설집 자체가 좀 작위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이 한 편 한 편 높은 완성도를 지니지만, 한 소설집 안에서 모두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서희원 | 아무래도 『아오이가든』의 세계가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는 변화가 작가의 문학적 생명이겠지만, 이렇게 성공한 세계라면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육장 쪽으로』가 『아오이가든』에서 보여준 묵시록적 세계의 프리퀼(prequel)로 읽히기도 한다.
박 진 | 편혜영과 이기호 소설에 비슷한 점이 있다면, 첫 책에서 보여준 도발적인 면들이 두 번째 책에서는 차분하게 가라앉고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파격성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어느 정도 깊어지고 성숙해졌다. 특히 편혜영의 강렬하고 인상적인 이미지들은 두 번째 소설집에서 일상적인 삶의 세계와 접속하면서 보편적인 의미화의 가능성을 얻게 됐다. 그래서 『재와 빨강』에서는 이 세계가 장편으로 어떻게 펼쳐질까 무척 기대가 됐다.
김남혁 | 박진 씨가 이기호와 비교를 하니 나도 그렇게 해보겠다. 이기호 소설 하면 시봉이로 대변되는 인물들이 떠오르는데, 편혜영 소설 하면 유기된 시체와 불쾌한 냄새와 답답한 일상이 떠오르지 특정 인물이 생각나지 않는다. 편혜영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영어 이니셜이나 성씨나 성별에 대한 호칭으로 불린다.
서희원 | 편혜영의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편혜영은 공간과 세계의 문학적 재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편혜영의 인물들은 이 세계에 말 그대로 던져진 사람들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편혜영의 첫 장편이다. 그것도 계간지에 연재하면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 장편이 아니라, 전작의 형태로 갑자기 등장했다.
박 진 | 처음 편혜영이 첫 작품집에 담긴 소설들을 하나하나 발표할 때, 평론가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편혜영이 장편을 쓰면 어떻게 될까?”하는 얘기를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단편들이 너무 난해하니까, 장편이 되면 도무지 읽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에서 나왔던 농담들이다. 그 편혜영이 정말로 장편을 썼고, 그게 바로 이 소설 『재와 빨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편혜영은 단편에서 보여줬던 독특한 지점들을 고스란히 끌어들이고도 의외로 흥미 있게 잘 읽히는 장편을 써냈다. 단편에서 강렬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던 작가가 장편에서는 그런 매력을 잃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편혜영다움을 잃지 않고도 이렇게 읽을 만한 장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일단 참 반갑고 좋았다.
서희원 | 주변에서 『재와 빨강』을 평가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 소설을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문학적 개성의 결정판으로 보고 고평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예전 작품의 복사판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재와 빨강』에는 예전 작품의 흔적이 많이 있다. 역병의 창궐과 쓰레기가 되어 버린 세상, 아파트(「아오이가든」), 하수구에서 살아가는 지하생활자의 모습(「맨홀」), 자신이 아내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과 스스로의 범죄를 추리하는 구성(「시체들」) 등은 이미 『아오이가든』에서 보여준 편혜영의 문학적 개성이었다.
박 진 | 단편소설의 분위기나 모티프가 꽤 많이 차용되긴 했지만, 나는 이 소설이 단편의 반복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반복이거나 단편을 늘여놓은 것이라면 뻔해서 지루하고 밀도도 상당히 낮아졌을 텐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김남혁 | 나 역시 예전 작품의 잔상이 독서를 방해하지 않았다. 『재와 빨강』은 『아오이가든』과 『사육장 쪽으로』의 세계가 완성도 있게 결합된 결과물이다. 또한 서사의 측면에서 평가하지 않더라도 매력적인 장면이 많았다는 점도 장편으로서 『재와 빨강』이 지닌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아내와 신혼여행을 떠난 숲에서 원숭이들이 달려드는 장면은 대단히 인상 깊었다.
박 진 | 그렇다. 또한 『아오이가든』의 세계가 다소 추상적이고 환각적이었다면, 『재와 빨강』은 비슷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대단히 구체적인 느낌을 준다. 초기에 편혜영 소설은 막연히 ‘반문명’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재와 빨강』은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염병과 방역체계, 쥐떼의 출몰과 대지진 등은 상징적 해석의 가능성과 더불어 지금의 현실적 상황을 강하게 환기한다. 종말론적 상상력이나 대재난의 이미지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실제적인 불안과 위기감, 세상이 정말 망해 돌아가고 있다는 구체적 실감으로 다가오던 때는 없었다. 『재와 빨강』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한 소설이고 그래서 관습적인 모티브의 상투적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재의 정치사회적, 문화심리적 불안을 통찰하고 자기 스타일로 소설화한 느낌이다.
서희원 | 「아오이가든」은 잘 알려진 것처럼 홍콩에서 사스가 집단 발병하였던 ‘아모이가든’이라는 아파트 단지를 모델로 하고 있다. 사스가 발병하고 확산되는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사회적 질병의 가공할 파괴력, 이를 방역하는 과정에서 이면을 드러낸 국가의 전체주의적 성격 등을 「아오이가든」은 잘 지적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적 화려함의 이면에 이것들이 감춰져 있었기 때문에 「아오기가든」은 징후적이고 추상적이었지만, 충분히 문제적이었다. 어찌되었든 작년 신종플루의 확산으로 사회적 질병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아직도 이를 통제하는 국가에 대한 문제인식은 별로 제기되지 않았다. 편혜영이 『재와 빨강』에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질병이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국가와 폭력적인 시스템이다. 어떻게 보자면 『재와 빨강』에서 질병은 맥거핀(McGuffin)에 가깝다.
김남혁 | 주제적으로도 이 장편소설은 마치 『아오이가든』과 『사육장 쪽으로』가 합쳐진 소설 같다. 제도의 이면과 제도의 표면이 동시에 드러난다. ‘그’가 부랑자가 되어 공원과 하수도에서 생활할 때 시스템의 이면이 드러나고, 무균실과 같은 본사의 모습을 통해 시스템의 표면이 표현된다. 그런데 문제는 C국의 아파트에서 무균실 같은 시스템에 부합된 삶을 추구하는 그와, 부랑자가 되어 시스템의 규칙 밖에서 생활하는 그가 모두 인간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동물인 쥐와 비슷하다는 데 있다. C국의 아파트에 격리되었을 때 그는 제도의 추하고 더러운 이면 속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지만, 그래서 평화롭고 안정적인 일상을 유지할 수 있지만, 제도의 관리에서 벗어난 주체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아파트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제도가 관리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그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의 삶이 인간 이하인 이유는 단지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추하고 더럽게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그는 자신의 의식주와 관련된 문제 밖의 문제, 이를테면 윤리와 자유와 평등과 이념 등등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이유로 감기에 걸린 노숙자를 불태워 죽인 장면은 제도 밖에서 인간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동물로 전락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 진 |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데,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시스템에 편입하려고 애쓰는 인물인 동시에 끊임없이 달아나야 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C국에서 인정을 받고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하는 사람인 동시에, 처음부터 감염자였고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쫒기는 사람이다. 또한 감염자이면서 방역자이기도 하다. 이런 이중성이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독한 소독약이 얼굴 위로 분사되어 기침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은 정작 우리를 죽이는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소독약임을 씁쓸하게 말해준다.
김남혁 | 동감한다. 『사육장 쪽으로』 이후 편혜영 소설에서 정말 끔찍한 것은 부패한 시체나 곳곳에 포진된 사체나 비일상적인 현실이 아니다. 아무리 부푼 희망을 품고 시스템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게 구축된 일상 그 자체가 가장 끔찍하다.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대개의 편혜영 소설은 ‘일상→비일상→일상’으로 순환하는 악무한의 서사구조를 드러낸다.
서희원 | 좋은 지적이다. 한편 편혜영이 비판하고 재현하는 사회는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관료주의적이다. 굳이 말하자면 편혜영은 맑스적이라기보다는 베버적이다. 이런 점에서 『재와 빨강』은 카프카적인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앞에서 다뤘던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도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지금의 삶과 연결시켜 의미화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 진 | 카프카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카프카의 자장은 굉장히 넓어서 성향이 다른 많은 작가들이 카프카를 동경하거나 그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곤 한다. 정영문과 한유주도 그런 작가들이고. 편혜영에게서도 카프카적인 흔적을 찾을 순 있지만 이건 우리 시대 상황과의 직접적인 관련성보다는 카프카의 에너지 때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남혁 | 박진 씨의 말과 비슷한데, 카프카의 세계는 마치 뜯어먹기 좋은 식빵처럼 크고 넓어서 누구나 쉽게 달려든다. 어떤 소설에 ‘K’라는 등장인물이 등장한다거나, 어떤 소설이 관료제 문제를 드러내면 으레 카프카와 연결시키곤 하는데, 작품에 대한 이 같은 접근 방식은 식상하기도 하고 개별 작품의 해석은 물론이요 카프카 소설에 담긴 문제의식도 축소시킨다.
서희원 | 이기호가 『사과는 잘해요』의 후기에서 암시적으로 카프카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특히 이들 작품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관료주의라는 점에서 카프카를 분명하게 연상시킨다. 과거 명시된 적, 군사 정권이나 자본주의 때문에 인식하지 못했던 시스템의 문제를 최근의 작가들이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박 진 | 카프카 소설을 항상 관료주의 비판과 연결하는 해석은 나 역시 불만스럽지만… 어쨌든 이들이 과거에 인식하지 못했던 시스템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더 듣고 싶다.
서희원 | 난 『재와 빨강』의 표지를 보면서 특정 인물의 얼굴과 그의 시대가 떠올랐다. 작품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쥐’도 그 특정 인물의 친근한 별명 아닌가. (웃음)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국가 통제의 사회로 진입했는지 최근의 천안함 사태를 보도하는 방송의 압도적 편향성만 봐도 알 수 있다. 난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아서 공중파만 시청한다. 그래서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한 달 동안은 어디를 돌려도 천안함이다. 리모컨을 쥐고 있는 것은 분명 나인데, 볼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마치 텔레비전이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꼽추 난쟁이가 들어 있는 기계장치 같다. 언제나 승리하는 그 압도적 기계 앞에서 난 끔찍한 패배의 잔상을 본다.
박 진 | 충분히 공감하는 얘긴데, 어떤 측면에서 이 문제가 이들 소설과 연결되는지? 이를테면 『재와 빨강』이 비판하고 있는 생명정치(bio-politique), 신체를 미시적으로 지배하는 생명 권력에는 얼굴이 없다. 그 권력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를 속박하고 통제한다. 그런데 지금 정권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내놓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 정치 현실은 이 소설이 비판하고 있는 상황보다 더 유치하고 촌스럽다. 『재와 빨강』이 주는 인상에 꼭 부합하지도 않고.
서희원 | 이명박 대통령은 얼굴 마담과 같다. 문제의 원인이 하나의 얼굴이나 인물로 고정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전체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사고를 멈추게 하고, 인물을 교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든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히틀러라는 한 개인에게만 있고, 그에 대한 암살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이는 정말 순진한 생각이다.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는 인물 뒤에 얼굴 없다고 말한 시스템이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교활한 시스템은 공존한다. 그래서 난 촌스러워 보이는 그 방식이 더 무섭다. 이제 어느 정도 『재와 빨강』에 대해 얘기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으로 넘어가자. 『고래』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그의 고대하던 두 번째 장편이다. 물론 그 사이에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있지만.
김남혁 | 천명관 하면, 당연히 『고래』가 떠오른다. 『고래』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 어설프게나마 비평문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나도 소설 한 편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이 같은 소설 한 편 쓰면 내 생에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는 식의 방정맞은 생각도 든다. 또 제도권에서 문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더더구나 64년생인 사람이 41살에 발표한 소설이 이렇게 젊다는 게 놀라웠다. 물론 41살이라 해서 무조건 고루하고 답답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왠지 그 나이 정도의 사람들은 대개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혹은 문학이라면 이런 걸 써야지 하는 편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순 없는데, 그래서 더욱더 천명관의 나이와 『고래』라는 작품을 함께 생각하는 것 같다.
박 진 | 그런 느낌이 들 만도 하다. 『고래』의 매력은 역시 폭발하는 에너지다. 의미를 해석하거나 소설적 장치들의 유기적 관계를 따져보기 이전에, 이야기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매혹됐던 기억이 난다. 영화, 신화, 설화와 같은 온갖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들끓어 분출하는 힘이 『고래』엔 있었다. 하지만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오면 그런 에너지가 사라지고 영화적인 요소들이 여기저기 끼어들어와 있을 뿐이다. 처음엔 이것을 장편과 단편이 가진 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령화가족』에서도 『고래』 때의 매력은 찾을 수 없다. 『고령화가족』은 오히려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가깝다.
김남혁 | 내가 보기에도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서는 『고래』에서 느꼈던 이야기나 여담의 활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결말의 반전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흥미가 좀 떨어진다. 그래도 이 소설집에서 「더 멋진 인생을 위하여」라는 소설은 인상적으로 읽었다. 킬러인데 배가 나온 킬러라는 설정도 재미있었고.
서희원 | 그건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코 킬러 찰리(존 굿맨)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김남혁 | 아, 그런가. 하여간 더 멋진 인생을 위하여 고향을 떠났지만 떠나기 전 고향이 가장 행복했던 곳임을 깨닫게 되는 주제도 마음에 와 닿았고, 미국의 황량한 분위기가 작품의 주제와 잘 어울려서 매력적이기도 했다. 『고령화가족』은 이 단편과 연속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희원 |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고래』를 그렇게 재밌게 읽지 않았다. 마르케스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키는 이야기의 힘이 담겨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했지만, 단지 거기까지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
김남혁 | 그럼 『고령화가족』은 어떻게 읽었는가. 서희원 씨에게 천명관의 『고령화가족』이란? (웃음)
서희원 | 『고령화가족』은 잘 짜인 서사를 가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의 한국 소설에서 전형적으로 제시되었던 몇 가지를 비틀고 있다. 먼저, 『고령화가족』은 젊음을 상실한 인물들의 성장소설이다. 어떠한 의미로는 전도된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교양소설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수식어가 ‘편모슬하의 성장’이다. 이 소설 역시 사회와 타협하는 방식(취직, 조직에 입사, 결혼)으로 성장을 완료했던 자식들이 다시 편모의 무릎 아래로 모여들면서 시작된다. 한때 영화감독이었거나, 폭력배였던 형제, 생활인이었던 누이는 오십 내외이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먹고, 배설하고, 성적 충동만 느끼는 아이와 같다. 『고령화가족』은 다시 찾아온 두 번째 성장기를 겪는 자식들과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그러면서도 모성과 어머니의 모습을 심미화하거나 신화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을 지배하는 것은 육체적인 유물론이다.
김남혁 | 물론 그러한 지적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모성애나 가족만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아닌 것 같다. 『고래』와 연결시켜 말해보겠다. 천명관이 『고래』를 통해 제시했던 명제가 “이야기는 계속된다”(406쪽)였다면, 그는 『고령화가족』에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286족)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고래』의 문제의식은 인간의 삶이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춘 거대한 이야기로 온전히 서술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오히려 우연적이고 부조리하고 작은 이야기들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그렇기에 『고래』는 삶을 큰 이야기 틀로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려는 태도를 유예하라고 독자들에게 제안한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고령화가족』이 우연적이고 부조리한 이야기를 포기하고 거대서사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천명관은 거대서사를 빗겨나는 이야기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행동을 방기하는 데 알리바이가 된 이야기를 포기한 것이다.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행동이 진실을 이끌어내지 않고 오히려 주체적인 행동을 포기하는 알리바이가 된 현 상황에서, 그는 주체적인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거대서사에 포섭되지 않은 우연적인 이야기들이 『고래』의 핵심이었다면, 이야기의 우연성을 변명 삼아 주체적인 행동을 포기한 주인공의 기만과 그 기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주인공의 성장은 『고령화가족』의 핵심이다.
박 진 | 재미있는 해석이다. 두 분이 성장의 측면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실 나는 이 소설의 키워드가 ‘성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그냥 가족 이야기의 비틀기라고 느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식의, 스위트홈 신화를 강화하는 가족 이야기들의 보수성을 깨고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콩가루 집안의 모습을 그려낸 소설이라 생각한다. 부르주아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트는 그 나름의 의미는 분명하지만, 이미 <가족의 탄생>이나 <좋지 아니한가(家)> 같은 파격적인 가족 영화들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소설이 새삼 큰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미학이나 감수성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정치성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도 문학이 영화를 겨우 뒤따라가고 모방하는 정도라면 무척 애석한 일이다.
김남혁 | 공감이 가는 말이다. 지금 영화가 소설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꼭 대중성의 차원만은 아닌 것 같다.
박 진 | 한편 이 소설에서 나는 엄마를 중심으로 한 가족 관계보다는 소설의 화자인 인텔리 영화감독, 비록 지금은 실패했지만 언제나 특별대우를 받고 자란 동생과 뒷골목을 전전해온 무식한 전과자 형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형을 무시하던 ‘나’가 스스로의 비겁함과 위선과 “얼치기 자유주의자”(276쪽)로서의 한계를 느끼는 과정이 형이라는 존재를 다시보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헤밍웨이 소설을 읽는 형과 헤밍웨이 전집을 치워버리는 ‘나’, ‘나’ 대신에 형을 선택하는 미용사 수자씨, 미연이의 가출을 둘러싼 ‘나’와 형의 대조적인 모습 등이 다 그런 에피소드들이다. 그러면서 실패한 결혼생활과 영화감독으로서의 인생에 좌절하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나’가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286쪽)라고 생을 긍정하게 되는 일종의 ‘착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좀 심심하기도 하고, 재담과 입심만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허탈하기도 했다.
김남혁 | 맞다. 『고래』를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었다면, 『고령화가족』은 잘 만들어져서 해석도 비교적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고래』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어쩌면 천명관에게는 다른 선배 작가의 작품을 넘어서는 것보다 자신이 쓴 『고래』를 넘어서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일지 모르겠다.
서희원 | 나 역시 『고령화가족』은 장편이지만 잘 짜인 소품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오늘 우리가 좌담의 주제로 2000년대 젊은 작가의 장편을 선택한 이유는 이들의 작품에서 어떤 노블적인 욕망에 대한 충족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던 문학은 ‘노블’이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말했던 근대문학도 ‘노블’이다. 가끔은 지금의 작가들에게서 ‘노블’적 기대를 충족할 만한 작품을 고대하는 것은 달라진 시대와 문학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맹목적 희망이 아닐까 하면서도, 나는 그런 바람을 접기가 쉽지 않다.
박 진 | 이들은 근대소설의 테두리와 양식과 규범을 넘어서는 독특하고 새로운 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들이다. ‘노블’을 기대하고 천명관의 『고래』를 본다면, 너무도 엉뚱하고 이상해서 어쩌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천명관 소설의 개성과 성과는 『고래』의 바로 그런 측면들이다. 이기호와 편혜영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장편이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의 새로움과 독특한 세계를 더 깊게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