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야 마을 이야기 2회
■ 남자와 여자를 아담과 이브로 구분하고 있는 마을회관 앞 공동 화장실
웨야 마을로 들어가는 비포장 길은 고난도 오프로드를 방불케 했다. 군데군데 길이 패고 돌의 거친 골격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상당히 기술적인 드라이빙이 요구된다. 차 바닥이 돌에 걸려 바퀴가 떠 버리기라도 하는 경우엔 차바퀴에 공기압을 채웠던 마을로 돌아가 곡괭이나 삽을 빌려오든가 그 청년들을 모두 데리고 와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차가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부속품 하나라도 깨져 고장을 일으킨다면 제아무리 자전거펌프 마술을 보여줬던 청년들도 힘이 되지 못한다. 막대한 비용을 치르기 전에는 이 깊은 산골까지 수리차량이 곱게 들어와 줄 리 만무하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차는 심하게 요동치고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탓에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삭신이 저려왔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긴 비포장을 거쳐 도착한 마을은 외관상 여타의 시골 마을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수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 말고 움직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을은 적막하기만 했다. 시간이 멎어버린 듯 인적조차 없는 마을을 배회하다 나무 그늘에서 개와 놀고 있는 아이를 만났다. 시골에서 만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땟국에 전 얼굴에 크고 맑은 눈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어른들은 인근 농장에서 일하고 있단다.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이내 어른들을 불러오겠다며 재바르게 뛰어가고 그 뒤를 개가 쫓아갔다. 동양인이 이 깊고 적막한 산골까지 찾아올 일이 없으니 어쩌면 나는 저 아이가 만난 최초의 동양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아마 뭔가 중대한 일이다 싶어 어른들이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갔을 것이다.
■ 웨야 마을 어린이들과. 오른쪽 배 나온 분은 마을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마을 복판에 이르니 아담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입구에는 그 건물이 마을 아트 커뮤니티에서 운영하는 작업장인 동시에 전시장임이 표기되어 있었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이 깊은 산골에 아트 커뮤니티와 갤러리가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내가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도 웨야 아트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어쨌거나 헛걸음을 한 건 아닌 셈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작업장의 내부는 어둡고 칙칙해보였으나 오래 방치되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구석에 채 마르지 않은 듯한 그림들을 걸어놓은 걸로 보아 커뮤니티가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곳에서 뭔가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 날만큼 반갑고 기쁜 일이었다.
웨야 아트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이 마을 공동체의 여인네들 사이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우연히 이 마을에 흘러들었다가 정착하게 되었던 독일인 화가 일스 노이(Ilse Noy)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이 마을 공동체에는 지역 여성 인력계발을 위한 직업훈련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훈련소에서 주로 다루던 것이 양재였다. 일스 노이의 제안에 의해 옷을 만드는 과정을 가르치고 배우던 사람들 사이에서 기능적인 일보다 창조적인 작업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이 말하자면 웨야 아트의 출발이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아트 워크숍을 가동하면서 처음 시도했던 게 아플리케(Applique) 작품들이었던 것은 그런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이후 보드 페인팅(Board Painting)과 삿자 페인팅(Sadza Painting) 등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거기에 따르는 기술적인 문제들을 지도하고 스타일을 완성해 온 인물이 일스 노이였던 것이다.
■ 아플리케 작품. 버려진 옷감들을 바느질로 기워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
일스 노이의 푸른 눈은 바느질하던 그 연인들의 손끝에서 무엇을 읽어냈던 것일까. 어떤 기대와 확신으로 고된 농사일로 단련된 투박한 손에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게 했을까. 짐작건대 일스 노이는 그들의 손을 본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삶에 대한 꾸밈없는 태도와 가히 전폭적으로 느껴지는 솔직한 표현, 그리고 창작에 대한 내밀한 동경과 갈망을 엿보았을 것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스 노이는 웨야 마을을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을 커뮤니티는 자체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면서 웨야 아트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전시기획 및 마케팅의 부재로 힘겨워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스 노이의 빈 공간을 커뮤니티 자력으로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창작만으로는 가계를 꾸려갈 수 없어 주경야작(晝耕夜作)할 수밖에 없는 반농반예의 삶이 버거웠을 것이다.
웨야 아트의 작품들은 주제는 대부분 남부 아프리카 시골마을의 일상과 목가적인 풍경들을 주로 담고 있으며, 남녀의 사랑과 결혼과 관련한 개인의 관심사나 결혼지참금과 일부다처, 남아선호사상 같은 시사적인 문제들, 마을의 행사와 축제 등을 둘러싸고 있는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민담과 전설들을 다루기도 한다. 이들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거침없을 정도로 대담하며 솔직하다.
웨야 페인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모든 작품들이 작가가 직접 기술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이야기가 곧 주제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며 솔직하지만 어떤 수사학으로도 가닿을 수 없는 무구(無垢)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들은 21세기 첨단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단순함의 미덕과 허위에 물들지 않은 우화(寓話)의 세계를 가슴 속에 펼쳐 놓으며 뭉클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작품 속에 반딧불이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처럼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반딧불이 사라지기 이전, 밤마다 지상을 어지럽게 점멸하며 비행하던 불빛들을 바라보며 상상과 몽환에 사로잡히던 심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장식적 수사 없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마치 그림일기를 통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읽어낼 때의 감동처럼 물질문명에 물들지 않은 아프리카 촌락사회의 담박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그리고 이 점이 관념이나 복잡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는 서구의 현대미술 작품들과 상반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 담을 마땅한 이야기가 없을 때는 어떻게 그림을 그리세요?”
“그땐 그냥 일을 해, 이야기가 없는 건 그림 그릴 재료가 없는 것과 같거든”
“언제까지…?”
“꿈에서 이야기가 들려올 때까지”
작품의 뒷면에는 성냥갑 크기의 조그만 주머니가 달렸고 그 안에 작가가 손수 적어놓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주머니 안에 꼬깃꼬깃 접힌 채 담겨 있는 종이를 꺼내 읽어본 이야기들은 대충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치포와 체네세는 작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할머니에게 큰 가슴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여쭸다. 할머니는 그들에게 강에 사는 물방개에게 그들의 젖꼭지를 물리면 큰 가슴을 얻을 거라 말씀하셨다. 치포와 체네세는 강에 갔고 물방개를 찾아 할머니가 일러준 대로 했다.”
레티시아(Leticia)ㅣ큰 가슴을 얻는 방법(How to get big breasts)ㅣ88x72cmㅣ
sadza&dye on the fabric
■ 그림 아래쪽에 물방개에 유두를 물리고 있는 치포와 체네세가 보인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자와 마주쳤다. 너무 놀라 정신없이 도망가다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위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남자는 나무 밑에서 남자를 기다리다 졸고 있는 사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사자는 너무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 남자는 도망가는 사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프리차드(Pritchard)ㅣ 한 남자와 사자(A Man and the lion)ㅣ143x93.5cmㅣ
sadza&dye on the fab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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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