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곳에 온 지 며칠이 지났을까. 서울은 숨이 턱턱 막혀오는 여름이지만 이곳은 1년 중 가장 서늘한 계절이다.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이 얼지 않고 눈 구경을 할 수 없으니 굳이 겨울이랄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밤엔 난방기구가 없으면 외투라도 입고 자야 할 정도로 한기가 몸을 파고든다. 한기에 뒤척이다가 동도 트기 전에 커피 물을 끓이고 있는 이 시간, 서울은 이미 중천이다. 아침을 해결하고 나면 나는 서울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운전을 해 길을 나서야 한다. 계절도 밤낮도 반대이며, 화급을 요하는 일도 없는 이곳에선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 주방 한쪽 구석에 마시고 모아둔 빈 와인 병이 일곱 개, 그러니 여기 온 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숙소가 있는 케이프타운 그린포인트 지역엔 고마운 가게가 하나 있다. 각종 주류들을 할인 가격으로 파는 홀세일 리쿼숍이다. 며칠에 한번씩 이 가게에 들러 맥주와 와인을 고른다. 모든 주종들의 가격이 다 저렴한 편이지만, 특히 와인은 한국에 비하면 반값 이하이다. 품질은 엑설런트! 질 좋은 와인을 싼값에 즐길 수 있는 것은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긴 와인루트가 형성되어 있는 신대륙 와인의 산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의 기후가 포도 재배에 적합한 지중해성 기후라는 사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클럽을 가는 일 외에 밤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마땅치 않은 이곳에선 책을 펼쳐놓거나 다큐멘터리 채널을 틀어놓고, 아니면 오며 가며 사 모은 CD를 걸어놓고 와인을 홀짝거리는 게 제격이다. 하루에 한 병씩 개봉하고 남은 와인은 음식을 만들 때 이용할 수 있도록 따로 모아 둔다. 그러니 빈 와인 병은 이곳에서 지낸 밤들의 수와 일치하기 마련이다.
와인 애호가도 아니거니와 주변에 불기 시작한 와인 열풍에 대해 그리 곱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비싸지만 않다면 와인은 좋은 술임이 분명하다. 와인은 알코올에 집중하지 않아서 좋다. 음식이든 사람이든 음악이든, 와인은 반드시 다른 무엇과 어우러질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거기에 적당한 취기까지. 빛과 향과 맛, 이 삼박자의 신비로운 조화는 때로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 힘을 빌려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우정과 신뢰를 확인하기도 하며, 화해를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달콤한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깎아지른 듯한 테이블마운틴 절벽을 오르던 두 암벽등반가가 정상 바로 아래에서 자일을 그네처럼 고정한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배낭에서 꺼낸 하드 케이스를 여니 와인 잔이 나온다. 흰 천으로 정성스럽게 닦아 손자국이라도 나 있을까 파란 하늘에 비추어 보는 사이 동료는 와인을 열고 조심스럽게 잔에 따른다. 허공의 건배다. 언젠가 보았던 이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애호가도 흉내 못 낼 호사의 극치다. 저물녘이면 테이블 뷰 해안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장바구니를 든 모녀, 강아지와 산책 중이던 노부부, 영화배우처럼 생긴 게이 커플까지 삼삼오오 모여들어 벤치에 자리를 잡고 말없이 석양을 바라보다 흩어지는 게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다. 몇몇 연인은 모래사장에 기대어 앉아 와인을 딴다. 잔은 모래에 꽂을 수 있는 받침 없는 비치용 와인 잔이다. 노을은 세상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사위어가고 연인들은 좀 더 어깨를 밀착시킨 채 살짝 와인 잔을 부딪친다. 징하게 살풋한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언제 저걸 한번 해봐야지 했었다.
와인에 관한 한 신생국으로 분류되지만, 남아공 와인의 역사도 350년을 넘을 정도로 장구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소속으로 케이프타운 건설을 주도했던 얀 반 리벡에 의해 이곳에 포도나무가 처음 심어졌으며, 인도양으로 가는 긴 항해 도중 비타민 부족으로 괴혈병이 성행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포도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종교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프랑스 위그노파의 사람들에 의해 와인 재배가 본격화되었으며, 구대륙 와인의 시대를 이끌었던 프랑스산 와인과 견줄 수 있는 품질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 이곳 와인랜드의 대표 도시 가운데 하나인 프란스후크(Franschhoek)이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남아공 와인은 헬레나 섬으로 추방된 나폴레옹이 위안으로 삼았다는 콘스탄샤(Constantia) 지역의 와인, 특히 그루트 콘스탄샤 와이너리의 품목들이다. 이 지역의 와인은 18세기에 들어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는데,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 왕실의 사랑을 받으며 당시 와인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유럽의 고급 와인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되었다. 흠이 있다면 다른 지역의 와인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어서, 이 와인은 중요한 사람들과의 식사자리에서나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와인랜드의 대표 도시들 가운데 스텔렌보쉬(Stellenbosch)를 거쳐 팔(Paarl)에 이르는 길은 유럽 소도시와 케이프반도 특유의 분위기가 보기 좋게 어우러진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케이프타운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어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거나 나들이삼아 가기 좋은 곳이다. 흰 회벽과 간소한 장식의 아담한 건물들은 초기 이주자들의 절제된 생활방식을 엿보게 하며 한층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핫시즌의 스텔렌보쉬 스피어 와이너리는 휴일마다 축제로 북적인다. 다인종 다문화 국가답게 차려진 음식 또한 인도, 이슬람, 유럽과 아프리카 풍이 혼재한다. 젬베와 마림바, 음비라 같은 아프리카 전통 악기의 연주와 원시의 생명력이 물씬 풍기는 노래와 춤이 이곳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스텔렌보쉬와 팔은 지척이지만, 와인 맛에선 차이를 보인다. 팔이 남극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한류(寒流)인 벵겔라 해류의 영향을 덜 받는 온화하고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와이너리가 하나 있다. 페어뷰(Fairview) 와이너리다. 현대적이며 창의적인 와인 품목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여유와 익살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와인 레이블에도 있는 염소 탑이다. 신기하게도 염소들은 탑을 둘러싸고 있는 나선형 계단을 부딪치거나 떨어지는 일 없이 잘도 오르내린다. 그런데 와인 농장에 웬 염소일까? 페어뷰는 와인뿐 아니라 염소우유 치즈로도 유명한 곳이다. 해외에서 많은 수상을 했으며,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나미비아의 고아들에게 염소와 염소우유를 공급해 주는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는 곳이다.
염소탑이 이 와이너리의 상징이라면 염소는 와인의 얼굴이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이름과 레이블에 염소가 박혀있기 때문이다. 고트 두 롬(Goats do Roam), 남아공 와인으로는 처음으로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2004년과 2005년, 연속으로 100대 와인에 선정되었던 페어뷰의 간판 와인이다. 와인을 좀 아는 분이라면, 이 와인이 프랑스의 ‘꼬뜨 뒤 론’(côtes du Rhône)을 패러디한 것임을 눈치챌 수도 있겠다. 역시 해외의 유명 콘테스트에서 수상을 하며 주가를 올린 고트 로티(Goat Roti), 고트 도어(Goat Door) 또한 프랑스의 유명와인산지를 연상케 하는 패러디가 재미있다. 풍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고트파더(The Goatfather), 영화 대부를 패러디한 이 와인에 이르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고트 두 롬의 이름을 두고 소송까지 진행되자 이에 항변의 의미를 담아 선보인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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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