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야 마을 이야기 4회
■ 웨야에서 만난 아이들
웨야는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나앉아있는 뭍 속의 섬 같은 마을이다. 세상은 저만치에 있어도 하늘은 가까워서 손을 뻗어 뛰어오르면 솜사탕 같은 구름 한 귀퉁이를 잡아채 입에 넣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마을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사나흘에 한 번씩 드나든다는 버스가 유일하다. 그 버스에 사람들과 온갖 짐 보따리들이 차고 넘치도록 실리고, 머리만 내놓은 채 비닐봉지에 묶여 있는 닭이 실리는가 하면 염소가 실릴 때도 있다. 이런저런 바깥소식들을 싣고 오는 것도 그 버스다.
버스의 지붕 위는 아예 물건들을 실을 수 있도록 낮은 철제난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부피가 제법 나가는 짐짝들과 자전거 같은 물건들을 싣는 데 제격이다. 지붕 위에 그득 짐을 얹고 출렁이며 비포장 길을 오가는 버스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들길을 걸어오는 할머니의 모습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힘들기로 치면 버스나 그걸 타고 오는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그래도 동구 밖을 벗어나고 들어오는 건 새롭고 즐거운 일이어서 버스 안은 늘 소란스러운 대화와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예기치 않았던 다급한 일로 시내에 나갈 일이 생기면 걷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짐이 없으면 두 시간 정도를 걸어서 슈퍼마켓이 있는 마을까지 갈 수가 있다. 그곳엔 그래도 드문드문 버스가 있다.
“밤에는요?”
“달빛만 있으면 오히려 그것도 괜찮아.”
■ 한적한 마을의 전경(좌)ㅣ(우)웨야에서 걸어서 두 시간 가량을 가야 수퍼마켓이 있는 마을에 닿는다. 그 마을의 공중전화 부스.
도시가 아닌 다음에야, 길을 걷는다는 건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거의 일상화되어 있는 일이다. 이따금 오가는 교통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발을 움직여야 한다. 사람들의 걸음은 느긋하긴 해도 결코 무겁지가 않다. 그들의 다리는 마치 제 부피보다도 몇십 배 더 크고 무거운 몸을 지탱하면서도 날렵하게 이동하는 타조의 다리 같다. 사람들이 사는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막막하기만 한 길을 홀로 하염없이 걷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이곳에선 자주 목격된다. 멀리서 보면 고요하기만 한 들판을 지나가는 한 마리의 짐승처럼 보일 것만 같은 쓸쓸한 풍경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알 수 없으나, 그에게도 분명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있을 것이다.
날이 궂으면 마을은 안개와 구름에 잠기고 사람들은 시름에 잠긴다. 삶의 신산함이 이 외진 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비켜갈 리 없다. 외려 외부의 소식이 드문드문 들려오는 곳일수록 생의 고단함은 더 악착같이 기어들어 사람들의 입에서 기어코 깊은 한숨을 뽑아내고야 만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건, 그들의 그림에서 심각한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도, 농투성이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투성이로 살아야 하는 설움도, 대책 없이 망가져 가는 나라의 국민적 열패감도, 군벌들에 의한 정치적 폭력의 아픔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축복으로 여기는 듯 여유와 흥을 잃지 않는다.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 또한 현실의 치열한 고발이나 투쟁보다는 농담 같은 해학으로 간단히 처리된다. 정치적 계몽의 부재일지 모르겠다. 그들의 삶 속에는 현실의 고단함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보다 더 큰 힘으로 작용하는 어떤 가치관이 있을 법한데, 그게 무얼까? 기후 또는 부족의 특성일지 종교의 영향일지, 저들과 더불어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다.
■ 마을을 오가는 버스의 모습과 자연과의 일체감을 보여주는 보드 페인팅 작품.
그림 속의 집들은 대게 지붕이 뾰족한 초막의 형태를 띠며, 구조 또한 매우 단순하다. 웨야의 그림이 사실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단출한 살림살이를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농본주의적 근면성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화면 구석구석을 활기 있게 오가며, 그 사이사이에 가축들이 가족이나 이웃처럼 자리 잡고 있다. 어렸을 적, 내가 살던 집에도 식구 수보다 많은 가축들이 있었다. 그 시절에 그림을 그렸더라면 아마 나도 나와 가족들 옆에 동등한 크기로 그 가축들을 그려 넣었을 것이다. 내가 유년 시절에 가축들에게 느꼈던 끈끈한 유대감을 이곳 사람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가지고 있다. 그 정서적 일체감은 가축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산속 짐승들에서부터 산과 나무, 연못과 들판처럼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적 배경들로 확산된다. 그들의 삶을 말할 때 ‘가난한 충만’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 충만함은 자연과의 원만한 친화 관계가 바탕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면, 표현 양식으로 보자면 구상과 추상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으며, 상징주의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인물이나 동물처럼 움직임을 가진 대상은 측면으로, 나무나 집 같은 사물은 정면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중요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된다. 웨야 아티스트들에게는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 물리적인 상태보다는 존재 자체가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작품의 가장자리는 작가마다 독특한 디자인과 구성으로 장식하는데, 기하학적인 패턴에서부터 구상적인 모티브까지 화려한 색상과 정교한 패턴에서 웨야 아티스트의 재능과 창의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한 화면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의 요소들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는다. 만화처럼 하나의 요소가 하나의 공간 속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웨야 아트를 두고 작가들이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이브 아트’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나, 이를 달리 말하면 정규 교육의 폐해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이처럼 자유롭고 분망한 형식을 창조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난 90년대 전후의 웨야 마을은 작은 기적을 이루어냈다. 웨야는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던 작고 가난한 마을이었고, 누구도 관심 두지 않으며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촌락이었다. 한 나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마을의 사람들이 돌연 한 손에 붓을 들었다고 해서 인구에 회자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웨야의 아티스트들은 1988년 초 짐바브웨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Zimbabwe)에 당당히 초대되었고, 짐바브웨의 유력 일간지 <더 헤럴드>(The Herald)가 이를 대서특필했다. 수도 하라레 시민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 해진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원도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할 만한 마을의 사람들이 예술을 한답시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 작품들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초대전을 열고 전시의 내용이 주요일간지들의 문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은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들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웨야 아트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생의 예술이지만, 아프리카의 문화적인 정체성을 현대적인 방법론으로 풀어내는 지역예술의 좋은 본보기이며, 독특한 스타일로 인해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해가고 있다. 미술대학은 고사하고 깊은 오지에 가까운 마을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서, 그것도 산골에서의 고된 농사로 굳은살이 박인 거칠고 투박한 손끝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건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순수한 마음과 열정,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을 잃지 않고 있으며, 거기에 유머와 해학, 순박한 표현력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 아카데미즘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가 그곳에 너무도 확연하게 존재한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거듭 느끼는 일이지만, 아름다움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예술의 완성도 또한 시장의 가격으로 평가할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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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