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선인장 가시 같은 볕을 쏟아내고 있는 모래언덕의 가파른 경사면을 새끼도마뱀 한 마리가 기어오른다. 도마뱀의 잰걸음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모래알들의 균형을 살짝 건들자, 발가락 사이에서 몇 톨의 모래알이 모래언덕의 경사면을 타고 흐른다. 쓸린 모래알들은 다시 일당백의 무리들을 이끌고 크기를 키워가며 언덕 아래로 무너져 내린다. 이내 모래 언덕은 먼지와 굉음에 휩싸인다. 아뿔싸, 모래사태다. 순식간에 언덕 하나가 사라지고 그 옆에 완만한 구릉이 하나 생겨났다.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일까. 자신의 발끝에서 비롯된 이 사태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도마뱀의 눈이 휘둥그렇다. 뙤약볕 아래 도마뱀은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한다.
도마뱀에게는 사막이 곧 까마득한 우주이다. 그 우주의 장엄한 인과율을 목도한 새끼도마뱀은 충격에 휩싸인 채 혼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마에서 솟은 땀이 뺨을 타고 흐르기도 전에 증발시켜버리는 불모의 모래언덕에도 생명이 있고 그 생명들을 키우고 다스리는 질서가 있다. 수시로 지형을 바꾸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작용하고 있는가 하면 먹이사슬이 있고 자연의 순환구조가 있으니 신은 참으로 위대하고도 지독하다. 그의 사전에 포기라는 낱말의 뜻을 단 적 없으니, 신은 인간이 버린 땅마저 치밀하고 섬세한 손길로 관리한다.
사막은 자신의 영역 안의 모든 생물들에게 허드레 것들에 대한 잔재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사막의 생물들은 말수와 불필요한 움직임이 적다. 참으로 단호하고도 엄격한 부성이다. 사막은 또 낯선 것들의 기웃거림을 허락하지 않는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 헤집고 다녀봐야 보여줄 것도 들려줄 것도 없으며, 당신에게 궁금한 것도 없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뭐 이렇게 무뚝뚝한 풍경이 다 있을까 싶은데, 오랜 시간 두고 보면 그 무뚝뚝함도 다감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사막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사막처럼 그리기 힘든 풍경도 없다는 건 그런 말일 것이다. 선 몇 개 그어놓고 선과 선 사이를 몇 개의 색감으로 채워 넣는다고 해서 그게 사막으로 느껴질 리 없다. 사막을 사막으로 와 닿게 하려면 모래와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그려 넣어야 한다. 사막의 본질은 땅을 덮고 있는 모래와 텅 빈 하늘이 아니라,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어떤 것이다. 사막을 사막이게 하는 것, 그게 뭐지? 무엇이든 증발시켜 버리는 건조한 대기와 바람일 수도 있겠고, 고독하게 버티고 서 있는 선인장이거나 낙타 행렬의 하염없는 발걸음일 수도 있겠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건 ‘시간’이다. 멈추어 있는 듯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기울기를 낮춰가는 모래 사면의 그림자, 거기에 남겨진 작은 짐승의 발자국, 아무도 모르게 모래언덕 하나가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는 변화무쌍한 힘이며, 무수히 변화와 반복을 거듭해 온 거대한 시간의 흔적이다.
200살까지 산다는 갈라파고스 거북이나 110m가 넘는다는 아메리카 삼나무처럼 아주 오래되거나 거대한 것들에겐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사람의 나이가 쉰인데, 200살을 산다면 또 무엇을 알게 될까? 뭐 좀 안다고 하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는 2m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 110m가 넘는 눈높이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은 또 어떻게 다를 것인가? 가령, 키는 광화문 어느 보험회사 앞에 서 있는 망치질하는 조각만큼 크고 의학의 힘을 빌지 않고도 150년을 넘게 사는 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의 위엄과 신령스러운 기운 앞에 모두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출 것이며, 그 가운데 일부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정성스럽게 기록하여 경전으로 삼을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시간과 크기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시간과 크기의 힘은 때론 인류가 축적해 온 경험들을 무력화하고 이성을 무장해제시킬 만큼 강력하다.
사막은 한 나라의 면적과 맞먹을 만큼 거대하고 어떤 나라의 역사보다도 오래되었다. 그러니 사막 앞에선 되도록 말을 삼가는 것이 옳다. 그곳에 발자국 하나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차피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 것을. 벌판 위에 제국을 세웠던 인류는 사막 앞에서 모두 발걸음을 돌렸다. 역사와 문명의 이름으로 이루어왔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무력하게 만드는 저 거대한 파괴의 힘을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주에 도시를 건설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인류는 사막을 지배할 순 없으리라. 사막의 출현 이래 인류는 다만 사막에 기생할 뿐이며, 그저 지나갈 뿐인 것이다.
사막을 여행한다는 건 사막의 나이를 더듬는 것처럼 막막한 일이다. 모래알들의 인과율 앞에서 충격에 휩싸였던 새끼 도마뱀처럼 나는 인간의 욕망들이 지워져버린 단순한 풍경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인류의 조상이 신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두 발을 들었을 때부터 인간은 단순함으로부터 멀어져 왔다. 단순함을 미물이나 짐승의 것으로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첨단의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이 단순한 풍경 앞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못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인간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사막을 건너는 법처럼. 한쪽으로만 가서, 죽어라고 한쪽으로만 가서, 죽지 않고 마을과 우물을 만나면, 그게 사막을 건넌 것이리라. 또 사막은 그렇게 건너야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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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