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
남자에게는 네 가지의 공포가 있다. 고립에 대한 공포, 가난에 대한 공포,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모든 공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 근거는 따로 없다. 조금 전 내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이므로. 요는 남자에게는 공포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포와 함께 살아가기. 이것이 자신과 가족, 또는 영역을 지키기 위해 피를 보아야만 하는 모든 수컷들의 감추어진 본성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그러니 수컷들에겐 들판을 끊임없이 배회하다 달밤에 바위에 올라 우우~ 울부짖는 것도, 어두운 골목길에서 휘청거리며 고성방가를 일삼는 것도 괜한 짓만은 아니다.
강력한 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나 빈틈없는 제도들로 조직된 사회는 남자의 공포를 내면화시킬 뿐, 그것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초조와 불안에 시달리거나, 사소한 일에도 격하게 반응하는 것, 가시지 않는 만성 두통과 40대에 급격히 늘어나는 발병률 또한 내면화된 공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공포가 반드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열악한 환경이 항체를 만들듯, 일찍이 극복해야 할 적을 감지한 이들은 두려움에 맞서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공포가 심약한 사람에게는 독이 되고 담대한 사람에게는 약이 된다는 것이다.
막연한 이상과 구체적인 현실 사이에서 남자들은 대부분 공포에 길들여진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사회구성원으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을 인성의 발전이며 어른 되기의 통과의례로 여기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사회화의 이면에는 ‘길들여짐’의 그늘이 존재한다. 푸코가 이드에서 에고로의 발전을 ‘광기’를 거세시킨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단 남자들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집요하게 개인의 욕망을 순치한다. 불합리한 사회일수록 구성원을 다루는 방식은 가혹하기 마련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불합리에 대항하는 사람들 또한 있기 마련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를 사로잡았던 두 개의 이야기는 모두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다. 불합리한 세계의 폭력에 온몸으로 맞서왔던 사람들, 또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꿈꾸기를 멈추지 않고 결국 그 꿈을 이루어낸 진정한 사내들의 다큐멘터리이다. 이미 지난 시대의, 그것도 우리와는 아주 먼 곳의 이야기가 한 편의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로,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우화로 남는 것은 그들이 꾸었던 꿈이 존재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희박할수록 고귀한 꿈, 그리고 그 꿈을 향한 무모한 도전 말이다.
단순한 경기를 넘어 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축구
먼 이방의 밤은 쉽사리 단잠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겁게 달려드는 피로와 온갖 상념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TV는 얼핏 남아공 로벤섬의 감옥과 축구에 관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해질녘이면 석양을 보기 위해 달려갔던 케이프타운의 시그널 힐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이던 섬. 넬슨 만델라가 18년을 복역했다는 감옥이 있는 섬이 바로 로벤섬이었다. 그런데 군대와 축구도 아니고 감옥과 축구는 웬 말인가. 이후 오래 내 무의식에 잠복해 있던 감옥과 축구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는 마침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을 때, 내 의식 속을 별똥별처럼 스쳐 갔다. 구글과 아마존은 오래전 보았던 그 영상이 다큐멘터리 영화 『More Than Just a Game』이며, 동명의 책이 출판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2007년 7월 18일 펠레를 위시하여 사무엘 에투, 루드 굴리트, 조지 웨아 등 세계적 축구 스타들이 로벤섬에 모여들었다. 감옥 내에 있던 황폐한 축구 경기장에서 그들이 찬 89개의 축구공이 낡은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FIFA가 주관한 넬슨 만델라의 89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보다 앞서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전에서 세기의 축구 스타 지단이 이탈리아의 수비수 마테라치의 가슴팍을 머리로 들이받는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의 지단이 경기 도중 인종 차별 발언을 참지 못해 박치기했던 것인데,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이 ‘남아공의 로벤섬에 두 사람을 불러 화해를 주선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로벤섬은 도대체 어떤 곳이며, 축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로벤섬에는 감옥이 있었다. 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했던 정치범들을 수감했던 감옥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자체가 공포였던 시절이니, 정치범들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가혹했을까. 고된 노동과 폭력으로 점철된 날들이 이어졌다. 간수들 몰래 셔츠를 둥글게 뭉쳐 축구하는 것을 낙으로 삼던 수감자들은 정치 노선을 떠나 한목소리로 축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온갖 탄압 속에서도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여가활동을 집요하게 탄원했고, 때마침 남아공의 가혹한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하던 국제 사회와 적십자사의 압력에 굴복해 교도소 당국은 축구 경기를 허락하게 되었다.
1,400여 명에 이르는 수감자들은 선수, 매니저, 심판, 코치 등 체계적으로 구성된 팀들을 만들고, FIFA의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경기를 치렀다. 지속적인 투쟁으로 경기 중에는 죄수복을 벗고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자유도 얻었다. 불어난 팀은 세 개의 리그로 나눠 매주 축구 경기를 치렀다. 만델라의 89회 생일에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단체의 자격으로 FIFA 회원이 된 마카나축구협회는 이렇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서슬 퍼렇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서, 그것도 정치범들을 모아놓은 수용소에서. 전설 같은 그들만의 리그는 1991년 만델라 정권에 의해 감옥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는 축구를 통해 저항과 단결을 도모했다”는 만델라의 말처럼, 로벤섬의 감옥 축구는 다양한 정치적 신념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수감자들을 하나로 묶어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공으로 승패를 가르는 단순한 게임을 넘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연대였던 것이다.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수많은 역경을 딛고 인간의 위엄을 찾는 도구로 축구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대한 이 믿기 힘든 설명은 우리 모두에게 자유와 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아름다운 전설로 남는다.
체제에 맞춰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맞서 싸우는 게 옳은 일이었다(딕강 모세네케, 수감번호 491/63). 스포츠가 곧 인권이었다. 우리 수감자에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아이잭 음티무녜, 수감번호 898/63).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낙담했다. 우리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권리를 쟁취해야 했다(베니 은토엘레, 수감번호 287/63). 자기 자신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든 간에, 노래는 묻혀버리고 역사는 사라질 것이다(안토니 수즈, 수감번호 501/63). 당시 마카나축구협회 소속의 선수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붕괴를 이끌었던 혁명가들이었으며, 만델라 정부의 토대를 구축했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레인저스 FC 팀의 주장이었던 제이컵 주마는 현재 남아공의 대통령으로,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지휘했다.
케냐산의 정상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
아프리카에 매료되어 청춘의 한 시절을 봉헌했던 사람들이 있다. 후배 윤석영이 그런 사람이다. 아프리카가 까마득하게만 와 닿던 시절 대기업으로 분류되던 멀쩡한 직장을 내던지고 대륙 종단여행에 나선 후로 엉덩이가 가려울 때면 미련 없이 한달음에 날아갔던 그였다. 한동안 배낭에 돌을 넣고 웬만한 거리쯤은 뛰어서 다니는 미친 짓을 일삼더니, 일주일간 250km를 달리는 죽음의 사하라사막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고 온 별종이다. 어느 날 이 후배가 아프리카 케냐산에 미친 별종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No Picnic on Mount Kenya』. 1953년 이탈리아에서 초판이 발행된 뒤로 판을 거듭하며 60년 가까이 절판되지 않고 읽히고 있는 책이다. 책은 얼핏 케냐산 등정기로 보였으나 내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전쟁과 포로, 그리고 탈출, 엄혹한 현실 속에서 미치도록 열망했던 사내들의 꿈,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무모한 도전과 정복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모험담은 국가적 자존심을 위해 산의 정상에 깃발 꽂기 경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미와 인간애를 재확인하고, 동시에 하산 후 다가올 결과 앞에 결의를 새로이 다지며 정상에 오르고자 몸부림쳤던 세 산악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 펠리체 베누치는 1910년 이탈리아인인 부친과 오스트리아인이었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이하다 싶은 건 부모가 모두 열혈 산악인이었다는 것. 그 또한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줄리앙 알프스의 산자락들과 돌로미테 협곡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등반에 입문했다. 그러나 그는 인생행로는 산악인의 길과는 판이했다. 로마에서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뒤 이탈리아 식민지청에 지원해 공무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에티오피아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제국을 건설하려던 무솔리니의 계획은 1941년 연합국이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짧게 막을 내렸다. 당시 서른한 살이던 베누치는 외국에서의 근무경력을 쌓고자 하였으나, 결국엔 동아프리카의 영국령 케냐에 있던 제354 포로수용소에서 전쟁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포로수용소 막사는 인도양에서 몰려든 먹구름 아래 있었다. 주위는 마치 납으로 된 담요를 두른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베누치는 침울했다. 우기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무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늦은 시간, 베누치는 갈라진 먹구름 사이로 솟아오르는 듯한 케냐 산과 맞닥뜨린다. 먹구름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거대한 덧니 모양의 날카로운 봉우리가 빛을 등진 채 검은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적도의 빙하를 바라보던 베누치는 뇌리를 섬광처럼 스치는 단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저 산의 정상을 밟겠노라. 이 기이한 모험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베누치의 케냐산 등정 계획은 허황한 것이었으나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망치를 갈아서 피켈을 만들고 쇠붙이들을 주워 모아 아이젠을 만들었다. 버려진 옷감들은 배낭으로 다시 태어났다. 돈키호테 같은 그의 계획에 대해 동료들은 조용히 침묵하는 방법으로 도움을 주었다. 영내는 가시철조망이 둘러싸고 있었으나 복제한 열쇠도 확보해 두었다. 모두 잠든 밤이면 몰래 영내를 빠져나와 주변을 정찰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보다 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귀안과 엔쪼라는 두 동료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해발 5,199m의 케냐산은 킬리만자로에 이어 아프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놀은 설산이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180km 떨어져 적도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국호를 빌어올 만큼 케냐인들에겐 매우 신성시되고 있는 산이다. 검은 암벽들과 흰 만년설이 범부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신들의 거처이다. 수용소를 탈출한 전쟁포로 세 명이 이 산의 정상에 도전했던 것이다. 식량과 장비는 물론 신통치 않았으며, 의료와 사고에 대한 대책 또한 전무하다. 그러나 신은 그들에게 자신의 거처에 족적을 남기는 것을 허락했다. 수용소 탈출 보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포로수용소로 돌아왔다. 왜? 처음부터 탈출이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탈출에서 등정에 이르는 과정과 복귀 이후 그들이 겪었을 고초를 설명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종전 후 베누치는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이탈리아 외무부에 복직해 대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한국에서 올림픽이 치러지던 해에 그는 죽었으나, 이 별종들의 모험담은 세기가 바뀐 이후에도 사내가 지녀야 할 이상에 대한 꿈과 도전, 그리고 투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수컷들의 본능을 자극한다. 후배 윤석영과 나를 매료시켰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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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