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혁ㅣ반갑다. <비평테이블> 세 번째 만남이고, 새해 첫 만남이다. 오늘 우리는 김훈의 신작 『공무도하』를 놓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김훈 소설은 작가 스스로도 말했듯이 주제적으로나 문체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독자들이 그의 소설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지겨워하지 않고 말이다. (웃음)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좌담을 시작하자. 먼저 긴장도 풀 겸 각자 김훈과 그의 소설에 대해 말해보자.
서희원ㅣ개인적으로는 김훈을 에세이스트로 먼저 알게 되었고, 그의 문체에 매료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특히 『풍경과 상처』나 『내가 읽은 책과 세상』같은 에세이를 읽으면서 김훈의 열광적인 독자가 됐다. 황지우 시에서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를 놓치지 않는 김훈의 이지와 감성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최근에 발표된 김훈의 산문과 소설을 한자리에 앉아 연속적으로 읽지 못한다. 예전에 읽었던 글의 동어반복이 많고, 김훈의 압도적인 문체 속으로 들어가면 내 생각을 자유롭게 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읽다보면 나중에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훈이 발표한 여러 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쭉 읽다보면, 내가 글과 사유의 뷔페에 오긴 했는데 단 한 종류의 음식으로 차려진 뷔페에 온 기분이 든다.
박 진ㅣ재미있는 비유다. 일단 나는 우리 팀의 유일한 여성멤버이니…, 여자 맞나? (웃음) 아무튼 여성독자로서 느낀 점을 말하고 싶다. 김훈을 두고 마초적이라거나 남근주의자라거나 하는 말들이 많은데,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별로 많이 느끼진 못했다. 작가 김훈에 대한 이야기나 김훈 자신이 직접 밝힌 세계관이 소설에서 변하지 않고 그대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다만 김훈 소설에서 불편한 점은 여성의 몸을 신비화하는 남성의 시선이다. 「언니의 폐경」이나 「화장」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은 대단히 신비화되어 있다.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들을 억압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대단히 신비로운 존재로 보는, 그 남성 판타지가 불편하다. 양쪽 모두 여성을 대상화, 타자화하는 태도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고 말이다. 특히 김훈이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여성의 신체나 생리현상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더 이상하고 거부감이 든다. 분명 남성의 시선으로 하는 말들인데 여자 목소리로 흘러나오니까, 리얼리티가 없기도 하고 좀 징그러운(?) 느낌도 든다.
김남혁ㅣ서희원 씨가 말한 대로 김훈 소설과 에세이에는 동어반복적인 면이 있긴 하다. 그래서 분명 연속해서 읽기 어렵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나는 김훈의 산문이나 소설을 읽으면, 내 아버지가 쓰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밥벌이를 하기 위해 느꼈을 열패감과 배신감과 허무함 등을 미약하나마 이해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을 수 없는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들을, 그것이 아무리 동어반복적이라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많이 듣고 싶다. 내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박 진ㅣ착한 아들이네. (웃음)
김남혁ㅣ(웃음) 한편, 박진 씨가 김훈의 세계관과 소설을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주었다. 좋은 지적이다. 먼저 김훈의 세계관, 또는 항간에 떠도는 김훈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인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서희원ㅣ나 역시 김훈이 인터뷰에서 한 말과 김훈이 쓴 소설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인터뷰에서 김훈이 한 발언에는 스스로의 무의식이랄까, 살아온 경험을 통해 다져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예컨대 ‘남자가 여자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라는 발언은 오랜 시간 지속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를 염두에 둔 발언 같다. ‘선천적 남녀 불평등론’에 대해 그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남성적 무의식에서 비롯되었고, 여성을 힘들게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남자만의 도덕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 때문에 마초라는 말도 듣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선비라고 칭한다. 마초와 선비, 이 간극이 중요하다. 그에게 있어 소설은 사적인 무의식과 공적인 윤리 의식의 접경에 놓여 있다.
김남혁ㅣ나는 김훈이 인터뷰에서 했던 위악적인 발언, 이를테면 진보 인사들은 예술에 있어 민중적인 것과 천민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며, 거대담론은 무조건 오류이기에 세상은 변할 수 없다 등등의 발언이 진심어린 위악이기를 바란다. 김훈의 위악이 공격하는 대상은,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그 명분과 어긋나는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예술의 미학적 특징마저 평균화시키려는 사람들, 거대담론을 내세우면서 거대담론에 억압된 개인들의 미세한 문제들에 둔감한 사람들, 이렇게 자신의 세계관을 위선적으로 추구하거나 그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김훈은 공격한다. 보수적인 사고로 진보진영의 위선을 깨뜨리기에 어쩌면 그는 『구월의 이틀』에서 장정일이 말한 우익 청년의 성장 모델로 볼 수도 있다.
박 진ㅣ김훈의 인터뷰 내용에서 강한 것은 우월하고 약한 것은 열등하다는 힘의 논리, 천민적인 것(또는 대중적인 것)에 대한 귀족주의적 혐오, 변혁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 등이 드러난 발언은 『구월의 이틀』에 나오는 ‘은’의 생각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내가 보기엔 역시 그 자체로는 무서운 세계관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김훈 개인의 발언과 김훈 소설이 곧바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 개인의 세계관이 소설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소설에서는 그것이 굴절되고 주름지고 다른 목소리들과 겹쳐져서 훨씬 더 복잡해지는 측면이 있다. 작가가 지사나 인문 지식인으로 인식되던 시대는 지났다. 작가의 육성에서 가르침을 구하려는 태도 역시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작가의 직접적인 발언에 맞추어 소설을 해석하는 일 또한 매우 단순한 접근방식이다.
서희원ㅣ김훈은 혁명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이 소설에서는 연대하지 않는 강한 개인을 그린다. 소설에는 독선과 아집이 필요하다고 김훈이 말할 때 거기에 담긴 특유의 균형감각들이 있는데, 그 부분이 소설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박 진ㅣ특유의 균형감각을 발견하는 것. 이 말에 동의한다. 그 외에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김훈의 시선, 우월하고 깨달은 자가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소설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세상의 이치란 다 그렇고,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다는 식의 허무주의는 보수주의와 통할 수 있는데, 이 점이 소설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김남혁ㅣ흥미로운 지적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다.
박 진ㅣ이를테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김훈의 시선이 투영된 인물이다. 이런 시선 때문에 이순신은 전쟁 영웅보다 더 고상하고 우월한 존재, 일종의 ‘실존적인 영웅’이 된다. 그런 이순신의 모습이 부각되면서 복닥거리고 아등바등하는 평범한 인물들은 더 누추하고 비루해 보이게 된다. 또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등에는 김훈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다. 『남한산성』에서는 ‘세상은 늘 그렇다’는 허무주의가 역사적 과거의 당대적인 특수성을 지우고 역사를 현재화하거나 초시간적 보편성으로 환원하는 양상을 띤다.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남한산성』)이라는 태도는 탈정치적인 허무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먹고사는’ 일의 절박함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 외에 다른 가치들은 모두 무화돼버릴 듯한 위험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서희원ㅣ하필 그 무렵이 지난 대선 때였다. (웃음)
박 진ㅣ그러게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측면들은 소설의 복합적인 맥락 안에서 다층적으로 해석된다. 예컨태 『남한산성』에서 독자들이 현실 정치권의 무능력이나 백성의 삶과 괴리된 정치적 수사들의 공허함을 읽어내고 뜨겁게 공감했을 때, 이 소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정치소설’이 될 수 있었다. 소설의 이런 가능성은 김훈 작가의 개인적인 발언을 넘어서는 것들이다.
김남혁ㅣ두 분이 잘 정리해주었다. 하지만 김훈의 직접적인 발언과 그의 소설은 구별된다고 해도, 그의 에세이와 소설은 주제적으로나 문체적으로 동어반복적이지 않나? 그의 에세이와 소설은 계급 간의 문제보다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해 집중한다. 하찮아 보이는 밥벌이를 하루도 거스를 수 없기에 인간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다. 이게 김훈의 문제의식이다. 이순신이 말해도 우륵이 말해도 소방관이 말해도, 아니면 자본주의 이전의 인물이 말해도 자본주의 이후의 인물이 말해도, 모두 동일한 문제의식과 문체가 드러난다.
서희원ㅣ 또 산문의 문장으로 말해도 소설의 문장으로 말해도 그렇다.
김남혁ㅣ맞다. 에세이스트 김훈의 문제의식과 소설가 김훈의 문제의식이 장르 간의 대결로, 혹은 소설가와 등장인물 간의 대결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김훈의 문제의식이 계급의 문제를 넘어 인간 일반의 문제로 나아간다고 할 때 문제인식의 폭은 상당히 넓어 보이지만, 그의 글이 동어반복적이라는 사실은 그 문제인식의 폭이 역설적이게도 매우 협소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가 소설과 에세이와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문제의식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서희원ㅣ김훈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만, 그의 에세이와 소설은 동어반복이 많다. 그건 분명하다. 아마 김훈의 글을 꾸준히 읽어온 사람이라면 작가의 이름을 가린 채 글만 봐도 김훈의 글인지 아닌지 쉬이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무도하』가 이전의 동어반복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는지 아닌지는 이 좌담 자리에서 잘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인 것이고.
김남혁ㅣ물론이다.
서희원ㅣ김훈의 동어반복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다’라는 명제로 압축된다. 이는 『공무도하』에 등장하는 문정수의 기사 작성에서 잘 드러난다. 문정수는 기사를 작성할 때 스스로가 보았던 것들,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차단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문정수의 감각을 따라 읽으며 독자들은 문정수의 내면과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통해 무언가를 감각한다. 피안의 세계로 넘어간 사람들을 위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 넘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군집하며 살고 있는 곳, 그곳에선 아이가 죽고, 아비는 돈을 세며 울고, 사람들은 아프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에 아프고. 강을 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이를 김훈 소설이 형성한 ‘감각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공무도하』의 방만하게 퍼져가는 에피소드와 다양한 인물군상들의 모습에서 형성되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 즉 경계를 넘어 가거나 넘어가지 못하는 그 사이,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라는 ‘공무도하’의 경계 사이에서 형상화 되는 감각의 공동체이다.
박 진ㅣ『공무도하』에서 언어의 무력감에 대한 문정수의 자각은 『남한산성』과 통하는 면이 있고, 내면적 고통이나 비애를 밥벌이와 돈이라는 세속적 조건들과 병치하는 방식은 『강산무진』과 흡사하다. 이 외에도 인간이 비루하다는 세계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등이 『공무도하』에서도 반복된다. 특히 『공무도하』는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서 주인공인 소방관은 자신의 고단함을 7천 년 전이라는 빗살무늬토기의 시간과 포개놓는다. 세속적인 당대의 시간을 신화적인 시원의 시간 속으로 밀어 넣어, 인간의 누추함과 비루함을 그나마 견딜 만하게 만드는 방식이랄까. 이와 유사하게 『공무도하』에서도 “다가갈 수 없고 긍정할 수 없는 죽음들”(137쪽)과 그 ‘난폭한 무의미’는 패총(貝塚)이 쌓인 1만 년의 시간과 공룡 발자국에 찍힌 2억 5천만 년의 시간 속에 투영돼 한순간 ‘아득해진다.’ 타이웨이 교수라는 인물과 그가 쓴 『시간 너머로』도, 이렇듯 ‘시간 너머’를 보는 아득한 시선을 드리우는 역할을 한다.
김남혁ㅣ듣고 보니 정말 『빗살무늬토기의 추억』과 비슷하다. 그럼 박진 씨 의견은 『공무도하』가 동어반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쪽인가?
박 진ㅣ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김남혁ㅣ오늘은 박진 씨가 어째 좀 살살 말한다. 지난번까진 안 그러더니. (웃음)
박 진ㅣ그런 게 아니라…(웃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부터인데, 이런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공무도하』에는 초탈한 허무주의의 색채보다는 세상을 ‘긍정’할 수도 없고 ‘단념’할 수도 없는 자의 ‘노여움’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무력감 속에” 숨어 있는 “폭발 직전의 위태로움”(219쪽) 같은 것. 그래서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개별적인 죽음들의 처참함이 쉽사리 추상화되지 않고 가슴을 짓누른다. 연민 없는 건조한 문체로 서술됐는데도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접근할 수 없다는 문정수의 생각은 초연한 거리감을 만들어내기보다 “제 3자란 없다. 당사자가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의 당사자이다”(38쪽)라는 장철수의 절박한 외침과 공명한다. 이 지점에서 『공무도하』가 이전의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게 된다. 기존의 김훈 소설에는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제 3자이다’라는 식의 태도가 더 강했었는데.
서희원ㅣ내가 볼 때, 『공무도하』가 이전 소설과 달라진 것은 김훈의 분신이 두 명 등장한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이 소설에서 김훈의 분신이라면 타이웨이 교수와 문정수를 꼽고 싶다. 이 소설이 이전 소설과 변별되는 이유는 이 두 사람의 거리가 서사가 진행되는 내내 유지되고, 그 사이에서 감각의 공동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타이웨이 교수가 『시간 너머로』란 책에서 삶을 읽어내는 방식은 이전 김훈 소설의 방식과 많이 닮아 있다. 가령,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사물을 무리하게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25쪽)와 같은 서술은 김훈의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이었다. 륙색을 매고 고무신을 신은 타이웨이는 시간을 넘나드는 가벼운 여행자이다. 반면에 문정수는 가볍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제법 생활에 구속되어 있고 데스크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여야 한다.
박 진ㅣ김훈에게 타이웨이와 문정수는 쉽게 말해 각각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라고 할 수 있겠다.
서희원ㅣ그렇다. 날렵한 고무신을 신은 타이웨이와 문정수의 진물 흐르는 무좀 걸린 발, 시간의 결들을 사뿐히 넘고 있는 타이웨이와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문정수, 거대한 시간을 사유하는 타이웨이와 작은 시간들을 살펴보는 문정수, 몇 백만 년이 한꺼번에 지나가는 인류에 대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타이웨이와, 하루 혹은 며칠 몇 개월의 시간 속에서 인간들의 원한·애정·증오에 대한 신문 기사를 쓰는 문정수. 이 둘의 큰 간격이 소설에서 계속 유지된다.
김남혁ㅣ하지만 두 인물의 비중이 같은 것은 아니다.
서희원ㅣ맞다. 이 소설에서 타이웨이는 김훈의 분신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적인 인물이다. 『공무도하』는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 먹고사는 문제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로 장철수가 있다. 장철수는 ‘손아귀’ 힘이 약한 상태에서, 다시 말해 현실을 쥐지 못하는 상태에서 해망으로 가게 되고, 그 곳에서 고철을 수집하며 후에, 오금자와 긴밀한 동거생활을 지탱한다. 나중엔 자신의 신장을 팔아서 벌금도 내고 후에를 자유롭게 해준다. 장철수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인물이고, 먹고사는 문제를 초월하지 않으면서도 순전히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인물이 아니다. 장철수의 형상화가 김훈 소설의 변화 지점이다.
박 진ㅣ그 대목에서 정말 와 닿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개입할 수 없는 어떤 답답함이다. 장철수가 신장을 팔아 벌금을 내고, 그의 신장이 해망해저자원개발 독점사업권을 딴 박옥출에게 이식되는 장면에서는 정말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 이런 ‘잔인한’ 결말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과 더불어, 그 ‘어찌할 수 없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분노와 ‘자기혐오’를 느끼게 한다.
김남혁ㅣ김훈이 작가후기에서 밝힌 ‘자기혐오’도 아마 그런 느낌일 것이다.
박 진ㅣ그렇다. 어쩌면 이런 분노와 답답함과 자기혐오를 이끌어내는 해망이야말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일지 모르겠다. 조연은 창야일테고. (웃음) 해망은 지금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할 것이다. 해망을 중심으로,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인간들의 관계가 얽히고설킨다. 해망에서 얽히는 문정수, 장철수, 후에, 오금자, 박옥출, 방만석 등의 인물은 연민의 대상도 혐오의 대상도 아니고, 긍정할 수도 단념할 수도 없는 이 세상의 ‘당사자’들이다. ‘바라보는 자’의 막막한 시선보다 ‘당사자’인 이들의 존재가 부각돼 있는 점이 『공무도하』에서 인상적이었다. 반면 해망에 직접 연루되지 않는 두 인물인 타이웨이나 노목희는 서희원 씨 말대로 『공무도하』에서 부수적인 인물이다. 그들의 존재가 해망의 현실을 멀리서 또는 높은 데서 조망하는 하나의 시선이 될 순 있지만, 그 시선이 해망의 현실을 덜 비루하거나 덜 고통스럽게, 또는 ‘견딜 만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 점이 『공무도하』의 역설적인 장점이다.
김남혁ㅣ두 분 다 『공무도하』를 읽은 느낌이 비교적 좋았던 모양이다.
박 진ㅣ김훈의 이전 소설들보다 좋았다.
서희원ㅣ김훈의 작품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과 공간을 읽는 재미가 분명 있었다.
김남혁ㅣ나는 이런 생각도 해봤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 명제를 중심으로 『공무도하』의 인물들을 네 군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는 생각. 첫째, 그 명제를 모른 채 비루하고 치사한 사람. 둘째, 그 명제를 알기에 그렇지 않은 척하는 비루하고 치사한 사람. 셋째, 그 명제를 알기에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넷째, 그 명제 자체를 미화하는 사람.
박 진ㅣ그렇게 정교한 분류를? (웃음) 누가누가 어디에 속하는지 말해 달라.
김남혁ㅣ(웃음) 자연재해 속에서 인간은 대개 첫째 군에 속하게 된다. 창야의 수해 장면에서 강의 남쪽과 북쪽 사람들은 물막이를 놓고 멱살잡이하지만 끝내 남과 북은 물이 넘쳐흘러 모두 잠기게 된다. 인간의 문명을 넘어서는 세상의 흐름을 모르는 채 자신들의 일시적인 이해(利害)만을 위해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인간들이 이 군에 속한다. 둘째 군과 셋째 군은 소방수 박옥출과 노학연대 소속의 장철수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처음에 박옥출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107쪽) 소방관이 됐고, 자신의 밥벌이를 정직하게 수행할 때 타인을 세상의 불구덩이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소방수를 그만 두고 밥벌이의 지난함을 견뎌내지 않은 채 쉬운 길을 선택할 때 위선자가 된다. 장철수는 박옥출과 정반대의 과정을 겪는다. 소설 결말부에서 박옥출과 장철수는 한 병원에 있게 된다. 둘 다 겉으로는 합법적이지만 속으로는 비합법적인 신장 이식 수술을 받는다. 여기서 박옥출은 자신의 건강만을 위해서, 다시 말해 자기만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법의 이중성을 활용한다. 반면 장철수는 법집행의 피해자인 자신과 타인의 삶을 위해서, 다시 말해 자신의 이익을 버리기 위해서 법의 이중성을 활용한다.
서희원ㅣ넷째 군에 속하는 인물은 당연히 타이웨이 교수와 노목희이고.
김남혁ㅣ맞다. 타이웨이 교수와 노목희는 인간의 비루함, 그 미완성의 성격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미화하는 사람들이다.
박 진ㅣ그렇게 서로 다른 인물군이 다양하게 얽히고 긴장을 유지하면서 『공무도하』는 이전 소설보다 더 풍부하고 열려 있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김남혁ㅣ좋다. 이제『공무도하』 밖으로 나가보자. 『공무도하』가 이전 소설과 달라졌다고 해도, 김훈의 소설이 전반적으로 동어반복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동어반복 되는 김훈의 소설을 이렇게 많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서희원ㅣ우선 동어반복적이라는 전제에 대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95년에 출간된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대중에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는데, 2001년에 출간된 『칼의 노래』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김훈 소설의 정점이라고 판단하는 『강산무진』은 장편소설에 비해 독자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김훈 소설이 동어반복이라는 전제가 맞다면,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95년에서 2001년 사이에 독자가 변한 건가? 장편과 단편이 다른 것인가?
박 진ㅣ『칼의 노래』의 인기에는 역사소설이란 특수성이 작용했다. 그때 이순신 ‘붐’이기도 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도 그 무렵이고.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이 소설을 언급하기도 했다. 작품 자체보다는 다른 영향이 더 많았으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과 『칼의 노래』의 독자수를 직접 비교해서 말하긴 어렵다. 단편집보다 장편소설이 훨씬 두터운 독자층을 지닌 것도 분명한 사실이니, 『강산무진』이 덜 팔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희원ㅣ소설이 팔린다고 해서 독자들이 그 소설을 끝까지 다 읽는다고 볼 수는 없다. 근데 일단 김훈의 소설이 많이 팔린다는 건 좀 미스터리다. (웃음) 김훈 소설은, 내 경험상, 한 번에 쭉 읽을 수는 없는 소설이다. 대중이 원하는 소설이 긴장된 심신을 이완시키는 대중오락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김훈의 소설은 이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대중오락물을 읽으며 느끼는 이완이나 정신적 휴식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유발시킨다. 오히려 긴장되고, 문체에 압박을 받는다. 그런데도 김훈 소설이 많이 읽힌다는 것, 이 현상을 ‘그만큼 요즘 삶의 정신적 밀도가 느슨해졌기 때문에, 김훈 소설이 주는 긴장감을 얻기 위해 읽는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는 쉽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전에 김영삼 대통령의 관람으로 영화 <서편제>는 흥행했지만 이후 임권택 영화는 계속해서 흥행하진 못했다. 근데 김훈의 소설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독서후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많이 팔리고 있다. 『남한산성』은 뮤지컬로 만들어지기까지 하고. 이 점은 순간의 이슈화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김훈을 소비하는 대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열망이 큰 독자들이 많이 등장한 것 같다. 문화소비를 하는 30대 여성들의 ‘노블컬’에 대한 관심도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거 같고.
김남혁ㅣ공감이 가는 말이다. <서편제>가 꼭 김영삼 대통령의 관람으로 흥행한 건 아니겠지만. (웃음)
박 진ㅣ내가 보기에도 김훈 소설 자체는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매끈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독자를 사로잡는 소설이 아니다. 스토리보다 담화(discourse)가 부각되어 가독성이 높지도 않다. 『남한산성』도 그랬고 『공무도하』도 그렇다. 물론 역사소설과 이순신 붐을 타고 『칼의 노래』부터 김훈이 인기 작가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기에, 그의 다른 소설들에도 독자들이 모여든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공무도하』같이 뻑뻑한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는 건 그 자체로 고무적이라고 본다.
김남혁ㅣ스토리가 약한 김훈 소설이 읽기에는 불편해도 독자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닐까? 또, 그의 문장이 갖고 있는 매력에 독자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 김훈이 한국일보에서 <문학기행>을 연재할 때도 김훈의 문장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고 들었다.
박 진ㅣ상당히 고급한 문장이다. 많은 독자들이 반응할 수 있다는 게 이례적이면서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김훈 소설에서 독자들이 위로를 얻는다면, 그것은 공지영이나 신경숙 소설이 주는 ‘따뜻한 위로’는 아닐 것이다. 김훈 소설에서는 ‘세상이 늘 그렇지’, ‘인간은 다 그렇지’하는 허무주의적인 냉소가 일종의 ‘차가운 위로’로 작용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칼의 노래』에서 위로를 얻었던 것도 그런 차원이 아닐까 한다. 이런 초탈한 시선이 주는 위로는 세상의 변혁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탈정치적이고 보수적인 세계관과 손잡을 위험이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공무도하』에는 이전의 허무주의적 색채가 훨씬 약화돼 있다. 허무보다는 절망, 무력감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분노가 더 두드러진다. 『공무도하』에서 독자는 위로보다는 오히려 답답함과 막막함을 느낄 것이다.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세상은 견딜 만하다’라고 말하면서 마음을 달래주는 소설이 아니라 괜찮지 않다고, 도무지 견디기 어렵다고 말하는 불편한 소설 『공무도하』가 많이 팔릴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까.
김남혁ㅣ‘차가운 위로’라는 말에 공감한다. 『공무도하』에서 방천석이 떠난 집으로 장철수와 오금자와 후에가 들어오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소설가 윤성희를 생각했다. 윤성희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그렸을까? 민족과 혈연과 계급의 틀을 벗어난 이질적인 개인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장면을 아마도 윤성희라면 동화적으로 보일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조금은 과장되게 긍정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박진 씨 말대로 김훈은 독자들에게 윤성희 소설과 같은 ‘따뜻한 위로’를 주지 않는다. 김훈은 장철수와 오금자와 후에가 이루는 의사 가족에 대해 긍정도 연민도 희망도 직접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거짓 대의를 먼저 내세우던 창야의 장철수는 속물이었지만, 정직한 밥벌이를 먼저 수행했던 해망의 장철수는 잃어버린 대의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이전의 김훈에게 밥벌이는 인간의 삶에 내속된 근본적인 허무함을 알려줬지만, 『공무도하』에서 김훈은 그 밥벌이를 통해서만이 삶의 허무를 견뎌내고 미약하나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박 진ㅣ한 가지 덧붙이자면, 따뜻한 위로든 차가운 위로든, 위로를 주는 소설들에 대해 무조건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조건들과 대중들의 요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 사회심리적 의미를 다루는 섬세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대중문학’은 도피적인 위안을 주고, ‘본격문학’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는 식의 편리한 구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김남혁ㅣ자. 이제 좌담을 정리하자. 혹시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가? (웃음)
서희원ㅣ『공무도하』에는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러운 인간을 위에서 바라보는 자가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이 타이웨이고 다른 한 명이 정보과장이다. 타이웨이에 대해서는 많이 말했는데, 정보과장을 말하지 못했다. 그는 소설 전반에 걸쳐 연속해서 기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화자이다. 정보과장은 국가의 ‘큰형’이고, 일종의 ‘빅브라더’이다. 사태의 진행과 결정에 대한 가장 정확한 발언을 하고 있으며, 때론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과 같다. 어디에나 있고, 같은 어조로 말하고, 시스템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하고 깊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굳이 분별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 인간이지만 직책으로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한. ‘정보과장’의 등장은 김훈의 이전 소설과 변별된다. 그가 소설 전반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공무도하』라는 공간이 감각, 즉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를 그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박 진ㅣ개인적으로 나는 김훈의 역사소설에 관심이 많다. 역사적 과거를 충실히 재현하기보다 과감하게 현재화하고, 역사 속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이입하는 방식은 역사소설의 변화된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문학적 가치 이전에 문화적 징후로서 주목할 만한 대목들이다. 크게 보면 역사 드라마나 사극 영화들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고.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다.
김남혁ㅣ아, 김훈은 동어반복적인 작가라기보다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 속 한 장면으로 좌담을 마무리하고 싶다. 『공무도하』에서 박옥출이 캐피탈 백화점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귀금속을 훔쳤다는 심증을 갖고 있던 문정수는 노목희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때 노목희는 박옥출과 문정수 모두 불쌍하고 가엾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문정수 편이니 박옥출 일은 기사로 쓰지 말라고 한다. 기사를 쓰는 일은 치사한 일이고 막막한 쪽이 치사한 쪽보다는 견딜 만할 거라면서 말이다. 문정수에게 기사를 쓰는 일은 진실을 밝히는 일이 될 때도 있지만 대개 신문사의 논조에 봉사하는 일이 되곤 한다. 수년전 해망에 침투한 간첩을 생포하지 않고 사살한 군인들처럼 기사를 쓰는 일은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묻어두게 할 때가 많다. 김훈에게 소설을 쓰는 일은 진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묻어두지 않은 채 막막히 견디게 하는 일일 것이다. 김훈에게 계속해서 소설을 쓰는 일이, 또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는 일이 진실을 묻어두기 위해 ‘인간은 치사하고 비루하고 던적스럽다’는 저 명제를 치사하고 비루하고 던적스럽게 활용하는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박 진ㅣ듣고 보니 뼈 있는 말이다. (웃음)
김남혁ㅣ(웃음) 오늘은 날씨도 쌀쌀한데, 저녁 먹으면서 술도 한잔 함께 하자. 긴 시간 동안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 두 분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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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
서희원
문학평론가. 2009년 <문화일보>, <세계일보> 문학평론에 각각 당선하여 등단하였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근대소설을 연구하며, 여행, 국가간 이동, 소설이란 장르의 형성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