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규 | 반갑다. 문화웹진 ‘나비’ <비평테이블>의 다섯 번째 좌담이다. 오늘은 최근 문학상 수상작들을 놓고 이야기해 보겠다. 구체적으로 다룰 작품은 임영태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중앙장편문학상), 김기홍의 『피리부는 사나이』(문학동네소설상), 안보윤의 『오즈의 닥터』(자음과모음 문학상), 이선영의 『천년의 침묵』(뉴웨이브 문학상), 이렇게 네 편이다. 먼저 문학상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전통적인 문학상 제도, 예컨대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미당문학상 등등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들어보면 좋겠는데?
서희원 |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에 비하면 최근에는 정말 문학상이 많아졌다. 현재 전국에서 시상하는 문학상만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다소 그런 느낌이 줄어든 듯하다. 그리고 문학상 제도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주요 문학상의 경우 수상자와 작품을 서로 겹치지 않게 선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사위원들의 감식안이나 문학상의 성격차가 아니다. 아무래도 다른 작품들이 수록돼 있어야 독자들이 구매할 것이 아닌가?
박 진 | 서희원 씨 말대로 문학상 수상작의 판매 문제를 간과하기는 어렵다. 특히 전에는 주로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소설들 중에서 문학상 수상작을 선정했다면, 최근에는 소설집이나 장편소설처럼 한 권의 단행본에 문학상을 주는 경향이 있다. 개정된 동인문학상이 단적인 예일 텐데, 이런 변화는 출판시장의 영향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시장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 문학상의 권위를 덧입히는 것이다. 상금 얼마짜리 소설이라든가, 무슨무슨 상 수상작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엄청난 광고 효과를 내기도 한다.
서희원 | 그런 경향 때문인지 최근 문학상 제정과 심사를 보면 대중성과 문학성을 어떻게든 결합시켜 의미화 하려는 의도가 눈에 띤다.
장성규 | 두 분이 좋은 지적을 해주었다. 한편 좀 다른 각도에서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예전 문학상들을 보면 대부분 문학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문인들의 이름을 딴 것이 많았다. 앞서 예를 든 문학상들 뿐 아니라, 김수영 문학상, 소월시 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등등… 이런 문학상들은 전통적인 문학적 권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경우보다는 예를 들어 뉴웨이브 문학상과 같이 특정한 장르나 문학적 경향을 표명하는 문학상이 많이 생겼다. 이런 현상 자체가 변화된 독서 문화나 출판시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박 진 | 문인들 이름을 딴 문학상들에는 정말 좀 다른 권위가 있었다. 왠지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이면 이효석풍의 서정적인 작품인 것 같고, 이상 문학상 수상작에는 뭔가 전위적인 느낌이 있고. 물론 반드시 그런 작품이 선정되는 건 아니지만. (웃음)
장성규 | 새로 만들어지는 문학상들이 문학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문인들의 이름을 따기보다는 특정한 장르적 경향을 표명한다는 것은, 박진 씨의 말대로 더 이상 문학적 권위가 독서 문화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건 아닌가 싶다. 특히 최근 문학상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정도가 새롭다. 첫 번째로 예전엔 주로 단편 중심으로 문학상이 주어졌다면, 최근에는 대규모 장편공모 문학상이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장르문학이나 신인들의 새로운 감수성을 선정 기준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얘기를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박 진 | 우선 최근 소설의 경향이 장편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출판시장에서 장편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면서, 거액의 상금을 건 장편소설 공모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현상은 문단 자체가 출판시장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문학 제도가 시장의 요구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형, 재구성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장르문학상의 경우도, 소수 마니아층에 한정돼 있던 장르소설이 이제는 훨씬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이제는 더 이상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이분법이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아닌가? 서로 다른 장르간의 활발한 교섭과 융합이 진행되고 있고… 이런 현상이 문학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 같다.
장성규 | 박진 씨는 특히 새로운 장르문학상들의 긍정적인 가능성에 주목하는 듯한데?
박 진 | 실제로 외국의 경우에는 세계환상문학상, 네뷸러상, 휴고상, 브람스토커상, 영국환상문학상 등 장르소설에 수여되는 문학상들이 상당한 권위와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다.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다양한 장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문학상들이 더 수준 높은 장르소설의 창작과 유통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희원 | 나는 장편 위주로의 문학상 재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최근 장편에 대한 요구가 문학 내외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문학 외적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출판시장의 문제가 있다. 물론 인터넷 연재라는 새로운 소설 발표의 형식이 등장했다는 것도 중요하게 지적될 수 있겠다. 문학 내적으로는 장편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사회적 요구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장편소설(Novel)에 대한 문학적 기대는 ‘본격소설’ 논쟁이 있었던 1930년대부터 줄기차게 있어왔지만, 최근에 더욱 거세진 것 같다.
장성규 | 장편에 대한 문학 내적인 인식의 변화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서희원 | 사실 한국 문학에서 단편 소설(short story)은 특권적 지위를 누려왔다. 문학 계간지를 통한 청탁도 단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비평 역시 단편이 가진 미학적 성격과 구조적 완결성에 무게를 두었다. 심지어 문예창작학과의 소설 창작교육도 단편에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은 이와는 반대로 단편이 아닌 장편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장성규 | 서희원 씨가 지적해준 대로 유독 한국 문학에서는 단편이 강조돼온 것 같다. 근대 초기부터 장편은 통속적이고 단편은 예술적이라는 인식이랄까, 그런 것들이 분명이 존재했고…
서희원 | 문학은 단편으로, 생계는 신문에 연재하는 장편으로 해결했다는 이태준의 발언이 그런 인식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한다. 게다가 1990년 이후 소설 연재가 주요 일간지에서 사라지면서 계간지에서 선호하는 단편 중심으로 소설 장르가 재편되었다. 1990년대 등단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단편이 많다. ‘단편 권하는 사회’였다고나 할까? (웃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소설을 발표하는 매체 중 장편을 요구하는 인터넷의 비중이 커졌고, 장편이 지니는 고유한 성격에 대한 문학적 요구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편이 자아나 내면의 문제를 담기 적절했다면, 장편은 사회 현실의 재현과 길항을 담아낸다. 아무래도 장기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 서사를 요구하는 시대적 배경이 장편을 원하는 것 같다.
장성규 | 동의한다. 분명히 단편에 비해서 장편이 시대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큰 이야기를 형상화 할 수 있는 형식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최근 장편이 양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비해 그에 걸맞은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박 진 | 서희원 씨가 지적한 측면의 장편에 대한 기대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스토리텔링과 콘텐츠로서의 장편에 대한 요구 역시 존재한다. 현재 이 두 가지 요구가 혼재하고 있는 상황인데, 지금으로서는 두 번째 경향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장성규 | 박진 씨가 장편 위주로의 문학상 재편의 이중적인 성격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리해 준 것 같다. 사회자가 할 일을 대신 해 주시니… (웃음) 아무튼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요구와 대중성에 대한 시장논리, 이 두 가지가 장편 중심의 문학상들을 추동하는 복합적인 배경인 것 같다. 이제 문학상 제도에 대한 얘기에서 구체적인 작품을 대상으로 논의의 중심을 옮겨보자. 내 경우는 우리가 다룰 네 권의 작품들에서 뭐랄까, 신인들만이, 물론 임영태와 안보윤의 경우는 신인은 아니지만, 여하튼 신인들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이 장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를 지녔었다.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는데, 다른 분들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서희원 | 일단 나는 네 권의 작품이 모두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임영태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은 일종의 사소설이라 볼 수 있고, 김기홍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성장소설과 모험소설이 결합되어 있는 소설이다. 안보윤의 『오즈의 닥터』는 환상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선영의 『천년의 침묵』은 스릴러적 성격을 보여준다.
박 진 | 그러면서도 네 권의 소설에서 모두 환상적이고 장르적인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주목된다. 안보윤과 김기홍의 작품에서도 스릴러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구획 자체가 굉장히 관념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성규 | 구체적으로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임영태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보자. 좌담 시작 전에 서희원 씨는 근래 읽은 작품 중 상당히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어떤 점에 주목했는지 궁금하다.
서희원 | 일단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내가 살고 있는 연남동 주변이다. (웃음) 심사평을 보면 서울의 쇠락한 변두리 공간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사실 이 소설의 공간은 바로 홍대 뒷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절대 홍대 앞으로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젊음의 뒷면이랄까, 그런 공간을 잔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 내에 삽입된 아내의 시(「빛은」 “빛은 / 조금이었어 // 아주 / 조금이었지 // 그래도 그게 / 빛이었거든”, 230쪽)가 전체 작품의 주제를 말해준다. 주인공은 대필 작가이지만 사실 진짜 작가이기도 한 것이고, 작품의 개 역시 진돗개는 아니지만 진돗개 못지않은 진짜 개이다. 화려하고 멋지진 않지만 인물들의 쓸쓸하고 미약한 일상도 삶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오랫동안 한국 소설에서 다소 간과되어온 잔잔함 속의 감동이라는 소설의 미덕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박 진 | 나는 조금 다른 측면 때문에 좋았다. 다른 존재들과의 교감이라는 테마가 일종의 예술론으로 이어지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단순하게 본다면 대필 작가의 일상일 것이다. 대필 작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삶을 생생히 글로 써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바로 소설을 쓰는 일은 아닐까? 특히 이 소설에서 ‘나’는 접신이나 빙의 상태인 듯 다른 이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그의 목소리로 말한다. 어릴 때 친구는 물론이고, 강아지 태인이까지도 ‘나’의 입을 통해서 자기 목소리를 드러낸다. 샤머니즘적인 인상이 들 정도인데… 소설가란 이렇게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대신 말하는 존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소설가란 어쩌면 대필 작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무척 흥미롭게 읽혔다.
서희원 | 중요한 지적을 해준 것 같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샤먼적인 예술론을 읽어낼 수 있는데, 임영태는 자신의 그런 소설관을 굳이 표나게 내세우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소설의 감동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박 진 | 그런데 주인공이 아직 듣지 못한 목소리가 있다. 그것이 아내가 만든 문패에 적힌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의 의미이다. 이 소설이 ‘작가되기’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것은 의뢰인 장자익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내 이름으로’ 출간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문패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아직 미완인 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아홉 번째’ 개인 태인이가 돌아오고 아내의 문패를 현관에 걸기로 작정하는 장면에서 암시되듯,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은 그 의미에 한결 다가선다. 이런 측면에서 이 소설은 단순히 대필 작가의 잔잔한 일상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소설쓰기나 작가되기의 본질에 대한 임영태 나름의 예술론으로 읽을 수 있다.
서희원 | 실제로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샤먼에 가까운 존재로 나온다.
박 진 | 그렇다. 그러면서 또한 ‘나’를 작가로 이끌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의 환상성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죽은 사람들이 등장한다든가 하는 이 소설의 환상들은 단순한 기법이나 감각의 층위에 머무르지 않고 샤먼으로서의 작가라는 예술론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장성규 | 글쎄, 저번 좌담에 이어서 이번에도 나만 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내 감식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웃음) 나는 사실 이 작품이 굳이 이렇게 길게 구성될 필요가 있는지 싶었다. 작품 초반부에서는 무언가 잔잔한 감동 같은 게 느껴졌는데,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동일한 주인공의 일상이 계속 반복되면서 장편 장르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굳이 길게 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오히려 단편으로 처리하는 게 보다 좋지 않을까 싶었다.
박 진 | 사실 이 작품은 장편소설로서는 스토리가 상당히 약한 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작품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자익의 삶에 대한 주인공의 탐색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독자의 예상과 달리 그 얘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으면서, 일반적인 스토리 전개 방식을 벗어나게 된다. 나는 이 점이 오히려 이 소설의 특징이자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운명이나 진실 등등에 대한 아포리즘 형식의 진술들이 다소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것 같이 일반화하는 목소리는 인물 화자인 ‘나’에게 잘 어울리지도 않고, ‘소설적’이거나 매력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장성규 | 내가 느낀 아쉬움도 그 점과 관련이 있는데… 뭐랄까,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이 제시되면서 그 에피소드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그로부터 특정한 작가의식이 등장한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에세이처럼 작가의 목소리가 툭툭 삽입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편 형식의 특성을 살리려면 거대서사, 큰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런 형식상의 고려가 소거된 듯하다. 그러면서 세계와의 대결이라는 부분이 없어지고, 대신 관조자적 시선이 전면화된 느낌이다.
서희원 | 앞서 이 소설이 일종의 사소설이라고 말했는데, 이 점이 일반적인 장편의 속성으로 이 작품을 읽어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소설 자체가 세계와의 대결보다는 자아에 대한 탐색에 치중하는 성격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전반이 소설의 화자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애잔한 감동과 읊조리는 화자의 목소리를 만들어준다. 이런 점은 이 작품의 독특한 장점이 아닐까 싶다.
장성규 | 이 작품이 사소설적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일본의 사소설의 경우 서희원 씨 말처럼 자아의 탐색에 초점을 맞추지만, 한국의 사소설의 경우 사회적 맥락에 따라 정치적인 발화로 독해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이런 부분을 좀 더 살렸다면 한국형 사소설과 장편 장르간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듯하다. 이제 다음 소설로 넘어가 보자. 김기홍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개인적으로는 네 권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인데, 다른 분들은 어땠는지?
박 진 | 『젊은 날의 초상』 같은 성장소설에서부터 <판의 미로> 같은 신화적인 판타지와 <아이리스> 같은 첩보 스릴러까지, 이질적인 장르와 경향들을 넘나드는 참 이상한 소설이다. 소설 자체의 완성도나 밀도 같은 데 주목하면 부족한 점이 상당히 많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정체나 상징성도 흐지부지되었고, 인물들의 방황이나 성장의 의미도 모호한 채로 끝나버린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괴리되어 있고 서사적 긴장감이나 긴밀함도 점차 느슨해져서, 시작한 이야기를 제대로 끝맺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장성규 | 앞서 서희원 씨가 이 작품이 성장소설과 모험소설의 결합이라고 말했는데, 성장소설의 유형을 보이는 앞부분과 모험소설의 유형을 보여주는 뒷부분이 소설 내적인 문법으로 잘 결합되기보다는 다소 거칠게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러한 균열이 지금 젊은 세대들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 진 | 내 생각도 비슷하다. 이 소설이 흥미롭다면 문학적 가치의 측면보다는 문화적 징후의 차원에서일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구조나 질문의 방식 등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지금의 상황을 단적으로 예시하는 징후일지 모른다. 전반부에서 주인공들은 독서와 토론, 연애와 여행 등 성장을 위해 거쳐왔던 익숙한 통과의례들을 따라하고는 있지만, 이 소설에서 그것들은 예전과 같은 의미나 실감을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소설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주인공들의 방황과 시련은 오히려 대중문화적, 환상적, 장르적 기호들 속에서, 그것들을 통해 전개된다. 그 여정은 또한 이전의 성장소설들에서보다 훨씬 더 오리무중이며,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양상을 띤다. 그런데 바로 이런 측면이 지금 젊은 세대들이 처한 곤경과 2000년대 성장소설의 역설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한다.
장성규 | 공감한다. 과거 1980년대 성장소설은 굉장히 명확한 플롯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곧바로 사회과학 세미나와 집회 참여를 통해 실천적 지식인으로 각성하는 과정, 이런 것이 당시 성장소설의 기본구조였다. 반면 1990년대 성장소설에는 이를테면 배낭을 메고, 하루키 소설을 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의 구조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이런 구조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이것을 기법적인 결함으로 보기보다는 동세대의 공통의 가치지향이 부재한, 혹은 가치지향이 제시되지 않은 현재 20대의 삶을 정확히 포착한 징후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박 진 | 보충하자면, “지금 이 세계는 곧 끝날 거야. 이 세계는 스스로 다른 세계가 될 힘을 상실했어”(289쪽)라는 절망적 인식이 짙게 깔려 있지만, 그런 이 세계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다른 세계’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등을 전혀 알 수가 없는 젊은 세대들의 사회심리적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정현이란 인물이 길거리에서 기타 연주를 하며, 길거리 연주가 피리 부는 사나이와의 ‘대결’이라 생각하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효과가 있을 리는 없겠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아서”(315쪽)라고 말하는 정현의 모습은 세상과 대결하려는 지금 젊은 세대들의 답답하고 막막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장성규 | 나 역시 작가가 어설프게 새로운 가치와 성장의 구조를 제시해주는 게 아니라, 매우 정직하게 그 과정 자체의 지난함을 보여준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이 화자가 아니라 정현이라고 생각한다. 화자나 수연은 거의 실체가 없는 인물이다. 반면 정현은, 박진 씨도 언급했듯이, 기타 연주를 통해 피리 부는 사나이와 나름의 대결을 시도한다. 그런 면에서 작품 독해의 초점을 정현에게 맞추고 싶기도 하다. 좋은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서희원 | 작가의 의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작품의 결과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기 어렵다. 심사평에서도 지적된 사항이지만, 지나치게 하루키의 흔적이 느껴진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렇고, 『양을 둘러싼 모험』을 연상시키는 서사구조가 특히 그렇다. 다른 한편으로 작품의 결말부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테러’를 선택한 점에 대해 작가에게 질문하고 싶은 점들이 많다. 한국의 경우 일본이나 독일의 적군파와 같이 테러를 통해 사회적 변혁을 시도했던 경험이 별로 없다. 게다가 왜 영국인가?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리겠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분명 작가가 테러를 통해 강고한 세계자본주의에 파열을 내겠다는 의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황급히 작품이 끝난다는 느낌이 든다.
박 진 | 테러 조직이 등장했다가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대목이 가장 황당하기는 하다. 테러의 사회역사적인 맥락에 관심을 두었다기보다는 대중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게 아닐지…
서희원 | 그 점이 정말 아쉽다.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폭력과 테러를 성찰하는 독특한 사유가 더 잘 드러났다면 결말부의 완성도가 높아졌을 것 같다. 더불어 음악이 자주 등장하는데 왜 음악 매체인가에 대한 사유 역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될 수 없는 음악의 특성이랄까, 그런 부분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표현되면 좋을 듯하다.
장성규 | 나 역시 음악이 자주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주인공과 정현이 만나게 되는 계기나 영국에서 정현의 오빠를 확인하는 장면, 이런 것들이 모두 음악을 매개로 해서 진행된다. 서희원 씨 말처럼 작가가 명료하게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음악이 대두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징후이다.
서희원 | 좀 다른 얘기인데, 나는 주인공이 하루키 소설의 와타나베 계열의 인물이라고 느꼈다. 공동체에 속하기보다는 개인의 내면에 침잠하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런데 과연 이런 인물형이 2000년대 한국의 20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박 진 |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원래 좀 내향적이고 사색적인 인물형이지 않나?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체로 현실 속 20대의 전형이라 보긴 어렵다.
장성규 | 여러 가지 아쉬움이 지적됐는데, 김기홍의 소설은 작품의 완결성을 비롯해서 많은 논란거리를 지닌 작품이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2000년대 젊은이들의 성장 과정을 치열하게 그리려는 열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담이지만 임영태와 김기홍 모두 동일한 마포와 홍대 근처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데, 임영태는 쇠락한 변두리를 그리는 반면, 김기홍은 홍대 앞의 인디문화를 그리고 있다. (웃음) 상당히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다음 소설로 넘어가보자. 안보윤의 『오즈의 닥터』는 최근 작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경향들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정신분석학적인 프레임과 환상성의 사용, 스릴러적 기법의 차용 등등. 먼저 서희원 씨는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서희원 |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서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물학적인 아버지뿐만 아니라 길러준 아버지까지 죽인다는 점에서 좀 더 살의에 찬 오이디푸스 서사이다. 이런 이야기를 정신분석학적인 지식과 스릴러적 기법 등을 적절히 사용해서 구조화한 좋은 소품이라고 생각한다. 단단하게 잘 짜여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박 진 | 내 경우에는 기대했던 것보다 좀 실망스러웠다. 애초에 없는 인물인 닥터 팽이 서두부터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스토리를 이끌어간다는 점은 흥미로웠지만, 그렇게 해서 결국 이야기하는 것이 불우한 유년기의 상처와 그로 인한 정신병, 환각제에 의한 기억의 착란과 범죄 행각 등이라면, 이건 너무 식상하지 않나?
서희원 | 그런 점은 좀 아쉽다. 특히 제목이 『오즈의 닥터』인데 ‘오즈’라는 공간이 충분히 의미화 되지 못한 점은 이 소설의 약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현실의 공간을 ‘오즈’라고 지칭하는 사회적 의미랄까, 그런 점을 좀 더 부각시켰으면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오즈의 닥터’보다는 차라리 ‘오이디푸스의 닥터’로 읽힌다. 물론 이렇게 제목을 정하면 소설의 결말을 너무 금방 알게 하겠지만. (웃음)
박 진 |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말의 경계를 지운다는 것도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 더구나 “현실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환각이 보이는 상태로 좀 살면 안 되는 건가요? (…) 결국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이제 환각도 현실도 상관없어요”(248쪽)라는 주인공의 마지막 말은 너무 무책임하고 맥 빠지는 결론이다. 작가 스스로 책 뒤에서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하다면, 그건 ‘어떻게’가 ‘무엇을’에 영향을 미치고 이야기 자체를 변형하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말하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기존의 익숙한 이야기로 귀결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지금은 더욱 더 ‘왜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의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장성규 | 여담인데 문학관련 인터넷 채팅창에 종종 접속한다. 물론 서로가 누구인지는 모른 채로. (웃음)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서는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문예창작학을 전공하고 습작을 하는 분들은 이 작품이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하더라. 정신분석학적 프레임과 환상적인 기법의 사용, 영화적 기법의 노출 등등이 모두 포함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반면 습작을 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은 도대체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기법에 대한 자의식이 무언지 잘 모르겠다는 다소 비판적인 견해가 많았다. 이런 반응들은 분명 이 작품이 최근 소설들의 트렌드를 잘 보여주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 같다. 어쨌든 안보윤의 경우 다양한 이론적 프레임과 실험적 기법들을 꽤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만의 뚜렷한 자의식을 보여준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서희원 | 비단 이 작품뿐 아니라 오늘 다루는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환상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환상이 사회적인 층위의 문제제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역의 이야기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비평에서 정신분석학적 프레임이 전면화된 것 같은데, 이런 비평적 경향을 작가들이 지나치게 수렴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박 진 | 환상을 빈번히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리얼리티 개념이 전반적으로 변화하면서 소설 속에 환상이 자주 등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문제는 환상을 작품 안에 끌어오면서 어떤 의미를 생성하는가 하는 점일 텐데, 이 소설에서 환상은 단순히 약물중독에 의한 환각으로 처리돼 있다. 이런 부분이 무척 아쉽다.
장성규 | 환상은 억압된 것들이 표출되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무엇이 억압하는가?’, ‘억압의 메커니즘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환상이 지닌 미학적 특성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일반적인 오이디푸스 서사로 귀결되어 버리지 않는가?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연찮게도 김기홍의 『피리부는 사나이』에도 수연이가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도 여고생 수연이가 등장한다. (웃음) 주인공은 교사고 수연이는 학생인데, 작품에서 수연이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특별히 발화하는 부분이 없다. 수연이의 관점에서 학교라는 제도의 폭력성이 좀 더 풍부하게 서술되었다면, 주인공의 심리치료가 진행되는 병원이라는 제도에 대한 인식과 결합되면서 억압의 메커니즘이 어느 정도 형상화될 수도 있었을 듯하다.
서희원 | 최근에 ‘싸이코 패스’라는 말이 유행인 것 같다. ‘싸이코 패스’란 단어는 범인을 악인으로 재마법화시킨다. 이 작품의 경우 주인공의 살인동기가 모호하기 때문에 일종의 싸이코 패스처럼 읽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범죄가 발생하는 사회적 기원에 대한 탐구가 소거된다는 것이다.
장성규 | 언급된 문제들이 다 서로 맞물려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이 작품은 최근 한국문학의 주된 요소들을 잘 보여준다. 오이디푸스 서사구조부터 영화적 기법, 환상성 같은 것들이 현재 젊은 작가들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창작방식임은 분명하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작가가 좀 더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번엔 이선영의 『천년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소설은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인 만큼, 오늘 우리가 다루는 네 편의 작품들 중 가장 장르적 성격이 강한 소설인데,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다.
박 진 | 잘 쓴 팩션이다. ‘한국형 팩션’이란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른바 한국형 팩션들은 민족주의적이고 근대적인 역사관을 강하게 담고 있다. 『천년의 침묵』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지식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참주로 대표되는 정치권력과 현자로 대표되는 지식권력 사이의 미묘한 갈등, 귀족 지식인과 시민 계급(민중) 사이의 충돌 등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포착해낸다. 결국 참주가 시민 계급을 이용하여 지식권력을 흡수해 들이는 결말은 씁쓸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한편 수학적 지식들을 소설 안에 끌어들인 것도 재미있다. 예전에 글을 쓰면서 팩션이 ‘인포테인먼트’(information + entertainment)의 성격을 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전문지식을 말랑말랑하게 가공하여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든다는 뜻인데, 『천년의 침묵』은 이런 측면도 잘 살려낸 전형적인 팩션이다.
장성규 | 지식권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 작품의 중요한 성과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지식을 소유한 지배계층과 소유하지 못한 시민계층간의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이분법적으로 처리한 점은 다소 거칠어 보인다. 특히 무지한 시민계층의 ‘폭동’으로 결말을 처리하는 부분은 일종의 정치적 보수성을 강하게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성과를 의심하게 만든다.
서희원 | 주인공이 지식의 권력화를 비판하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수행하지만, 소설은 헐리우드적 방식으로 귀결된다. 주인공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또 다른 지식권력이 형성된다. 문학적 결말이라면 이런 류의 손쉬운 결말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분명 새로운, 뉴웨이브적 속성을 보여주지만, 먼저 고민할 것은 무엇을 위한 ‘뉴’인가에 대한 성찰이 아닐까 싶다.
박 진 | 이 결말이 정치적 보수성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에 변화의 불가능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이런 암담한 상황에 대한 비판적 시선 또한 소설 안에 담겨 있다.
장성규 | 한편 이 소설이 소재주의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일반적인 팩션과 다른 매력은 당대의 특정한 지적 풍토 속에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를 녹여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 소재로서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이를 둘러싼 학파 내부의 논쟁들이 지니는 철학적 함의랄까, 그런 부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희원 | 나도 그 점을 지적하고 싶다. 수학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사용했는데, 작품 내에서 수학은 학파의 입학시험 문제 정도에서만 등장하는 것 같다. (웃음) 그리고 수의 비밀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카피에 나와 있는데, 피타고라스 수학의 어떠한 측면이 당대 권력과 결합되는지, 그리고 피타고라스 수학이 지닌 철학적 특성은 무엇인지 등이 거의 서술되지 않는다. 이런 점이 작품의 매력을 감소시킨다.
박 진 | 유클리드 기하학은 뉴턴 물리학과 함께 근대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피타고라스 학파가 상징하는 세계관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장성규 |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당시 피타고라스 학파가 자신을 유일한 진리로 형성하는 과정에서 억압하고 배제했던 다른 학파나 개인들의 견해들이 풍부하게 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부분들이 등장했다면 공식적인 수학사-역사가 간과한 다른 철학적 세계관들에 대해 고민해볼 여지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게 공식 역사서술이 아닌 팩션만이 지닐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
서희원 | 왜 배경을 굳이 고대 그리스로 설정했는지도 궁금하다. 한국이란 익숙한 역사와 사회적 자양을 배제한 채 고대 그리스를 가져왔다면 그것이 특정한 효과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작가가 밝힌 창작의 모티브가 ‘피타고라스’이긴 하지만, 그 모티브 이상의 것을 의도했다면 공간적 배경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충분히 한국을 배경으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예컨대 실학과 성리학의 대결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박 진 | 한국적인 배경이나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문제는 그 속에서 우리 현실에 대해 어떤 통찰을 이끌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 소설에서 지식의 권력화 문제는 전문지식이 더 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일 수 없는 지금의 상황과 연결하여 읽어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전형적인 팩션들이 그렇듯이 이 소설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보다는 권력 일반의 폭력성을 다루는 데 치중하고 있긴 하지만.
장성규 | 이 소설과 관련해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추리나 스릴러적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지만, 이 작품에서 이러한 기법은 훨씬 강도 높게 나타난다.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인 만큼 장르 문법이 전면화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이 소설의 추리적 기법이 조금 재미없었다. 뭐랄까, 추리라고 하면 독자가 작품 안에서 스스로 단서를 찾으면서 예측하는 재미랄까, 그런 지적인 매력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이 소설에는 지적인 추리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 진 | 정통 추리물과 스릴러물에는 차이가 있다. 정통 추리물이 단서를 추적하여 범인을 찾는 지적인 탐색의 과정을 중심에 둔다면, 스릴러에서는 탐정이자 잠재적인 희생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에 휘말리면서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된다. 스릴러는 정통 추리물의 변종이라 할 수 있고, 팩션은 스릴러와 역사물이 결합된 혼종장르이다. 장성규 씨가 기대한 것은 정통 추리물의 치밀한 탐색 과정이었던 것 같은데…
서희원 | 그렇다고 해도 아쉬운 점이 많다. 살인자도 너무 쉽게 밝혀지고, 주인공의 분노 역시 너무 쉽게 사라져 작품의 긴장을 결말까지 끌고 가지 못한다. 특히 주인공은 형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자신이 성취한 사회적 기반을 모두 버리고 학파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연히 담장 사이의 빈 공간을 발견하면서 너무나도 쉽게 학파와 도시를 오간다. 이런 점은 서사적 완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박 진 | 역시 살인자를 밝혀내는 추리의 과정보다, 피타고라스 정리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부각되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 같다. 팩션 자체가 비교적 새로 등장한 혼종장르인 건 분명하지만 이제는 팩션도 익숙한 장르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으니, 팩션의 전형적인 관습을 되풀이하기보다 그 관습을 변형하고 넘어설 수 있는 또 다른 시도들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아까 두 분이 말해줬던 에코의 소설이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처럼, 장르적 매력과 철학적 사유가 결합된 소설들이 우리 문단에서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장성규 |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문학의 범위가 굉장히 좁다는 생각이 든다. 매우 다양한 장르 문법들이 창출되고 있는데, 실상 이런 부분들에 대해 기존의 비평가들이 조금 간과해온 것은 아닌가 싶다. 오늘 네 권의 문학상 수상작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들 작품들이 나름의 새로움을 보여준다는 점이 주목된다. 기법적으로나 소재적으로나, 주제의식 역시도 그렇고… 적어도 기존의 문학상 수상작과는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박 진 | 출판시장과 문화 환경 전반이 변화하고 있으니 문학상 또한 이전의 기준만을 고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문학상 수상작들의 변화는 당연히 지금의 변화된 상황들, 이를테면 리얼리티 감각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 우리 삶에서 대중문화 텍스트들이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 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다만 문학상 제도가 이들의 새로움을 ‘문학적 권위’로 포장하거나 엄연히 존재하는 출판시장과의 관계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변화된 경향 안에서 더 좋은 작품들을 선별하는 것이지, 이들 작품을 기존의 문학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장성규 | 좋은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콘셉트의 문학상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학적 경향과 독자들의 감수성 변화를 능동적으로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판시장의 상업논리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서희원 | 우리가 보통 순문학 또는 문단문학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교육하고 창작하고 평가하여 유통시키는 시스템은 매우 강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반면 장르적 경향의 작품들은 이러한 시스템이 약하다. 새로운 문학상을 통해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시도가 활발히 일어나는 것 같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잘못 구획된 이분법을 재정리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다만 아직까지 충분한 작품적 성과가 장르문학 쪽에서 나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장성규 | 나 같은 경우 일종의 B급 문화, 하위 문화의 비제도성이랄까, 그런 점이 자칫 제도에 포획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든다. 물론 장르문학이 문학상을 수여받고 이를 통해 활발히 창작, 유통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자칫 장르문학의 하위 문화적 성격을 제도의 획일성이 장악하게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박 진 |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본격문학이라는 제도 내부 입장에서 장르문학 쪽에 대고 ‘너희는 하위 문화적 전복성을 지켜야 하니 제도권 밖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습지 않나? 결과적으로 장르문학에 대한 기존의 배타적인 태도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나는 오히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