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원ㅣ주목할 만한 문학작품과 문화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비평테이블>의 두 번째 좌담이다. 지난달과 같이 문학평론가 박진 씨와 김남혁 씨가 각자의 의견들을 날카롭게 벼르고 오신 것 같다. 이 좌담을 잘 글로 풀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걱정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시작해 보자.
오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책은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랜덤하우스, 2009)이다. 『보트하우스』(1999) 이후 10년 만에 출간된 장정일의 장편소설이며 출간과 동시에 모든 신문에서 다룬 화제작이다. 사실 장정일하면 90년대 문학의 ‘뜨거운 감자’이며, ‘핫 이슈’였다. 이번 작품은 문학적 파격보다는 정치적인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다.
김남혁ㅣ먼저 『구월의 이틀』이 장정일의 작품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90년대의 장정일은 ‘문학의 자유가 없다면 정치의 자유가 없다’는 주제에 천착했었다. 그런데 그런 문학의 자유를 추구했던 개인이 2000년대 와서 어떻게 되었나? 어떤 공적인 영역에도 개입하지 못하고, 어떻게 보면 좀 나르시시즘적이거나 냉소적인 주체로 전락했다. 말 그대로 문학적 자유를 추구했는데 정치적 자유가 따라오지 않은 것이다. 『구월의 이틀』에서 장정일은 기존의 명제를 뒤집어, ‘정치의 자유가 없으면 문학의 자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정치의 자유라는 개념이 어렵긴 하지만, 개인들이 공적인 영역에 개입할 때, 아니면 유대관계를 맺을 때 개인 각자의 독특한 성격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오히려 개인이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유대 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문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박 진ㅣ김남혁 씨가 말했던 장정일의 의도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런 의도에서 나왔다고 해도, 이 소설을 읽는 것은, 뭐랄까, 좀 난감했다. (웃음) 사실 10년 만에 나온 장정일의 소설이라 엄청나게 기대를 했다. 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에 완전히 빠진 경험이 있다.
서희원ㅣ“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아담이 눈뜰 때』의 첫 문장에 한 번쯤은 매혹 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박 진ㅣ그렇다. 나는 장정일의 세기말적인 감수성과 80년대와는 다른 90년대의 변화된 젊음에 진심으로 공감했었다. 하지만 『구월의 이틀』에는, 세대차를 감안한다 해도,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2000년대의 대학생들이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너무 도식적인 설정들이 마음에 걸린다. 호남과 영남이라는 출신 지역, 운동권 출신의 지역 운동가인 ‘금’의 아버지와 세속적 사업가인 ‘은’의 아버지, 그리고 ‘금’과 ‘은’이라는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너무 단순한 이분법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아웃사이더에다 반항아이고, 혁명적이었던 사람이 근엄한 어른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 예전 『아담이 눈뜰 때』에서는 장정일이 그 시대의 아담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아담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월의 이틀』에서의 장정일은 아담의 선생님 같다. 아담의 작은 아버지이거나, 국사 선생님, 담임선생님 정도의 느낌? 거북 선생까지는 아니겠지만.(웃음) 하여간, 공감이 잘 안 됐다.
서희원ㅣ두 분의 의견이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하다. 두 분 모두 장정일의 창작 의도와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에는 동감하는 것 같다.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 사실 나도 그렇다. 『보트하우스』와 『구월의 이틀』 사이의 시간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지난 10년 동안 장정일은 소설보다는 독서나 학습의 성과를 『독서일기』나 『공부』와 같은 책으로 출간하는 일에 몰두했다. 사회에 대한 장정일의 태도가 변했다면 그 변화의 추이는 지난 10년간의 ‘공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박 진ㅣ『독서일기』와 『공부』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독서일기』가 순수한 독서광의 열정과 쾌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공부』는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뚜렷한 목적의식과 계몽적 의도에 입각한 저서다. 이 입장의 차이가 소설의 변화와 맞물린다. 그전에는 예술가이고, 이단아였다면, 이제는 어른이 되어 독자를 가르치고 있는 느낌이다. 『공부』에는 『구월의 이틀』에도 등장하는 미국 우익 사상이나 힘의 논리에 대한 관심 등이 드러나 있다. 특히 “문학서적을 한 100여 권 가려 읽고 나면 문학과는 결별”(66쪽)해야 하며 그 다음부터는 “인문학·사회학·철학 서적들을 읽어야 한다”(67쪽)는 은의 고교 담임선생님의 말은 『공부』에 나오는 장정일의 생각과 그대로 이어진다. 이를 보면 『구월의 이틀』에 담긴 내용이 장정일의 진심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서희원ㅣ박진 씨의 말을 정리하자면, 10년의 방황을 거쳐 이단아이자 아웃사이더가 ‘공부’를 하고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인데, 이 어른이 “우익청년 탄생기(성장기)”(「작가후기」, 334~335쪽)를 가지고 오셨다. 중요한 것은 이 ‘우익청년 탄생기(성장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며 하필이면 “온후하고 사려 깊으며 인내심이 있어 보이는” 심지어 “얼굴로부터 은은한 후광”(311쪽)을 발하는 소설 속 서울시장이 온 국가의 정책을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바꾸고 있는 이때에 이 소설을 가지고 등장했는가, 하는 점이다.(웃음)
박 진ㅣ우선 ‘우익청년 탄생기’라는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굉장히 난감하다. 이것이 장정일의 진심이라면 소설에 나오는 이 코미디 같은 상황과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 교회에서 서울시장을 만나며 느끼는 ‘은’의 전율을 ‘우익청년의 성장’이라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곧이곧대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풍자를 의도하고 있는 코미디로 읽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러한 점들이 소설의 해석에서 난처함을 만들어낸다.
김남혁ㅣ난 오히려 이러한 난처함이 이 소설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등장인물과 독자가 동일시된다. 등장인물이 성장할 때 독자는 책을 읽으며 같이 성장한다. 『아담이 눈뜰 때』를 읽을 때도 독자는 아담에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독자는 ‘금’에도, ‘은’에도 동일시 할 수 없다. 실제 소설의 주인공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닌 ‘금과 은’”(283쪽)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질적 개인의 연대인 ‘금과 은’에 동참한다. 따라서 문학을 하기로 결정한 ‘금’의 개인적 자유와 거북선생의 제자가 된 ‘은’의 정치적 자유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손쉽게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성장소설이면서 손쉬운 동일시를 거부하는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의 재미있는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희원ㅣ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혁 씨의 지적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이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닌, ‘금과 은’이라면 이 둘의 결합에 서사가 집중되어야 하며 그 의미를 알려주는 사건이 발생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행은 평범하며, 섹스는 사랑이라 부르기 어렵다. 단적으로 ‘금과 은’의 결합은 소설에서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좀 더 술을 마셨다. 모텔을 찾았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 침대에 누워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닌 ‘금과 은’이 되었다”(283쪽)고 나온다. 이것을 이질적 개인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정치학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박 진ㅣ그렇다. ‘금과 은’이 소설 속에서 실제로 서로의 내면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둘은 도식적인 구도 위에 서 있다가 몇 겹의 우연, 또는 “서로 이질적인 잡종 교배가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는” “자연선택”(61쪽)의 지혜에 따라(?) 친구가 되고, 문학과 정치라는 서로의 지향을 맞바꾼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연대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연인 관계가 등장하지만, 결국 그 둘은 자신의 ‘출신성분’이 암시했던 방향(정치적 지향)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은 각자의 길로 나아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서희원ㅣ‘우익청년 성장기’라는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금과 은’이라기보다는 ‘은’이다.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 ‘금’은 서사에서 사라지고, ‘은’만 남는다. 하지만 ‘은’을 장정일이 의도한 건강하고 철학을 가진 우익으로 볼 수 있을까?
박 진ㅣ장정일은 한국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이 ‘올드 라이트’와 ‘뉴 라이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영 라이트’의 출현이라 판단하고, ‘은’에게 가능성과 기대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은’의 모습은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라 그 관계의 양상이 중요한데, 거북선생과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그건 존경으로 맺어진 고대 그리스의 스승-제자 관계와도 좀 다르게, 동성애적 성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은폐와 위선의 관계이고, 철저한 권력관계이자 힘의 논리에 가깝다.
서희원ㅣ‘은’이 보여주는 사상은 사실 파시즘에 가깝다. 반고경을 혁대로 내려치며 “시? 교향곡? 그림? 그런 따위는 내 의지를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직접 아로새기는 이런 일에 비하면 너무 시시해. 아, 이처럼 강한 힘으로 세계를 길들일 수 있다면!”(231쪽)이라고 외치는 ‘은’의 모습이나 “강한 것은 선하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242쪽)는 생각은 전형적인 파시즘의 모습이다.
김남혁ㅣ하지만 ‘은’이 가진 장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장점은 자신의 생각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은’은 성숙하지 않기 때문에 우익에 경도되어 있지만, 흥미롭게도 바로 그 제도권 우익에 대한 무지(無知)때문에 우익에서 거리를 둘 수 있다. 우익에 대한 거리 두기에 은의 가능성이 있다. 거북선생과 작은아버지를 필두로 하여 이루어지는 우익 공동체는 우익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무장한 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은 ‘금’과의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은’의 가능성은 거북선생과 작은아버지의 세계에 완전히 투신하지 않고 그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 ‘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서희원ㅣ내 생각엔 ‘은’의 가능성이 발현되면 정말 무시무시한 것이 나올 것 같다. 소설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은’의 욕망과 그 욕망이 실현될 때 나오는 모습들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장면의 편린들이 ‘은’의 성장이라는 것을 더욱 두렵게 한다. 아마 ‘은’은 앞 선 세대들을 다 잡아 먹을 것이다. 그렇게 성장한다면 최종적으로 ‘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박 진ㅣ올드 라이트보다 뉴 라이트가 앞서 나간 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더 영향력을 가진 우세종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영 라이트라는 것이 있다면, 뉴 라이트의 약점을 극복하고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게 이 사회의 ‘건강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다. ‘은’은 더 무시무시해질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장정일은 기존의 권위에 대항만 하는 90년대적인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학습과 공부를 통해서 제대로 성장한 주체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아이러니로 보기는 어려워진다. 장정일이 정말 ‘건강한’ 우익청년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라면, 장정일의 변화가 소설에 미친 영향은 긍정적이라 보기 어렵다.
김남혁ㅣ물론 극단적으로 보일 정도로 ‘은’이 소중히 생각하고 옹호하는 ‘개인의 자율성’은 파시즘으로 왜곡될 수 있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동의한다. 또 개인의 자율성이 이질적인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강화될 수 있다는 기본 취지에도 불구하고, 서사가 진행될수록 ‘금’과 ‘우정의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이 다소 설득력을 잃고 있고 반대로 거북선생과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연대를 이루는 과정이 부각된다는 점,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은이 지향하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관념 그 자체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까다로운 주체』에서 지젝이 ‘지배관념이 곧 지배자의 관념은 아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지배관념은 거짓 보편성이 아니다. 그 관념을 왜곡하여 지배자의 관념으로, 거짓 보편성으로, 파시즘으로 만드는 논리가 나쁜 것이다. 개인의 자율성을 세우려는 기획이 파시즘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기획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가치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은’이 가진 장점이 아직은 미미할지라도 가볍게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율성이란 관념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은의 태도와, 그 관념을 파시즘화 시키려는 지배자(거북선생, 작은아버지)들의 왜곡된 논리에 미약하게나마 거리를 두는 ‘은’의 태도를 단순히 가볍게 볼 수는 없지 않을까? 한편,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장정일이 지금과 같지 않은, 예전과 유사한 소설을 썼다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박 진ㅣ장정일이 성장소설을 쓰고 싶었다면, 90년대의 아담과는 다른 2000년대의 아담을 그렸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담이 아닌 선생들의 목소리만 가득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금’과 ‘은’은 꼭두각시에 가깝다. 이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하지만은 않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내면적으로 성숙하거나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난 장정일의 예전 소설들이 사회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학으로 침잠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엔 사회에 대한 적의와 객기 같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90년대에 문학이 정치에 대해 말하는 방식일 수 있었다. 지금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탐색해야 했는데, 이 소설은 그러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소설에서 문학과 정치는 ‘금’과 ‘은’이 연인관계라는 알레고리를 제외하고는 이분법의 틀을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묘사되니까.
서희원ㅣ그 지점은 조금 세밀하게 봐야 한다. 문학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사실 ‘은’의 경우이다. ‘금’은 문학엔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무엘 베기파스의 『지붕만 남은 마을』이란 허구의 작가와 작품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게다가 마지막엔 자신이 그 작품을 쓰겠다며 문학에 투신하겠다고 결심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금’은 ‘은’과 대화하며, ‘국민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소설에 따르자면, “국민작가란 한 나라의 국민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항상 그에게 돌아가 현재의 문제를 조회해 볼 수 있는 거대한 저수지”(323쪽)이다. 그런 국민작가가 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문학과 정치의 어떤 결합 같은 것이 아닌가?
박 진ㅣ하지만 ‘금’이 문학을 선택하는 계기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금’에 비해 서사가 집중되고 있는 ‘은’의 경우도 비슷하다. 문학을 포기하고 ‘자유의 나무’로 들어가는 과정의 설득력이 미약하다. 그는 차라리 자신의 성정체성과 열등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힘을 추구하며 정치에 입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문학과 정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가 모호해진다. 이들의 선택을 성숙이라 보기도 어려워지고.
김남혁ㅣ두 분이 잘 지적해 주신 것처럼 뒤로 갈수록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금과 은’인데 사실 ‘은’이 너무 많이 부각되고 있다. 그래서 작가도 후기에 2권을 쓰겠다고 했는데 그 여부를 떠나서 이 책만 본다면 사실 ‘금과 은’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이질적 개인의 연대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작가가 생각하는 성숙이란 아마도 이 연대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구월의 이틀』이란 것은 한국 사회가 망각해버린 이틀, 한국 사회의 숨겨진 2인치, 뭐 이런 것이다. 일종의 자아가 숨기고 있는, 개인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열등감이나 콤플렉스 같은 것이다. 장정일은 이런 것들을 타자와의 연대 속에서 알아갈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 진ㅣ제목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에서 ‘구월의 이틀’이란 제목은 또한 문학의 은유이기도 하고 청춘의 은유이기도 하다, ‘청춘이란 바로 그 이틀과 같은 것’이란 의미가 성장소설의 맥락과 연결되는 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낭만주의적인 사고 아닌가. 우리는 그 ‘이틀’ 같은 청춘을 잘못 보내서, 평생 섭섭해 우는 것이 아니다. 실제 인생에는 그런 벼락 같은 이틀이란 없다. 조금 더 빛나는 시절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그때만이 인생인, 나머지는 덤인, 그런 이틀이 있다는 발상은 너무 낭만적이다.
김남혁ㅣ‘구월의 이틀’의 그 이틀이 낭만적이고 존재의 충일함을 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로도 쓰인다. 소설에서 ‘빨갱이 콤플렉스’를 한국 사회의 숨어있는 이틀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구월의 이틀’은 개인의 일관성이 파괴되는 시기, 아주 무서운 시기일 수도 있다.
박 진ㅣ내 생각에는 그게 충일이냐 파괴냐 하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어쨌든 그건 벼락 같은 이틀이다. 그런 이틀이란 것이 사라져서 슬픈 게 아니라, 그런 이틀이 실제 인생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평생 찾아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소설에서 얘기하는 20대의 1년, 그 이틀은 우익청년 한 명이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고, 이를 통해 ‘은’이 실제로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지만, 사실 그런 이틀이란 소설 안에도 없었다.
서희원ㅣ그 ‘이틀’의 문제는 실제 인생에 그런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 이틀은 성장소설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별한 시기, 즉 청춘의 문제이다. 성장소설이 가능하려면 인생에서 청춘이라는 시기가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프랑코 모레티가 성장소설(교양소설)을 ‘근대성의 상징적 형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문제는 장정일의 소설에 나온 그 ‘이틀’이란 시기에 발생한 사건과 이에 대한 경험이다. 이를 통해 ‘금’과 ‘은’이 그들 인생을 결정짓는 성숙이란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자각하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소설에 서술된 다양한 사건들은 대부분 빠르게 지나가거나 지엽적으로 소개된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적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는 ‘금’의 아버지의 자살마저도 그렇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가장 상세하게 서술되고 있는 것은 ‘성’의 경험이다.
박 진ㅣ서구적 의미의 교양소설 말고 좀더 소박한 의미의 입사소설이라면 성에 대한 입사(initiation)도 포함된다. ‘금’의 경우, 의미를 알 수 없는 돌발적인 성관계로 인한 혼란과 불안, 그럼에도 빠져들게 되는 육체적 쾌락의 강렬함, 열정과 사랑을 혼동하다 결국 환멸에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은 다소 식상하기 하지만 성에 대한 이니시에이션의 구조로 볼 수 있다. ‘은’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자각하는 과정도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에서 이념이나 삶의 진로를 찾아가는 성장이라 하기에는 너무 약하지 않을까.
서희원ㅣ잘 지적해 주셨는데, ‘성’의 문제는 장정일 소설에 있어 중요한 해석의 코드이다. 과거 장정일의 소설에서 ‘성’은 사회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으며, 사회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장정일은 ‘성’과 성장의 문제를 깊게 연결시키고 있다.
박 진ㅣ우선 반고경 문제를 얘기해야 한다. 반고경은 『아담이 눈뜰 때』에 나오는 연상의 여자와는 달리, 매력적이거나 독특한 캐릭터가 되지 못했다. 반고경이 사랑의 상처를 지닌 여자로 짐작된다거나 알고 보니 예술가였다는 정도가 전부인데… 어떻게 보면 그녀는 그냥, 잘생기고 어린 ‘금’을 잡아먹는 중년여자로 나온다.(웃음)
서희원ㅣ어, 그 표현, 좌담을 글로 풀 때 꼭 쓰겠다.(웃음) 빨간 글씨로 강렬하게.
박 진ㅣ(웃음) ‘금’에게 『한국의 부자들』 같은 책을 선물하는 것도 그렇고, 굳이 ‘은’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금’을 ‘깔끔하게’ 떼어버리는 것도 그렇고. 반고경이라는 인물이 좀더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금’에게 이 경험이 의미가 있으려면 반고경이란 캐릭터나 그녀와의 관계가 더 잘 살아났어야 하는데. 결국 반고경과의 관계에서 ‘금’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으며, 그게 어떻게 예술로 이어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김남혁ㅣ나는 그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아담이 눈뜰 때』에서도 화자는 그 연상의 여자를 조롱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반고경은 ‘금’에게 성적 자유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성적 자유는 90년대 장정일에게 아주 중요했다. 개인의 자율성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무기였다. 도덕주의, 사회 질서, 편견에 대항할 수 있는 게 성적 자유였다. 이런 의미에서 반고경이란 인물을 가지고 왔는데, 2000년대 장정일은 반고경 같은 캐릭터가 가진 한계를 인지하고 있다. 타자를 억압하는 세상의 질서에 반항하기 위해 성적 자유를 추구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적 자유의 극단적인 추구는 타자를 지워버리는 행위가 돼버린다. 반고경의 그림처럼 침대를 실은 보트가 가라앉는 모습은 성적 욕망의 극단적인 추구가 끝내는 개인의 존재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금’이 ‘은’과의 다른 유대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박 진ㅣ그렇게 해서 성적인 자유의 한계를 느꼈다, 그게 타자를 지워버리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금’은 정치의 길이 아닌 문학적 가능성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게 연결이 잘 안 되지 않나?
김남혁ㅣ그렇다. 사실 그런 점은 좀 그렇다.(웃음)
박 진ㅣ그냥 성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는 것, 입사로서의 환멸이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 성숙이 될 수 있을까?
서희원ㅣ말미에 「새로운 성장소설」이란 장이 있다. 두 주인공이 모텔에서 관계를 맺고 ‘금과 은’이 된 후, ‘금’은 자신을 유혹한 사장 얘기를 하며, “너희 세대가 대면할 상황은 아주 복잡하지. 여자든 남자든 자신이 여자를 유혹할지 남자를 유혹할지부터 정해야 돼. 마찬가지로 내가 여자에게 유혹당하는 게 행복한지, 남자에게 유혹당하는 게 더 행복할지도 정해야 돼. 그게 너희 세대야”(285쪽)라는 말을 한다. 그 말에 ‘은’은 “이제부터는 새로운 성장소설이 필요하단 말이군”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성장’이란 타인을 만나는 형태이다. 그렇게 볼 때, ‘금’과 ‘은’의 관계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았다.
박 진ㅣ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데, ‘금’과 ‘은’이 만나고, 연대하는 관계가 실감 있게 부각되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안을 놓고 반대편에서 시위를 하던 ‘금’과 ‘은’이 서로를 발견하고는 동시에 피켓을 놓고 포옹을 하는 장면이 그렇듯, 그들의 연대와 화합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알레고리로 느껴진다.
서희원ㅣ문학과 정치의 알레고리, 그런 것이다.
박 진ㅣ그렇다.
김남혁ㅣ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불만족스러운 것은 인물들을 작가가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작가의 의식을 배반하면서 생동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주제적인 측면에서 장정일이 과거의 소설과는 달라졌고, 그 변화가 개인들의 연대에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소설의 앞에 나오는 교통사고 장면을 언급하며 ‘금’은 ‘은’에게 “혼자 살아남은 그 아이처럼, 나와 너도 고속도로 위에 내던져진 고아”(330쪽)라고 말한다. 과거 장정일의 소설이 상징적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지금의 세대는 아버지가 없는 세대이다. 개인은 도시에서 아주 자폐적이거나 자족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도시에서 이질적인 개인이 생존하려면 연대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박 진ㅣ아버지 얘기는 중요하다. 성장소설 문제하고도 관련이 된다. ‘아버지의 이름’, 즉 법, 권위, 기존의 사회 규범을 내면화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성장한다. 정치적 의미의 성장은 특히 ‘이념적인 아버지’와 싸우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이름’과 투쟁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이다. 맞서 투쟁해야 할 아버지도, 아버지의 ‘법’도 부재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후기 자본주의 방임사회는 무언가를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겨라’, ‘소비해라’,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라’ 하는 사회다. 결혼연령 마흔 살, 아이는 낳지 않고, ‘아버지 되기’를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면서 언제까지나 미성년으로 남아 있고 싶어 하는 키덜트 문화 또한 이런 사회의 한 증상일 수 있다. 예전부터 한 생각인데, 이런 이유들 때문에 2000년대 소설에서 성장의 의미를 찾는 것은 아마도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2000년대의 성장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성장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들 속에서, 실패한 성장 그 자체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장정일은 이런 시대에 억지로 이념적 아버지를 만들고 성숙의 의미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2000년대적이지도 않았고, 와 닿지도 않았다.
서희원ㅣ난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장정일이 말했던 ‘우익청년 탄생기’란 말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다. 장정일도 지적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우익과 보수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가 아니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전통도, 전통을 생성하는 철학도 없다. 그들은 그냥 경제적 자유주의자에 불과하다. 올드 라이트에서 뉴 라이트로의 이행은 그냥 자유주의자가 신자유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의 소설이 한국 사회에 없었던 우익청년의 탄생을 말한다고 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만약 이 소설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작가의 말까지를 포함한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한 편의 풍자가 가득한 희극으로 읽는 방법이다.
박 진ㅣ장정일의 ‘공부’ 외에도,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의 전환,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분명 소설에 영향을 준 변화의 한 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대안이 과연 ‘우익청년의 탄생’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소설의 우익청년은 분명 기존의 우익을 비판하는 면이 있긴 하다. 내가 읽은 바로는 장정일은 이 우익청년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 그리고 ‘은’의 성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10년의 공백과 학습, 정치적 변화 후에 장정일이 내린 결론이 우익청년의 올바른 성장이라면, 이 결론 자체도 한번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김남혁ㅣ내 생각에 장정일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결국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인데, 이 소설은 개인의 자율성이 사장되는 이 시대에 대한 지적이 아닐까, 라고 본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진정한 좌파도, 순수한 우파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장정일은 ‘은’을 통해 자본에 좌우되지 않는 개인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그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박 진ㅣ그건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해석 아닐까? ‘은’이 지닌 힘의 논리가 과연 자본의 힘과 무관한 것일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난 서희원 씨의 의견에 동감한다. 장정일이 워낙 엉뚱한 작가이니, 작가후기까지도 거대한 비꼬기를 위해 이렇게 쓴 것이기를 바란다.
서희원ㅣ나도 그렇게 읽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건 장정일의 기존 소설이 만든 호감이 아닐까 한다.
박 진ㅣ『구월의 이틀』을 수준 높은 농담으로 읽는 것이 소설을 의미 있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일지도.
서희원ㅣ서로의 의견이 종합되지 않고, 이견만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좌담이 꼭 하나의 입장이나 해석으로 좁혀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견해의 차이가 클수록 흥미로운 해석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며 이번 좌담을 끝내고 싶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배도 고프고.(웃음) 『구월의 이틀』은 장정일의 소설을 학수고대했던 독자의 기대(?)와는 달리 ‘우익청년 탄생기’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노무현 정권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국민의 걷는 방식마저 ‘우측’으로 지정하는 이명박 정권의 시대에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10년간의 긴 공백을 깨고 ‘학습’과 ‘공부’를 통해 달라진 장정일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좌담이 『구월의 이틀』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독서를 견인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한다. 또 장정일 작가는 <나비>의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고 계시니, 오늘 충분히 나누지 못한 얘기는 [토론방]을 통해 작가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긴 시간을 함께 해준 두 분께 감사드린다. (*)
----------
좌담자 소개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
서희원
문학평론가. 2009년 <문화일보>, <세계일보> 문학평론에 각각 당선하여 등단하였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근대소설을 연구하며, 여행, 국가간 이동, 소설이란 장르의 형성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