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ㅣ문화웹진 <나비>에서는 최근 각별한 관심을 끌고 있거나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는 문학작품과 문화현상 등을 주제로 매달 이야기를 나눠보는 좌담을 기획했다. 문학평론가 서희원 씨와 김남혁 씨가 날카로운 의견과 진지한 고민을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했다. 먼저 <나비> 좌담 팀에 흔쾌히 참여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린다.
첫 번째 모임인 오늘의 주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1Q84』(문학동네, 2009)와 ‘하루키 현상’이다. 『1Q84』는 선인세 문제로 출간 전부터 논란을 일으켰고 현재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화제작이다. 우선 두 분은 이 소설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그렇게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흡인력이 있다고 느꼈는지 궁금하다.
김남혁ㅣ가독성이 상당히 뛰어난 소설이다.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고 인명이나 지명 같은 것도 낯선 외국소설인데 이렇게 쉽게 읽힌다는 건 사실 좀 의심스럽다. 이미 익숙한 제도와 독서 관습에 편승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소설에 보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찾아간 덴고에게 간호사가 “명랑한 말에는 밝은 진동이 있어요”(2권 584쪽)라고 하며 아버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가독성이 높은 소설은 독자에게 ‘밝은 진동’보다는, 소설에 있는 다른 말로 하면 “뇌의 전족”(1권 265쪽)이 되기 쉽다. 익숙한 것을 약간 유니크하게 표현해서 즐겁게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박진ㅣ가독성이 뛰어난 소설이라는 데 동의한다. 나 역시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가독성이 높다는 것은 일단은 장점 아닌가? 흥미롭게 잘 읽히면서 깊이도 있고 관습을 배반하는 측면도 있다면 물론 더욱 좋은 소설일 테고. 『1Q84』의 경우, 이렇게 재밌게 읽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나쁜’ 측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독성이 높은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잘 이해가 안 된다.
김남혁ㅣ물론 가독성이 높은 소설이 다 그렇단 얘긴 아니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익숙한 이야기 틀을 그대로 끌어다 쓰는 측면이 강하다고 느꼈고 그것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생각이다.
서희원ㅣ박진 씨가 ‘나쁜’ 측면들이라 생각하는 게 뭔지 무척 궁금하다. 박진 씨가 우리 중에서 이 소설을 가장 좋아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의외라서… (웃음) 우선 내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1권까지는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이후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흥미진진했다. 선구라는 종교단체나 출판계의 시스템과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대결을 기대했는데, 2권부터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 이야기가 본격화 되면서 흡인력이 급격히 떨어진다고 느꼈다. 『1Q84』는 아오마메와 덴고라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3인칭’으로 교차하는 소설이다. 하루키는 주로 ‘1인칭’으로 소설을 써오지 않았나? 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얽히게 될까 하는 문제도 무척 흥미로웠는데, 2권까지 거의 만나지 않은 채로 끝난 것도 실망스럽다. 물론 3권이 또 나온다고는 하지만.
박진ㅣ아오마메와 덴고는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어린 시절 친구이자 첫사랑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두 서사는 이미 만난 것이 아닌가? 그러기까지도 너무 긴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그리고 ‘3인칭’이면서 인물 시점을 사용하는 방식은 자유로운 내면 서술과 같은 ‘1인칭’ 서술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마치 바깥에서 인물을 관찰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서술자 부분은 워낙 관심이 많은 문제라서… 직업병이다.(웃음) ‘1인칭’이 아닌 ‘3인칭’을 사용한 것은 아오마메라는 ‘킬러’의 이야기로 소설이 시작되면서 영화적이고 스릴러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서희원ㅣ나는 그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의식한 일종의 제스쳐라고 느꼈다. 고진이 더 이상 3인칭 소설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 말을 의식해서 ‘3인칭의 포즈’를 취했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하루키가 고진의 비평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박진ㅣ흥미로운 지적이다. 어쨌든 두 인물의 서사가 홀수장과 짝수장으로 교차하는 방식은 다소 식상하고 느슨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김남혁ㅣ나는 홀수장인 아오마메의 이야기 전체가 짝수장의 덴고가 쓴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1권 24장에서 덴고는 걸프랜드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장편에 대해 말한다. 그는 자기 소설이 “여기가 아닌 세계”, “달이 두 개 있”(651쪽)는 세계라고 설명한다. 1권 24장까지 달이 두 개 있는 세계는 오로지 아오마메가 놓인 홀수장뿐이다. 또 2권 1장에서 다마루가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36쪽)는 체호프의 말을 전하자 아오마메는 “이건 이야기가 아니에요. 현실세계의 일이지”라고 답한다. 그 말에 다마루는 “그걸 누가 알지?”라고 대답한다. 재밌지 않나? 그뿐이 아니다. 2권 19장에서는 아오마메가 “나는 덴고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 있는 거야, (…)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그의 몸 안에 있어”(501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비유적인 의미겠지만. 짝수장에만 등장하는 덴고에게 ‘여기’가 아닌 세계는 짝수장이 아닌 세계, 즉 홀수장이고, 홀수장은 덴고에게는 이야기의 세계이지만 홀수장의 인물들에게는 현실세계이자 이야기의 세계가 된다. 덴고가 개작을 통해 후카에리와 영향을 주고받게 되듯, 홀수장은 서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작가 덴고(짝수장)의 의식에 전적으로 종속된 서사가 아니라 덴고와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서사가 된다. 마치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Stranger than Fiction)>에서, 등장인물이 작가의 의식에 종속된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작가와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주체로 변화되는 것처럼.
박진ㅣ그건 너무 모던하고 고급한 독서방식 아닐까? 나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둘이 너무 오래 못 만나서 기다리다 지치기는 했지만.(웃음) 이 소설은 그냥 스릴러와 멜로, 판타지와 리얼리즘 소설, 에세이적 특징과 포르노그라피까지,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인 이야기다. 김남혁 씨는 그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해서 이런 ‘문학적인’ 독법을 동원하여 더 깊은 의미를 찾아주고 싶었나 보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 소설에 메타픽션(‘소설에 관한 소설’이자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의심하게 만드는)의 특징도 꽤 강하게 들어 있는 것 같다.
김남혁ㅣ그렇게 여러 가지 요소들이 뒤얽히는 과정에서 필연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닭살스러운 대목들도 종종 나온다.(웃음) 아오마메와 아유미가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쉐프가 나와 포도주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설명하는 대목 같은 건, 왜 꼭 이렇게 써야 했나 싶을 정도로 읽기가 괴로웠다. 반면에 그런 요소가 아주 매력적으로 작용하는 대목도 있다. 덴고의 여자친구가 자기가 좋아하는 재즈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전체 이야기와 긴밀한 연관성이 없어도 세부 디테일이 아주 유니크하게 살아나는 대목이다. 이건 하루키 소설의 장점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일본에서 체호프 소설과 교향곡 <신포니에타>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는데,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희원ㅣ소설 속에서 아유미가 선구라는 종교단체를 말하며, 이것이 종교적 이미지에 ‘뉴에이지 정신’, ‘멋들어진 아카데미즘’, ‘자연회귀와 반자본주의’, ‘오컬티즘’을 적절히 조합한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사실, 이것은 하루키 소설에 대한 설명으로도 훌륭하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합돼 있는 건 원래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다. 『1Q84』만 해도 일본 근현대사부터 식당 에티켓, 음악에 대한 에세이까지 풍부한 문화적 교양을 제공한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자본주의의 문화 교양인이 되는 일과도 같다.
박진ㅣ그게 바로 하루키 소설이 이처럼 대중에게 어필하는 지점일 것이다.
서희원ㅣ맞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스릴러적인 특징은 완전히 깨진 것 같다. 아오마메는 자기가 ‘프로’라고 말하지만 후반부에 종교집단 선구의 리더를 만나게 되면서 그 모습을 전부 다 잃어버리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감상적인 소녀로 변해버린다. 사실 전반부에서도 킬러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완전히 낯선 타깃의 목덜미까지 다가가는 살인의 기술이라니,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박진ㅣ스릴러는 원래 현실성이 없는 거니까. 스릴러 문법 안에서 작동하는 허구 세계이니까. 그리고 서로 다른 요소들이 교차하고 섞여드는 과정에서 스릴러도 그 중 하나로 약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런 종류의 소설에 서사의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좀 어려워 보이는데?
서희원ㅣ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스릴러의 선이 깨진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꼭 킬러 이야기만이 아니라, 덴고의 서사에서도 후카에리가 실종되고 에비스노 선생이 개입하면서 스릴러의 선이 힘있게 밀고 나가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서 나는 급격하게 흥미를 잃었다.
박진ㅣ서희원 씨 말대로 덴고의 서사 역시 일종의 범죄 스릴러로 볼 수도 있겠다. 문학상을 둘러싼 ‘불법적인’ 개작 과정, 사이비종교 단체의 은밀한 폭력까지. 그렇게 보면 스릴러의 선이 무너졌다는 건 이 소설 전체의 서사가 흐지부지 되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김남혁ㅣ이 소설에서 고바쓰와 노부인과 에비스노라는 세 인물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고바쓰가 문단이라는 제도 안에서 뭔가 시스템을 교란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노부인은 자본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인물이고, 에비스노는 현실세계와 거리를 둔 정신적인 힘의 소유자다. 이들 세 인물이 후반부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것이 소설의 서사나 문제의식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킨다.
박진ㅣ그렇다. 이들의 구도가 흩어지고 모든 이야기가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 이야기로 모아지는 바람에 소설이 ‘첫사랑의 판타지’로 흐르고 말았다.
서희원ㅣ재밌는 것은 열 살 때의 이 첫사랑이 「소나기」처럼 순수하고 신성하게 그려지지 않고 세속적인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덴고가 언제나 아오마메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렇게 세상의 때가 묻고 세속적이 되었어도 그 사랑은 오히려 더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 된다.
김남혁ㅣ이 소설에서 제일 불만스러운 것은 혁명과 종교와 사랑 중에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에게 해방을 줄 수 있다는 식의 태도다. 혁명단체 여명, 종교단체 선구의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이 소설은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2부 마지막 아오마메 서사에서 드러나듯 ‘1Q84년’이 인간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출구 없는 감옥’이라고 볼 때, 타인에 대한 사랑만이 해방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지나치게 낭만적인 설정이지 않을까? 『1Q84』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혁명(정치)에 대한 사랑이나 신에 대한 사랑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심도 있게 물어보지 않는다. 혁명(여명)의 폭력성이나 종교집단(선구)의 미개함이 해방의 가능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고발하면서, 타인을 미적 대상으로 우러러보는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성이나 비판도 하지 않는다. 이 역시 타인을 주제의 대상으로만 다룬다는 점에서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덴고는 아오마메만 찾으면, 혹은 아오마메는 덴고만 찾으면 1Q84년의 감옥에서 정말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박진ㅣ좋은 지적이다. 내가 볼 때 첫사랑의 판타지와 관련된 이런 ‘낭만적 거짓’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리틀 피플’의 존재다. 굵직굵직한 서사의 선이 흐지부지 된 것도 리틀 피플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 모든 것이 다 리틀 피플 때문이라는데, 어떤 질문이 가능하고 무슨 비판이 필요하겠는가? 노부인과 아오마메를 연결했던, 성폭력과 관련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선구의 리더처럼 가해자인 남성이 리틀 피플의 ‘리시버’였다면, 그래서 아동을 상대로 하는 처참한 성폭행조차도 ‘마비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그에겐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는 것이 된다. 종교집단 선구의 미심쩍은 변화들도 다 죽은 산양의 입에서 어느 날 리틀 피플이 나왔기 때문에 생긴 일이고, 고바쓰를 중심으로 하는 개작 사건 또한 그저 ‘반(反) 리틀 피플 모멘트’의 일환으로 치환될 뿐이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해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건 서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 아닌가?
서희원ㅣ박진 씨가 너무 흥분한 것 같다.(웃음) 아까 ‘나쁜’ 측면들이라고 했던 게 이런 거였나?
박진ㅣ그렇다. 덧붙이자면, 덴고와 열일곱 살의 미소녀 후카에리와의 성관계도 ‘리시버’와 ‘퍼시버’의 관계여서 가능했던 일이니, 덴고는 아무 죄책감도 고뇌도 없이 성적인 판타지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 이 성관계가 아오마메와의 ‘첫사랑의 판타지’에 흠집을 낼 이유도 없고 말이다. 게다가 더 무시무시한 것은 리틀 피플의 세력이 커지면 어디선가 다시 반 리틀 피플의 세력이 커져서 두 힘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식의 세계관이다. 그런 균형이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상태라고 하면,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선한 행동도, 변화를 위한 노력이나 의지도, 전적으로 무력하고 무의미해진다. 어차피 내가 하는 행동은 곧 반대쪽 힘을 키우는 일일 테니까. 시스템의 강고함을 극대화하여 모든 실천을 무력화하는 끔찍한 세계관이다.
서희원ㅣ나 역시 『1Q84』에 와서 하루키 소설이 정치적으로 나빠졌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84년의 시대적 기억들을 모두 삭제해버리고 개인적 기억만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역사의 종말이란 말과 다를 바 없는 양상이다. 『상실의 시대』 같은 소설에서 하루키가 혁명의 기억 이후의 인간들에 대해 썼다면, 『1Q84』에서는 역사 이후의 인간들을 그리고 있다. 역사의 무거움이 탈각된 인간들에게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으며 그것도 결코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함의를 지닐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더구나 그 방식이 결국 사랑이라면 너무 진부하지 않나?
김남혁ㅣ보충하자면, 이 소설은 1984년이 보지 못했던 개인의 1Q84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1Q84년을 이야기함으로써 1984년의 역사성을 모두 탈각시켜 버린다. 예를 들어,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에서는 공식적 시간이 보지 못했던 개인의 시간을 알파의 시간이라 불렀다. 그런데 『1Q84』는 공식적 시간에서 누락된 개인의 경험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 시간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박진ㅣ그런 의미에서 ‘현실은 하나뿐’이고 1984년은 이젠 사라지고 없다는 식의 설정도 의미심장하다. 원래 일반적인 평행우주론에서는 1984년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의 잔여나 잉여로서, 또는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태로서, 1Q84년의 세계가 또 다른 어딘가에 존재한다. 물론 1Q84년의 세계에서 보면 1984년이 또 하나의 ‘다른 세계’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런데 1Q84년의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1984년의 세계는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상은 공적인 시간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방식일 수 있다.
서희원ㅣ『1Q84』의 ‘Q’가 ‘Question’에서 온 거라고 하는데, 그것이 1984년에 대해 과연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는지…
박진ㅣ실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고,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지도. “설명을 안 해주면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른다는 거야”(2권 215쪽)라는 소설 속의 말이 그렇듯. 이것도 참 무책임한 말이다.
서희원ㅣ이 소설이 조지 오웰의 『1984』에 대한 패러디라면, 그건 의미가 탈각되는 패러디라고 말할 수 있다. 아까도 근대문학의 종언 얘기를 했지만, 하루키 소설은 고진의 비판을 거부하면서 실은 역설적으로 완성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박진ㅣ윤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나쁜’ 소설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데, 그렇다면 하루키 소설이 도대체 왜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90년대도 아닌 2000년대에.
김남혁ㅣ90년대 하루키 현상과 2000년대 하루키 현상은 다르다고 본다. 이는 90년대와 2000년대 문학의 위상이 변화한 것과 맞물린다. 90년대 한국문학은 사회의 이념보다는 개인의 욕망에 집중했다. (사회) 해방담론이 (개인) 억압담론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된 시기에 90년대 한국문학이 있다. 이 같은 문학적 인식의 장 속에 개인의 고유한 경험과 유니크한 감각을 내세우는 하루키 문학이 등장하자 독자들이 크게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박진ㅣ그런 분위기 속에서 『상실의 시대』를 비롯한 하루키 소설들이 큰 호응을 얻었다. 주로 ‘문학적인’ 독자들 사이에서. 하지만 90년대를 지나며 개인의 내밀한 감각은 포화상태에 달했다. 그런데도 하루키 붐은 더 뜨거워졌다.
김남혁ㅣ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문학은 문학 제도가 보지 못했던 하위 장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문학적인 것들을 확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을 가르는 기준선 자체에 대한 반성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가 2000년대다. 하루키를 포함하여 일본문학이 2000년대 출판계에 큰 화두로 떠오른 것도, 문학을 대하는 대중들의 유연하고 정직한 자세, 즉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을 가르는 기준선 자체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0년대에 하루키 소설은 90년대보다 훨씬 더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서희원ㅣ사실 하루키가 90년대에 많이 읽혔지만, 종합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오른 적은 없었다. 하루키가 결정적으로 ‘빵 터진’ 것은 2000년에 현대전자 휴대폰 광고에 ‘윤대녕 플러스 하루키 컨셉’이 등장하면서다. 춘천 가는 기차에서 한 여자가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는데, 그걸 본 남자가 검색을 통해 『상실의 시대』가 『노르웨이의 숲』이란 걸 알아내고는 ‘노르웨이의 숲에 가보셨나요?’ 하고 작업을 거는 내용의 광고다. 이는 이기호의 「나쁜 소설」에서도 패러디 된 적이 있는 윤대녕의 소설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의 정말 유명한 장면이 아닌가.
박진ㅣ아, 그 광고 기억난다.
서희원ㅣ그 광고가 나오면서 하루키가 완전히 떴다. 이전에는 하루키 소설이 문학하는 사람이나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읽는 스테디셀러에 가까웠다면, 2000년 이후로는 누구나 다 읽는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요즘은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도 하루키 모르면 간첩이다.
박진ㅣ2000년대 들어 출판 시장 자체가 크게 변화했다. ‘북 쇼핑’ 시대가 되면서 마케팅이 판매부수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커졌고, ‘승자독식’ 현상이 엄청나게 심해졌다. 인터넷 서점이 활성화되면서 책을 직접 만져보거나 펼쳐보고 고르지 않게 된 것, 온라인 광고가 책의 선택을 좌우하게 된 것도 이런 변화의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김남혁ㅣ『1Q84』의 경우는 실제로 마케팅의 승리로 볼 수도 있다. 특히 번역도 되기 전부터 있었던 선인세 논란은 자연스레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유발했다. ‘10억짜리 소설’이라는 소문이 광고효과를 톡톡히 낸 셈이다. 문학 내적인 특성으로는, 하루키라는 명성에 비해 소설이 쉽고 스토리가 명확하고 가독성이 높다는 점이 하루키 붐의 한 원인일 것이다. 카프카 상, 예루살렘 상 등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이 삶에 대한 거창한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뿐더러 어렵지도 않고 술술 읽힌다는 것. 그래서 독자들이 자신의 개성을 포장하는 데에 손쉬운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서희원 씨가 아까 ‘자본주의 문화 교양’이란 표현을 썼듯이, 그렇게 세련된 문화 취향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데에 하루키 현상의 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물론 2000년대의 열렬한 하루키 독자층의 의견을 직접 들어봐야만 더 근거 있는 분석이 나올 수 있겠지만.
박진ㅣ정말이다. 하루키 팬클럽 회원 중 한 분을 이 자리에 초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웃음) 그런데 ‘90년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키의 감성이 왜 윤대녕 소설이나 무라카미 류 소설과는 달리 지금도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서희원ㅣ나는 2000년대 감수성의 뿌리가 90년대에 있다고 본다. 하루키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큰 변혁운동 이후의 사람들이다. 그렇게 보면 90년대나 2000년대나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지금이, 하루키 소설이 더 많이 읽힐 수 있는 분위기일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그리고 노무현 서거로 이어지면서 다시 한 번 ‘상실의 시대’가 온 게 아닌가? 한쪽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겨우 얻었던 10년’을 한나라당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 하루키적 감수성이 통할 만한 시기다.
박진ㅣ그런 생각은 미처 못했는데. 참 흥미로운 지적이다.
서희원ㅣ사실 『댄스 댄스 댄스』에 오면 하루키가 이미 자기복제를 하고 있고 자기 재능을 다 소진했다는 인상을 준다. 하루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때때로 이에 대한 자기 냉소를 보여준다. 『1Q84』에도 보면 고마쓰가 ‘재능’과 ‘감’의 차이가 뭔지 아냐고 물으면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도 반드시 배부르게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뛰어난 감을 가지고 있으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다”(2권 114쪽)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나는 그런 쪽의 감이 뛰어나”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하루키 자신의 얘기로 읽히기도 한다. 하루키는 정말 어떤 ‘감’이 뛰어난 것 같다. 종교에 대한 언급, <신포니에타>라는 음악의 선곡, 조지 오웰의 『1984』, 체호프의 「사할린 섬」 등이 그렇다. 문학적 의미와 상업적 효용, 하루키는 그런 것을 선별하는 뛰어난 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 소스 멀티 유즈’란 평가도 받는 것 같다.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그렇다. 고마쓰가 덴고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말하며 읽어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덴고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했나요?”(2권 367쪽)라고 고마쓰에게 묻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예술이나 학문을 얘기했다고 대답하는 대목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어떤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건 만날 수 없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다. 마치 1984와 1Q84의 관계와 같다. 하지만 그의 윤리학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바라보고, 판단할 순 있다. 그게 역사와 학문을 학습하는 이유 아닌가? 하지만 고마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고마쓰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모든 것을 위에서 지켜보는 시선으로 말한다. 이것은 다분히 문화적·학문적 정보의 세례를 받은 2000년대적인 냉소의 포즈일 수 있다. ‘난 이명박 찍지 않았어.’ ‘난 이명박이 이렇게 할 줄 알았어’ 같은 태도 말이다. 어찌 보면 하루키는 별로 변하지 않았고, 2000년대에 더 잘 맞을 수도 있다.
박진ㅣ그럴 수도 있겠다. 미디어와 문화적 환경의 차원으로 접근하면 90년대와 2000년대는 천지차이인데, 정치적 무의식의 차원에서 2000년대가 90년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알겠다. 김남혁 씨가 조금 전에 선인세 얘기를 잠깐 했는데, 우리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어떤 관점에서 봐도, ‘선인세 10억원’은 상당히 거북한 액수다.
김남혁ㅣ‘상식 수준을 넘었다’, 라는 비판이 많은데, 실제로 선인세 10억원이라는 액수는 출판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인에게도 심정적으로 불편하다. 아무래도 문학책은 돈과 거리를 둔 정신적인 차원의 활동, 더 나아가 반자본주의적 활동이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1Q84』가 자본제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제 안에서 개인의 해방 가능성을 문제 삼는 소설을 가장 자본주의적으로 소비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하지만 번역된 책의 수준을 보면, 선인세 10억원을 무조건 ‘문학동네’의 상업주의로 몰아세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번에 번역된 『1Q84』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일차적으로 높은 선인세를 제시하여 국내 출판사들 간의 출판 경쟁에서 승리한 후 책은 질 낮은 수준으로 만들어 선인세로 지급한 액수를 손쉽게 벌충하려는 상업적인 행태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책을 이렇게 공들여 만든 데는 하루키에 대한 출판사의 애정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루키에 대한 애정을 출판사가 좀 더 확장시켰으면 좋겠다. 이참에 번역되지 않은 하루키 소설과 절판된 소설, 질 낮게 만들어진 번역서를 문학동네에서 책임지고 번역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선인세 경쟁을 하지 않아도 좋은 하루키 책들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줬으면 한다.
서희원ㅣ높은 선인세에는 그런 기대들이 다 깔려 있지 않을까? 꾸준히 팔려나가는 책도 많고, 절판되어 새로 출간할 책도 있고, 또한 하루키가 이거 쓰고 끝낼 사람도 아니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거라는 기대들도 많은데. 여기서 노벨문학상까지 타게 된다면 하루키 책은 정말 엄청나게 팔려나갈 것이다.
김남혁ㅣ책을 잘 만든 것도, 이후 작업들에 공을 들이는 것도, 상업성과 무관한 애정이라 보긴 어렵다?(웃음)
서희원ㅣ그럴 것이다. 물론 하루키 소설이 선인세 최고 액수는 아니라고 들었다. 문학수첩에서 나온 댄 브라운 소설이 권당 백만불로 최고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댄 브라운 소설은 ‘대중소설이니까’ 하는 생각에 별 논란이 없었던 것 같다. 『1Q84』에 대해서만 선인세 문제를 놓고 ‘한국소설에는 왜 이렇게 하지 않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한국에서 하루키 소설을 대중소설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이 생각하기에 댄 브라운은 나의 경쟁자가 아니고 나와는 ‘다른 문학’을 하는 사람이지만, 하루키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작가들도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데, 문제는 출판사가 그걸 믿어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진ㅣ하루키 소설이 가진 ‘문학의 아우라’가 더 위험한 건 아닌가? 댄 브라운 소설은 무지 재밌고 ‘딱 고만한’ 소설이다. 대중들도 정확히 그렇게 받아들이며 그 책을 읽는다. 그래서 댄 브라운 소설은, 『해리 포터』가 그렇듯이, 뭐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거나 위험할 것도 별로 없다. 그런데 하루키 소설은 똑같이 잘 읽히고 엄청나게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이면서도 뭔가 훌륭한 ‘문학’이란 인상을 준다. 게다가 오늘 얘기했듯이 『1Q84』는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무슨 심오한 메시지나 성찰인 양 그런 태도를 전파하는 건 진짜 나쁘고 위험하지 않나? ‘팔리는’ 데 대한 믿음이라면, 하루키를 당할 한국 작가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고.
서희원ㅣ그래도, 이번 선인세로 확인된 하루키에 대한 믿음은 좀 과도하지 않은가? 그에 비해 한국 장편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부족하다. 한국작가 백 명에게 천만원씩 선인세를 주고 백 권의 장편계약을 하는 것보다 하루키 소설 하나가 더 많이 팔릴 거라는 믿음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한국 작가들이 더 좋은 장편소설을 쓸 수 있도록 적극적인 배려와 지원이 필요하다.
박진ㅣ너무 옳은 얘기지만, 실제로 하루키는 그렇게 팔리고 있고, 출판시장의 법칙에서 ‘문단 문학’이라고 과연 예외가 될 수 있을지… 역시 씁쓸하고 불편한 얘기다. ‘선인세 10억’은 특정 출판사의 상업주의나 하루키에 대한 ‘과도한 믿음’ 이전에 문학마저 문화산업으로 흡수된 상황을 단적으로 예시하는 한 사례일지 모른다.
끝으로, 좀 가벼운 얘기로 마무리해보자. 『1Q84』 3권이 나올 예정이라는데, 3권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각자 3권의 스토리를 예상해보자. 가장 평이하면서도 가능성 있는 경우는, 알고 보면 아오마메는 자살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덴고와 만나 탈출을 시도한다,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면서 결국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끝날 것 같은데. 다른 분 생각은?
김남혁ㅣ나는 역시, 아오마메의 서사가 덴고의 소설 속 서사로 밝혀지는 결말을 기대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공포영화 <링> 3편에서 1, 2편의 이야기가 모두 인터넷 속 환상으로 밝혀지듯이.
서희원ㅣ사랑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면… 공기 번데기 속에 어린 시절의 아오마메가 들어 있는 걸 덴고가 들여다보던 장면 기억하나? 아오마메가 만약 정말로 자살을 했다면, 여주인공이 죽고 나서 번데기 속 아오마메와 덴고가 만나 관계를 맺는 이야기?
박진ㅣ아, 도터!(모두 웃음) 서희원 씨가 유쾌한(?) 상상력으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1Q84』라는 소설의 문제도, 이 소설로 대표되는 하루키 붐도, 여기에 얽힌 우리 문단의 상황도 결코 간단하거나 낙관적이지 않지만,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고 좀 더 현명하게 대응하기 위한 작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달에도 의미 있는 주제로 다시 만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나누길 약속하며, 오늘은 여기서 좌담을 마친다. 긴 시간 함께 해준 두 분께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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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자 소개
서희원
문학평론가. 2009년 <문화일보>, <세계일보> 문학평론에 각각 당선하여 등단하였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근대소설을 연구하며, 여행, 국가간 이동, 소설이란 장르의 형성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