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야 마을 이야기 5회
“내가 어쩌다 이곳에 와 있는 걸까. 여기서 난 또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것일까.”
길은 마을을 지나 더 이어져 있었지만, 그 길을 통해 어디로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산을 조금만 내려가면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더라도 길은 있을 것이고 길은 또 마을에 닿을 것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자리들처럼 조그만 마을들은 그렇게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곳에도 분명히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며, 삶에 대한 나름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들이 나를 부르기도 전에 내가 갈 순 없다. 내 인생 전부를 길을 걷는 데 사용한다 해도 지구 밖에서 보면 조그만 골목 하나를 지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저 길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수도 하라레를 기준으로 동북 지역을 통틀어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양가라는 곳 외엔 없다. 그곳은 이곳에서는 제법 알려진 휴양지로 이 나라에 드나들면서부터 꼭 한 번 시간을 내어 다녀와야지 생각했던 곳이다. 그곳은 고산지대답게 기후가 매우 선선해서 아프리카에선 드물게 냉수성 어족인 송어 요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을 가려면 온 길로 수십 킬로를 되돌아가다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러니 어디로 가든 이 마을에선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말은 처음부터 웨야는 들러 가는 곳이 아니라 목적지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찾아온 내 목적은 뭐지?
속내를 털어놓자면, 나는 웨야에서 일스 노이의 빈 자리를 채우고 싶었던 거다. 웨야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산골 마을의 작은 기적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들고 유럽과 북미의 내로라하는 미술관들을 순회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어왔던 세련된 문화와 오만한 현대미술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봐라, 이렇게 변두리에서도 미술의 역사는 싹트는 것이다. 당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여기에서 태동하고 있으니, 서재에 앉아 함부로 기록하지 마라. 주인의 허락 없이 인용하지 말 것이며, 확인을 하고 싶다면 와서 예를 표하라. 그리고 오래전에 당신들이 도용했던 아름다움의 원천에 대해 명확히 그 출전을 밝혀라.”
지난 세기의 후반부에 이 나라의 쇼나조각이 유럽 미술계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사건은 프랭크 맥퀸이라는 뛰어난 기획자의 안목과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영국 태생으로 프랑스 로댕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이며 평론가였던 그가 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의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으로 위촉되었던 건, 로디지아 정부가 유럽의 탁월한 미술품들로 당시 그 나라에 거주하던 백인들과 상류층의 문화적 허기를 채워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졌던 소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의 세련된 미술작품을 선보이는 대신 로디지아의 작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해 유럽과 미국으로 데리고 갔으며, 로댕박물관(Musee Rodin)과 파리 국립현대미술관(Musee d'Art Moderne), 그리고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등을 통해 마침내 서구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일스 노이가 좀 더 열정적이고 체계적인 기획력을 갖춘 사람이었더라면 웨야 아트 또한 국제무대로 진출하는 길을 열었을 것이다. 웨야의 아티스트들은 그만한 독창성과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다만, 어떻게 자신들의 작품을 연출하고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지, 그리고 그 작품들을 어떻게 선보이고 홍보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제까지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키워내면서 웨야 아트라는 형식을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일스 노이의 노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한 손에 붓을 쥐여주었을 뿐,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농기구를 놓게 하진 못했다. 그들의 손이 온전히 창작을 위해 사용되기 위해선,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선 국제적인 홍보와 기획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일스 노이는 이곳에 절반의 성공과 가능성을 남겨둔 채 떠났고 그가 떠난 곳에 내가 들어왔다. 나는 프랭크 맥퀸의 역할을 웨야에 적용시켜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그 열망을 채우기에 나의 재능은 턱없이 부족했고, 아프리카에 관한 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 불과했다.
■ 학교 입구의 허술해 보이는 간판
한사코 마을을 안내하겠다는 치포 무갓자를 만류하고 갤러리를 나서 마을을 어슬렁거린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은 너른 들판 운동장을 품고 있는 학교이다. 담장이 있는 게 아니니 정문이 따로 있을 리 없건만,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쪽으로 무쿠테 프라이머리스쿨(Mukute Primary School)이라는 조그만 간판이 하나 허술하게 걸려 있다. 나는 속으로 그냥 들판학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잔디가 풀과 섞여 발목까지 자라있었고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주변으로는 무릎보다 높게 자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나는 풀들을 매번 관리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비단 이 학교뿐만 아니라 처음 이 나라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껴왔던 것이다. 어차피 다시 자라날 걸 애써 손질하는 것 자체를 부질없는 일로 여기거나, 언제부턴가 이 나라의 국민들이 심한 피로감과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맞는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큰 이유는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이 나라의 경제 때문이었다.
들판 운동장에는 열댓 명의 아이들이 체육 수업 대신 지팡이처럼 생긴 긴 낫을 휘둘러 풀들을 잘라내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자치기나 골프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심한 부끄러움인지 당혹스러움인지 모를 표정들을 지어 보인다. 이런 멋쩍은 상황을 친근하게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가방 속에서 사탕 봉지를 꺼내는 것이다.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거니와, 이 방법은 상대가 아이들일 경우 효과가 거의 확실하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넌지시 콜라 한 병을 건네는 게 더 효과적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현지인들과 좀 친해볼 요량이라면 가방 속에 사탕 한 봉지쯤 준비하는 게 좋다. 이번에도 사탕은 어김없이 효과를 발휘했다. 몇 마디 주고받은 아이들과 함께 장난을 치고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요청할 수도 있었다.
■ 교사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중앙에 턱을 괴고 고심하고 있는 분이 교장선생님이다. (좌)ㅣ(우)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의 쓸쓸해 보이는 풍경.
무쿠테 프라이머리스쿨의 교장과 선생 일행은 나를 환대했다. 이 학교를 찾아온 동양인 손님은 개교 이래 내가 처음이란다. 이 학교는 이 마을에서 90km 떨어진 학교의 분교로 7학년까지 총 350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어렵기는 본교도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로부터의 재정적인 지원 또한 기대할 형편이 못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처한 교육현실은 참담했다. 교과서 한 권으로 열 명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으며, 분필조차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형편이다. 시멘트벽에 짙은 남색 페인트를 칠해 흑판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잘 지워지지가 않아 분필 자국이 허옇게 남아있다(사진). 교장실 또한 남루하고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들고 있던 펜을 건네자 교장은 고맙다며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교장은 그 펜으로 꼭 내게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아끼던 펜이었지만 내겐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웨야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사무치는 모습들 중 하나가 아직 가난에 눈뜨지 못한 아이들의 크고 그렁그렁한 눈빛들이다. 그 안에 천진과 무구함의 세계가 가득 차 있었다. 자연을 통해 세상을 배운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대체로 그런 눈빛들을 하고 있지만, 산골 아이들의 눈빛은 도시 아이들의 눈빛과 또 달라 보였다. 그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안에 온갖 산짐승들이 뛰어놀고 산새들이 날아들며 과실들을 품고 출렁이는 숲과 하얀 구름이 비치는 듯했다. 이후로 나는 세 번 더 이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더 자라있었지만 그 맑고 큰 눈은 여전했다. 내가 탄 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뒤뚱뒤뚱 마을로 들어설 때 손을 흔들며 달려나오던 아이들의 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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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