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사막을 빠져나오면 지형은 암석과 자갈로 이루어진 거친 모습을 띠고 이내 새끼 새의 잔등에 돋기 시작하는 깃털처럼 드문드문 풀과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평원으로 치닫는다.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소로 길다운 길이 보인다. 나를 태운 낡은 지프는 철분이 섞인 붉은 흙먼지를 날리며 오로지 달리는 일에만 전념했다. 심하게 요동치는 비포장 길이었으나, 지프는 일정한 속도로 평원의 심장으로 빨려들었다. 길은 있으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빈 땅이다.
눈앞에서 시멘트 건물들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시야가 한결 헐거워진다. 보이는 것들이 많지 않으니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 하나하나가 새로워 보인다. 토양의 색감과 질감,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감촉과 냄새, 키 낮은 나무들이 달고 있는 이파리의 형태와 빛깔, 그물처럼 얽혀 있는 잎맥의 모양, 덤불의 종류와 그곳에 몸을 숨기는 작은 짐승들… 작고 사소한 것들에도 눈길이 가닿고 마음이 움직였으며,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내가 떠나온 곳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복잡한 시각정보들이 집요하게 생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서 반강제적으로 가해지는 시각 또는 음향 정보들의 횡포는 거의 폭력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매일 반복된다. 이런 폭력에 길들어 있는 도시인들은 그것을 불편한 것쯤으로 받아들이며, 불편하기로는 시골 또한 마찬가지라 여긴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당신에게 수없이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특별히 바라볼 만한 것이 없는 곳에 가보라. 묘안이 떠오를 수도 있다.
물을 바라보면 물결의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할 수가 없지. 시선이 확 풀어져 버리는 일종의 최면 상태가 찾아오거든. 그때 잃어버렸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내가 한 잘못들이 떠올라 울컥하기도 하고, 또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
아주 오래전 내게 들려주었던 어느 소설가의 낚시론이다.
극도로 단순한 평원의 풍경은 시간의 개념마저 지워버린다. 현대인들의 시간관은 시계가 일러주는 기계적 시간관이다. 이 기계적 시간관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작동되는 시스템이거니와, 이런 평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일을 해야 할 때인가는 시계가 아닌 자연이 일러줄 뿐이다.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는 순간 건물에서 쏟아져 나와 식당을 찾아 헤매는 넥타이 부대들은 아프리카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으며, 이곳 사람들에겐 시간에 대한 강박 자체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내 배가 해시계였다. 그것은 어느 것보다 확실하고 진실하고 정확했다. 이 시계가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을 알려줬는데, 오늘날에는 해시계가 허락하지 않으면 내 배가 식사 시간임을 알려도 식사를 할 수 없다.
로마의 희곡 작가 플라우투스가 했다는 말이다. 자연시간을 빼앗아 간 시계에 대해 하는 불평인데, 그 시계가 해시계였다니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해시계 이후 시계는 몇 단계의 혁명적인 발전을 거쳐 지금은 1나노초(10억분의 1초)까지 측정하는 정밀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현대인들은 모두 시간에 대한 강박증 환자들이다. 10초 이상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문이 자동으로 닫히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견디기 힘든 당신과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 3초가 지나지 않아 출발하지 않는 차의 꽁무니에 신경질적인 경적을 날리는 나처럼.
자연적 시간관이 기계적 시간관에 비해 느리거나 소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이 일정한 간격으로 재깍거리며 오로지 ‘돌격 앞으로’ 기계적인 단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며 탐닉할 때 의미와 가치가 발생하는 매우 유연하고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축구를 보라. 그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빠르며 폭발적인가를. 오늘날 자연적 시간관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쉴 새 없이 전진해야만 하는 기계적 시간의 운명이 곧 이전의 기능과 시스템을 넘어서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문명의 비극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비극도 바로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기술문명의 맹목성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맹목성이 온갖 착취와 소외를 야기시키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평원에서 바라보이는 원경들은 내게 잃어버렸던 시간에 대한 또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깨진 유리조각들을 튕겨내며
제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시간들
시간들이 빠져나간 시계를 가방에 넣고
시간의 발자국을 따라 나서는데
보이지 않던 시간들이 보인다
먹구름이 비를 몰고 산을 넘어오는 시간
풀잎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시간
개미들이 망가진 집을 복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
오리들이 둑을 건너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
거미가 거미줄을 다시 치는데 걸리는 시간
해가 지평선 너머 다른 땅으로 잠적하는 시간
밑도 끝도, 집도 절도 없는 발길이다
먼 곳에 와 떠돌다보니,
나보다 먼저 떠돌던 시간이 나보다 하염없고
나보다 먼 곳을 떠돌던 시간이 나보다 정처 없는데
시간의 손끝이 자꾸 내 손등을 어루만진다
내 마음이 당신에게 당도하는 시간,
눈물이 땅에 떨어져 내리는 시간,
생이 꿈틀거리며 허물을 벗는 시간,
나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 시간
- 「원경(遠景)」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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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