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진 | 오늘은 좀 색다른 분위기로 좌담을 시작한다. 장소도 더 아늑한 카페로 옮겨봤고, 무엇보다 <비평테이블>의 비밀병기, 장성규 씨가 우리 팀의 새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다. 환영한다. 간단히 소감이나 각오 한 마디.(웃음)
장성규 | (웃음) 재밌을 것 같다. 열심히 하겠다.
김남혁 | 반갑다.
박 진 | 장성규 씨, 김남혁 씨와 함께 오늘 이야기 나눌 주제는 스크린(screen)과 베스트셀러(bestseller)의 합성어인 ‘스크린셀러’ 현상이다. 소설이 영화화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영화화된 이후에 원작이 독자들의 더 큰 사랑을 받는 경우도 많이 있어왔지만, 지난해에는 스크린셀러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영화 <뉴문>과 함께 스테파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고 『용의자 X의 헌신』과 『백야행』 등 일본 추리소설도 영화 개봉 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영화 <셜록 홈즈>의 영향으로 『셜록 홈즈 전집』도 큰 인기를 끌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는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작가의 다른 소설들도 함께 큰 관심을 얻고 있다.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 역시 영화 개봉 소식이 들리면서 다시 가파르게 판매부수가 늘었다. 『더 로드』의 경우는 영화가 좀 재미없어서 영화가 나온 ‘이후’의 반응이 더 눈에 띄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장성규 | 좀 많이 재미없었다.(웃음)
박 진 |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원작을 찾아 읽는 경우뿐 아니라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는 독자들도 많은 듯하다. 우선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두 분은 평소에 영화를 얼마나 즐겨보는지, 또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김남혁 | 내 경우는 영화 자체를 특별히 좋아하진 않는 편이다. 소설 전공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소설은 머리를 쓰려고 읽는다면 영화는 머리를 좀 식히기 위해서 본다. 특별히 어떤 영화를 찾아서 보거나 원작과 비교하면서 분석적으로 영화를 본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 오늘의 좌담을 위해서 영화 <더 리더>, <더 로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원작과 함께 감상한 것은 무척 흥미로웠다.
박 진 | 나는 일단 즐길 수 없으면 머리도 쓰고 싶지 않던데.(웃음)
김남혁 | 박진 씨 경우는 영화를 무척 즐기는 편이라고 알고 있다.
박 진 | 그런 편이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소설 못지않게 영화를 좋아하고 스토리가 단단한 영화를 특히 좋아해서, 좋아하는 영화들 중에 소설이나 만화가 원작인 경우도 꽤 많다. 하나만 예를 들면, 영화 <렛미인>과 원작소설 『렛미인』은 느낌이 꽤 다르지만, 둘 다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다. 장성규 씨는 어떤가?
장성규 | 나도 김남혁 씨처럼 영화를 그다지 즐겨 보는 편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웃음) 영화 <박하사탕>이 나왔을 땐데, 설경구가 처음 고문을 끝낸 후 막 우는 장면에서 이상하게 거리가 느껴지면서 피식 웃음이 나온 적이 있다. 뭐랄까, 고문의 가해자가 미화된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면서 ‘어떻게 이런 심각한 장면에서 웃을 수 있지?’ 하는 표정을 짓더라. 영화를 볼 때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심성이나 감성을 공유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좀 불편하다.
박 진 | 잘 안 되는 건가? 비평적 거리 때문에?
장성규 | 비평적 거리 때문은 아니고… 왠지 잘 안 된다. 생각을 해보니까, 영화는 주어진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데 사유보다 이미지의 속도가 더 빠른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문자 텍스트는 나름대로 사유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데 비해서.
박 진 | 맞다. 소설은 독자마다 자기 리듬에 맞게 감상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반면에, 영화는 러닝타임이라는 일정한 시간 동안 영화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며 감상해야 한다. 이 점이 수용자뿐 아니라 영화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너무 난해하거나 복잡해지면 관객들이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리고, 그러면 결국 실패한 영화가 되고 마니까.
장성규 | 그래도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은 다른 영화들보다는 좋아하는 편이다. 문자 텍스트의 내러티브가 다른 매체를 통해 변형되는 모습을 보면, 원작에서 읽어내지 못했던 점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가 단순히 소설의 내러티브를 영상으로 그대로 옮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영화 문법이 지니는 고유성을 통해서 소설 문법이 보여주지 못하는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면 의미가 클 것이다. 반대로 소설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재현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 문법의 특성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박 진 | 중요한 지적이다. 좋은 이야기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더 많은 수용자들과 만날 수 있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원작을 ‘콘텐츠’로 보는 관점은 장성규 씨가 말해준 매체적 특수성의 측면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무정형의 ‘콘텐츠’가 매체들 사이를 변형 없이 자유롭게 흘러 다닌다는 식의 사고는 매체들 각각이 지닌 특성과 그로 인한 변형의 과정을 너무 간단히 삭제해버린다. 이런 관점은 또한 ‘좋은’ 이야기를 그저 ‘먹히는’ 이야기, ‘팔리는’ 이야기와 동일시하게 만들 우려도 있다. 서사적 가치를 산업적 가치로 대체하게 되는 셈이다.
장성규 | 소설 자체가 하나의 내러티브 구조물이라면, 이 내러티브가 영화든 게임이든 여러 다른 매체를 통해 변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학이 대단하고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건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문학의 신화이고. 그런데 중요한 건 원 소스(one source)로서의 원작의 가치는 아닐 것이다. 좋은 소설을 원작으로 했어도 그다지 좋지 못한 영화가 나올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건 주로 매체적 특수성을 얼마나 잘 살렸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고 본다.
김남혁 | 두 분 얘기를 듣다보니, 나는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를 볼 때 소설을 일종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런 태도는 소설을 읽는 일이 영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나도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이야기하면, 어릴 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나서 비디오로 임권택의 <태백산맥>을 본 뒤 무척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건 아마 열 권의 책이 비디오 두 개짜리로 손쉽게 처리된 데 대한 실망감이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한 수많은 사건들이 간단히 내레이션으로 처리되어서 허탈했다. 물론 영화 그 자체의 완성도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소설 열 권을 읽어냈다는 자부심을 강화하려는 포즈로 영화를 봤던 것도 같다. 자부심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더 실망해야 했고, 소설이 영화에 대한 고고한 평가 기준이어야 했다.
박 진 | 나는 그런 생각이나 경험을 해본 적은 없지만… 단편소설에서 모티프만 취해 영화화하는 경우 말고, 장편소설을 영화 한편으로 만들 때는 원작소설의 많은 요소들이 축소되고 간추려진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두 시간 내외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편소설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점들이 영화에서는 한 가닥으로 모아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대하장편소설은 말할 것도 없겠다.(웃음) 영화화되면서 발생하는 이런 현상이 좀 아쉬운 일일 수도 있지만, 그건 확실히 ‘영화적인’ 선택이나 ‘영화적인’ 해석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장성규 | 그렇다. 내러티브 자체의 밀도는 소설이 영화보다 치밀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원작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소설을 먼저 읽는 편을 선호하는데, 내러티브를 충분히 이해한 후에 영화를 보면 내러티브 구조가 포괄하지 못하는 일종의 잉여나 결핍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상 매체가 지니는 특성 때문에 내러티브의 이런 상대화가 가능해진다. 소설을 읽다보면 여주인공이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었을까, 주인공이 좋아하는 담배는 뭘까, 뭐 그런 게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지 않나?(웃음) 이미지 샷 하나로 소설에 없는 그런 측면들을 채워주고 살아나게 하는 점이 영화에서는 참 재미있다. 이런 것이 매체간 차이의 단적인 예일 것이다.
박 진 | 구체적인 텍스트를 놓고 좀 더 이야기해보자. 최근 주목받은 스크린셀러 『눈먼 자들의 도시』, 『더 리더』, 『더 로드』 가운데 어떤 작품이 특히 좋았나?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함께 얘기해보자.
김남혁 | 소설은 세 편 모두 좋았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더 리더』이고, 그 다음이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영화는 <더 리더>가 가장 좋았고, 그 다음이 <더 로드>다. 솔직히 말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재미없었다. 그러니까 영화도 소설도 모두 좋았던 것이 『더 리더』고, 소설은 좋은데 영화는 별로였던 것이 『눈먼 자들의 도시』다.
장성규 | 내 의견은 좀 다른데, 우선 나는 소설도 영화도 모두 『눈먼 자들의 도시』를 좋아한다. 소설의 경우 흔히 우리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미학적 실험과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가 잘 결합되어서 여러 가지 생각할 점들을 주는 것이 좋고, 영화의 경우 원작의 몽환적인 부분들이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 선명하게 제시되는 점들이 좋았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랄까, 이런 미학적 요소가 사실 소설에서는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주어지지 않는데 반해서,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이 아주 사소한 장면들을 통해서 인상적으로 제시된다. 내러티브 자체는 원작과 거의 동일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영상 매체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 잘 살아난 것 같다.
박 진 | 이를테면 화면 전체를 뿌옇게 처리해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실명(失明) 상태를 시각적으로 제시한다든지?
장성규 | 그렇다. 다만 마술적 리얼리즘이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 상상하게 만드는 반면, 영화 매체가 이를 선명한 장면으로 손쉽게 제시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김남혁 | 희뿌연 화면 처리를 통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관객들이 눈먼 자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하고 눈먼 자들이 받는 고통을 추체험하게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핵심은 오히려 ‘눈뜬 자’의 고통과 연대의식이다. 눈뜬 자인 의사의 아내는 눈먼 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녀는 두 개의 지옥, 그러니까 국가와 군인들의 공권력이 만드는 하나의 지옥과 공권력의 피해자인 눈먼 자들이 만드는 또 하나의 지옥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이 못 보는 지옥을 지켜보면서 의사의 아내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사실 이 소설에서 눈뜬 자는 의사의 아내 한 사람만은 아니다. 눈을 뜬 사람은 의사의 아내와 화자와 독자, 이렇게 세 명이다. 의사의 아내가 느끼는 고통과 책임감은 곧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와 자신을 시종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눈먼 자들의 지옥을 못 본 척하지 않는 책임감을 이끌어낸다.
박 진 | 정말 그렇다. 소설에 수시로 나오는 ‘우리’라는 호명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남혁 | 그런데 영화에서는 ‘우리’라는 인칭으로 개입하는 화자의 효과가 사라져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당신(관객)은 유일하게 눈뜬 자이니, 의사의 아내와 같은 고통과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각성을 유도하지도 못한다. 그저 영화는 눈먼 자들의 고통을 관음증적으로 구경하게 한다. 원작과 다르게 영화는 눈이 보이는 자들의 고통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에서 의사의 아내는 소설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박 진 | 날카로운 지적이다. 사실 이 소설은 ‘영화화가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텍스트를 온통 뒤덮고 있는 화자의 논평들을 영상으로 번역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눈먼 자들로 이루어진 수용소의 끔찍한 지옥을 ‘리얼하게’ 스크린에 담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했다면 영화는 눈먼 자들이 엎어지고 기어 다니고 부딪히는 장면들을 하염없이 보여줘야 했을 테니 스토리 진행이 엄청나게 느려졌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눈먼 자들의 배설물로 더럽혀진, 물도 안 나오는 수용소의 참상은 관객들이 보기에 참을 수 없이 역겨웠을 것이다. 누가 그런 불쾌한 영화를 보고 싶어 하겠는가? 영화는 그런 끔찍한 지옥을 시각화하는 불가능하고도 ‘위험한’ 선택을 하는 대신에, 헌신적이고 책임감 강한 의사의 아내를 중심으로 눈먼 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덜 끔찍한 광경을 연출했다.
김남혁 | 맞다. 나는 영화 속의 지옥이 생각보다 별로 끔찍하지 않아서 좀 시시했다.
장성규 | 그런 측면이 매체적 차이이고, 영화적인 특성은 아닐까?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평가되는 소설을 영상으로 만들면서 나타나는 독특한 변형으로, 오히려 매력적인 측면이라고 볼 순 없을까?
박 진 |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매체적 특성으로 인한 변형은 메시지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놓는 경향이 있다. 의사의 아내가 겪는 내적인 고통,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싶어 하는 소심함이나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데서 오는 부담감 같은 것들이 말끔히 지워지면서, 영화에서 그녀는 마치 영웅적인 구원자처럼 묘사된다. 소설은 의사의 아내가 갈등하고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성찰의 시선을 드리운다. 화자의 장황하고 아이러니한 목소리 역시 이런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런 측면들이 모두 누락되면서 영화는 반대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문명의 가치 같은 뻔한 메시지를 되풀이한다.
장성규 |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영화화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은 아닐 것이다.
박 진 | 물론 그렇다. 하지만 어떤 게 원작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두 텍스트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어느 쪽 메시지가 더 의미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스토리를 거의 변형하지 않았는데도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매체적 특수성과 그로 인한 변형에 더욱 더 민감해져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제 다음 소설로 넘어가보자. 김남혁 씨가 『더 리더』는 매우 좋았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를 듣고 싶다.
김남혁 | 나는 워낙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더 리더』가 사랑이야기라서 우선 좋았다.(웃음) 『더 리더』는 쉽게 말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1부에서는 미하일과 한나의 사랑이 엇갈리는 과정을 통해 타인과의 낭만적인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재판 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2부에서는 정의를 내세우는 법이 타인의 고통을 단순하게 판가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명목상 법은 나치의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법은 나치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나치에 자발적으로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 어쩔 수 없이 나치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나치의 또 다른 희생자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법과 정의를 맹신하는 자들의 단죄는 나치의 폭력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이 2부에서 드러난다. 특히 소설의 3부가 중요하다. 한나의 출감을 앞두고 미하일은 자신의 낭만적인 사랑이 깨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적인 사랑은 한나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마비증세”(110쪽)이다.
박 진 | 공감한다. 나는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웃음) 김남혁 씨와 같은 이유로 이 소설은 무척 좋았다. 낭만적인 사랑의 환상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협소하고 얄팍하게 만든다면, 그 환상을 흔들어놓고 되돌아보게 하는 사랑이야기들은 인간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김남혁 | 좀 더 보충하자면, 미하일은 한나가 자신과 낭만적인 사랑을 나눴던 인물이면서 동시에 유태인을 죽였던 전범자이기도 하다는 사실 가운데, 전자인 하나만을 취하려고 했다. 한나의 출감은 한나의 두 가지 모습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미하일은 전범자인 한나와 연루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한나를 사무적으로 대한다. 한나를 끝내 자살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유태인을 죽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그녀의 죄책감이 아니라 낭만적인 사랑이 깨지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미하일의 사무적인 태도에 있다. 한나를 감옥에 가둔 것이 무정한 법이라면, 한나를 죽인 것은 무정한 미하일이다.
박 진 |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추억을 보존하기 위해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 속에 방부처리 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현재 모습을 수용할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이를 회피하거나 부인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더 리더』에서 무척 마음에 와 닿았다.
장성규 | 이번에도 나는 생각이 좀 다른데… 왜 이럴까?(웃음)
박 진 | (웃음) 아, 더 좋다. 다른 의견을 듣고 싶다.
장성규 | 소설의 경우 주인공 ‘나’(미하일)의 입장에서 모든 일들이 서술되다보니까, 특히 나치즘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편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에서는 수용소 생존자의 직접적인 발화를 통해 이에 대한 성찰이랄까,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이런 부분이 어쩌면 영화가 소설보다 잘 구현할 수 있는 점이 아닐까 싶었고… 그런데 막상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지나치게 간략하게 봉합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수용소 생존자와 한나간의 법정 논쟁이라든가, 영화 말미에서 생존자와 미하일이 만나는 장면의 강렬한 발화 같은 것들을 기대했는데, 이런 부분이 영화에서도 모두 주인공의 관점으로 통어되어버린 느낌이다.
박 진 | 지금 해준 얘기는 소설과 영화의 매체적 특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문제인 것 같다. 소설의 영화화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일인칭’ 화자의 문제다. ‘일인칭’ 소설에서 ‘나’의 관점은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한계와 약점을 지닌 한 인물의 것으로 제한돼 있다. 이 사실을 독자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의 목소리는 텍스트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전체를 장악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 가령 배우가 카메라를 손에 들거나 몸에 매달고 촬영하는 경우, 또는 아예 카메라가 배우를 대신하는 경우 정도를 빼면, ‘일인칭’ 서술이 불가능하다. 보통 영화는 인물 바깥에서 촬영하는 카메라의 ‘중립적인’ 시선에 의해 이야기가 서술되고, 그래서 영화의 관점이 특정 인물에 치우쳐 있는 경우라도, 그렇다는 사실 자체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인칭’ 소설을 영화화할 때 카메라가 주인공 ‘나’의 관점과 입장에 밀착돼 있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중립적인 시선인 양 행세하면, 뜻하지 않게 이데올로기나 메시지에 미묘하거나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영화 <더 리더>에서도 카메라의 외부적인 시선이 여전히 미하일의 입장에만 밀착돼 있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화자와 관련된 매체적 차이에 대한 각별한 자의식이 없을 경우, 영화는 ‘일인칭’ 소설보다 훨씬 더 편협해질 수 있다.
장성규 | 정말 그런 것 같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영화 속에서 다른 목소리들의 충돌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서 무척 아쉬웠다. 특히 68세대를 대표하는 남학생의 목소리가 전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고 ‘나’의 시선으로 왜곡된 채 묘사된 것이 실망스러웠다. 영화에서 68세대의 목소리는 독단적이고 철없는, 게다가 매우 무책임한 톤으로 처리된다. 소설에서는 적어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희화화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영화에서는 그렇게 보여 상당히 불편했다.
박 진 | 이해할 만하다. 사실 소설과 영화 모두 『더 리더』는 홀로코스트 문제와 관련해 불편한 점을 지니고 있다. 이 문제를 도덕적인 측면에서 정면으로 다룬 이야기라기보다는 앞 세대가 저지른 끔찍한 죄를 어떻게 이해하거나 평가할 것인가 하는 독일적인 고민과 난감함과 머뭇거림 같은 것을 담고 있는데, 어쨌든 홀로코스트 문제를 꺼내놓고 슬쩍 비껴갔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도덕적 관점을 좀 더 전면에 내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에서 더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사랑의 문제와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문제다. 특히 『더 리더』에는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살인죄로 비난과 처벌을 받는 것보다 글을 모른다는 수치심이 개인에게 더 큰 고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쟁점으로 떠오른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인 죄나 법적인 처벌보다 한 개인에게 더 치명적인, 내밀한 상처나 비밀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소설과 영화 모두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어느 정도 열어 놓고 있다.
김남혁 | 한편 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소설보다 더 선명하게 한나의 캐릭터를 포착해내고 있어서 참 흥미로웠다. 자전거 여행 중에 한나가 메뉴판을 읽지 못해 당황하는 장면 같은 건, 한나의 콤플렉스를 소설과는 달리 한 컷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장성규 | 중요한 얘긴 아니지만, 가해자라면 가해자라 할 수 있는 한나가 영화 속에서 너무 예쁘게 나온 것도 좀 불편했다.(모두 웃음)
박 진 | 나는 이 영화가 소설 속 한나의 이미지를 너무 잘 살려냈다고 느꼈는데…
장성규 | 그런가? 예전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볼 때도 사형수가 너무 잘 생겨서 사형제도에 대한 관객들의 객관적인 판단이 좀 흐려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물론 사형제 폐지에는 동의하지만 말이다.
박 진 | 아, 강동원이 나왔던!(웃음) 하긴 꽃미남 꽃미녀가 스크린을 점령하면 그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
장성규 | 그리고 한나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점도 좀 불편했다. 홀로코스트의 문제를 손쉬운 화해로 해소시키려 한다고나 할까?
박 진 |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시각적 이미지의 즉각적인 강렬함은 영화의 확실한 매력이지만, 그래서 또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더 리더』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는 달리, 소설 자체가 무척 영화적이지 않나? 몸이 아픈 미하일이 건물 앞에서 처음 한나와 만나는 장면도 그렇고, 욕조가 달린 한나의 방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장면도 그렇고,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대목들이 참 많았다.
김남혁 | 소설을 읽을 때도 자전거 여행 장면이 참 좋았고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됐을까 궁금했는데, 영화에서도 역시 그 장면이 너무 좋았다.
박 진 | 좋다. 그럼 이제 『더 로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실 나는 『더 로드』가 영화와 소설 모두 좀 지루했는데, 다른 분들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장성규 | 나는 영화보다 소설이 훨씬 좋았다. 소설 『더 로드』는 끊임없이 폐허가 된 세계에서의 인간의 윤리랄까, 그런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느꼈다. 내러티브 자체는 매우 단순하지만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문체나 묘사 같은 것들이 잘 살아 있었고. 반면 영화의 경우에는 이 점을 놓친 것 같다. 지나치게 원작의 내러티브에 충실한 나머지, 역으로 단순한 폐허의 이미지만을 반복해서 제시했다고 할까? 이 과정에서 사유할 만한 특정한 영화적 장치가 없었던 것 같다. 소설에서 아이가 지니는 함축적인 의미들도 영화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었고, 주인공의 내적인 고뇌 같은 것들도 지나치게 단순하게 처리된 느낌이다.
김남혁 |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모두가 눈멀었을 때 혼자 볼 수 있는 게 고통이었듯이, 『더 로드』는 모두가 죽은 땅에서 살아남은 게 행운이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의 관객은 이런 지옥 같은 현실의 모습이 화면으로 어떻게 형상화되었을지 궁금히 여길 텐데, 영화는 관객의 이런 요구에 잘 대응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핵심은 끔찍한 현실의 묘사라기보다 수용자의 마음을 찌르는 단순한 대화들일 것이다. “우리가 도와줄 수 없나요? 아빠?”(59쪽), “우린 아무도 안 잡아먹을 거죠, 그죠? //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니까요”(147쪽), “아빠 제발 저 사람 죽이지 말아요”(289쪽) 같은 소년의 말들. 그런데 영화에서는 찌르는 대사보다 압도적인 현실이 강조돼 있다.
박 진 | 두 분 의견이 비슷하다. 왜 나는 그런 대목에서 감동이 안 왔을까? 나쁜 사람인가 보다.(웃음) 세상의 종말이 와도, 신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아도 ‘착한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는 좀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졌다. 묵시록적인 상상력도 새삼 새로울 것이 없고.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신의 존재를 믿을 것인가 하는 신학적인 질문들도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기독교적인 서구 문화에서는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주제가 너무 선명하기도 하고, 새로운 ‘착한 가족’ 품에 안기는 것이 무슨 구원처럼 그려진 것도 불만이다. 혹시 소설이 너무 고평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장성규 | 그런 면이 좀 있긴 하다. 미국인의 탈레반에 대한 공포가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싶다.
김남혁 | 장편소설로서는 문제의식이 그다지 입체적이지 않다는 건 약점인 것 같다.
박 진 | 영화에서도 종말의 폐허가 훨씬 더 강렬하게 부각된다는 점 외에, 매체에 따른 색다른 변형이나 새로운 해석은 없었다.
장성규 | 그렇다. 그래서 영화는 재미가 없었는데, 특히 무채색의 폐허 위에 너무나 도드라져 보이는 빨간색 코카콜라 캔이 눈에 거슬렸다. 소설에서는 잘 몰랐는데.
박 진 | 세 편의 소설과 영화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이제 스크린셀러 현상에 대해 더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눠보자. 스크린셀러 현상은 문화산업의 마케팅 효과라는 측면과 수용자들의 능동적 참여라는 이중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두 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장성규 | 대중들이 영화를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원작소설을 찾아 읽는 것이 단지 문화산업이라는 메커니즘의 효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영화에서 충분히 형상화되지 못한 내러티브의 핍진성이랄까, 특히 인물의 내면이나 특정 장면의 묘사 같은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욕망이 클 거 같다. 관객들도 영화가 원작의 내러티브를 압축적인 사건 전개와 이미지로 풀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영화에 매력을 느꼈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 내러티브의 매력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만 아까도 말했지만, 이 과정에서 각각의 매체의 차이를 묻어버린 채 어떤 영화의 원작이라는 점만이 강조되는 것은 문제일 것 이다. 이렇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문학 서적 판매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문학 텍스트의 고유성을 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김남혁 | 나는 오늘 좌담을 하는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사실 나는 최근의 변화된 상황과는 달리 스크린셀러 현상에서는 원작의 가치가 리메이크 된 작품보다 우월하게 평가된다고 느꼈었다.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시대는 원작만이 리메이크 된 작품의 기원으로 높이 평가되던 시대가 아니다. 리메이크 된 작품은 그 자체로 원작과 다른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스크린셀러에서는 마치 과거로 회귀한 것처럼 원작의 가치가 부각된다. 영화 관계자들은 원작소설이 베스트셀러였다는 점이나 소설의 미학적 가치나 소설가가 받은 권위적인 상의 목록 등을 전면에 내세워 영화를 광고한다. 리메리크 된 영화 그 자체가 지닌 독특한 성격이나, 리메이크 된 영화가 소설과 변별되는 특성 등등을 강조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생각해보니 영화가 원작의 권위를 마케팅에 활용하듯, 원작은 영화에 기대어 소설을 홍보한다.
박 진 | 물론이다. 책 표지에 영화 포스터가 등장하거나 여배우 사인본 한정판이 나오는 경우(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영화 제목에 따라 원작소설의 제목을 수정하여 재출간하는 경우(이지민의 『모던보이』) 등에서 원작은 오히려 영화를 모방한다. 원작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크린셀러가 원작의 권위를 강화한다면, 그건 ‘판권’으로서의 경제적 가치를 원작의 권위로 오해하거나 오도(誤導)한 결과일 것이다.
김남혁 | 나는 원작의 권위를 주장하는 마케팅 전략에 대중들이 효과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있었다. 극장에서 관객들은 원작이 대단한 작품이고, 원작은 베스트셀러고, 원작을 쓴 사람은 대단한 작가다 등등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극장을 나오면 당연히 영화의 기원이 되는 원작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행여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관객이었다고 해도,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보는 것이 영화를 보지 않고 소설을 보는 것보다 이해하는 데 노력이 적게 들기에, 영화관을 나온 후 자연스레 소설을 펼치게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영화를 보기 전에 일부러 소설을 찾아 읽는 대중들의 욕구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러티브의 매력을 느끼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 행위로 보기도 어려울 것 같다.
장성규 | 그렇다. 수용자들이 스스로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랄까,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주어진 영화나 소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원작을 비교하면서 하나의 텍스트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었던 또 다른 의미들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점은 굉장히 큰 의의를 지닌다고 본다. 좀 다른 예인데,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오발탄」을 소설과 영화로 보고 비교해본 적이 있다. 소설에서는 전후 시대의 지식인의 고뇌랄까, 그런 게 잘 드러나는 반면, 사실 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점이 많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소설에서 거의 발화하지 못하는 인물인 여동생 명숙의 삶이나, 당대 구체적인 해방촌의 모습이 여러 가지 오브제를 통해서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매체의 텍스트를 본다면 문학이나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능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 진 | 장성규 씨가 긍정적인 의의를 잘 정리해주었으니, 나는 이 현상의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성격을 좀 더 강조하고 싶다. 틀 안에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만 소비하고 즐긴다면,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화산업의 시스템에 의해 조사, 분류, 목록화 된 상품들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이 촘촘한 문화산업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자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헨리 젠킨스가 『컨버전스 컬처』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미디어에 대한 ‘충성도’가 낮아지고 있다. 여러 미디어 채널에 걸쳐서 이야기의 조각들을 찾아내고 수집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더 풍부한 엔터테인먼트 경험을 얻고자 한다. 특히 과거의 소비자들이 서로 고립된 개인들이었다면, 새로운 소비자들은 긴밀하게 네트워킹 되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기존의 소비자들과 달리 지금의 소비자들은 시끄럽고 공공연하게 자기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런 새로운 욕구가 문화산업의 예정된 틀을 초과하고 파열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때, 진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성규 | 동감이다. 좀 이상적인 얘기지만 예술의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룬 『더 리더』를 영화로 보고 난 후, 주인공의 입장이 아니라 한나의 입장에서, 혹은 수용소 생존자의 입장에서 내러티브를 새롭게 상상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아니면 주인공의 다음 세대인 딸의 입장에서 68세대, 혹은 그 이전 세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가능할 테고. 개인적으로는 요즘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을 굉장히 재미있게 보는데, 흥미로운 점은 인터넷 상에서 팬들이 스스로 에피소드를 창작하고 공유한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거지만, 사실 이런 문화가 광범위하게 형성되는 것이 예술의 대중화에 걸맞은 민주화, 뭐 그런 가치와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박 진 | 정말 중요한 얘기다. 장성규 씨가 언급한 팬덤의 파생서사 만들기나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패러디 같은 것들은 앞으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는 현상들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종종 문화산업의 기획자나 생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그들의 의도와 바라는 바를 넘어서 버리기도 한다. 대중은 예측불허이고, 단일하거나 균질적이지 않다. 그 잠재력과 ‘무리지성’(swarm intelligence)의 역량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수용자들의 적극적인 대화와 담론 만들기도 같은 맥락에서 큰 의미를 띤다. 웹진 ‘나비’와 <비평테이블>도 이 과정을 활발하게 매개하는 담론의 장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이런 말로 좌담을 마무리하게 되니, 오늘따라 더 뿌듯한 마음이 든다.(웃음) 다음 달에는 장성규 씨, 서희원 씨와 함께 또 다른 주제로 뜻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것을 약속드리며, 오늘의 좌담은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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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