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눈이 오고 있다고 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얘기인가 싶어 귀를 귀 기울였더니, 뉴스는 남아공 웨스턴케이프 주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제법 큰 눈이 오고 있노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했다. 물론 아프리카에 눈이 오는 지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킬리만자로와 케냐 산은 날씨만 맑으면 멀찍이서도 산 정상 부근에 쌓여 있는 빙하를 관찰할 수 있다. 나이로비행 비행기의 조종사는 승객들을 위해 일부러 킬리만자로 위를 저공비행으로 선회했고, 친절하게도 승무원의 멘트를 통해 온난화의 영향으로 매년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킬리만자로의 8부 능선쯤은 시즌을 끝낸 스키장처럼 듬성듬성 흙이 볼썽사납게 드러나 있었지만, 분화구가 있는 정상은 그런대로 설산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본 유일한 아프리카의 눈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산악지형이 발달한 동부 아프리카의 사정이었다. 그런데 사막지대가 분포되어 있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눈이라니. 꽃샘추위에 동사하거나 폐장한 해수욕장에서 익사하는 일이야 그럴 수도 있는 사고지만, 남부 아프리카의 눈은 정말 지구 기후 센서의 고장으로 터진 심각한 대형 사고처럼 들렸다. 생각해보니 남아공 어딘가에 인공 눈을 이용한 스키장이 있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들었던 적이 있긴 했다. 알래스카 어딘가에 누드비치가 있고 시베리아 벌판에 원숭이가 산다고 해도 믿을 수는 있겠지만, 남아공의 스키장은 군 복무 시절 주임상사의 조크 레퍼토리였던 전설의 월남스키부대 같은 허무맹랑한 얘기였다.
자료를 찾아보니 레소토Lesotho 인근 크와줄루 나탈KwaZulu-Natal과 프리 스테이트Free State 사이에 아프리스키Afri-ski 리조트라는 스키장이 정말 있긴 있었다. 갑자기 자메이카의 봅슬레이 대표팀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다루었던 <쿨러닝>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아시다시피 밥 말리의 고향 자메이카에는 눈은 고사하고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가 없다. 그러나 이 자메이카 대표팀은 실제 1988년 캐나다의 캘거리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 출전, 경기 도중 부러진 썰매를 메고 결승점을 통과해 전 세계의 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았었다. 제대로 된 경기장 하나 없는 우리나라 봅슬레이 대표팀이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열린 아메리카컵 4인승 레이스에 참가해, 현지에서 500불을 주고 빌린 썰매로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계절 스포츠에서 경기장이 없는 것과 계절 자체가 없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남아공에도 알파인이나 노르딕 같은 종목의 스키 국가대표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스키장은 분명히 있었다.
남아공의 7월은 생각보다 추웠다. 맑은 날은 우리의 가을 날씨 정도에 해당되었지만, 날이 궂고 바람이 많은 날은 점퍼를 챙기지 않으면 바깥출입이 곤란할 정도로 맵싸했다. 우리가 북새통의 휴가 시즌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 남아공에선 가장 춥고 비가 많은 시기이다. 그즈음에 내리는 비의 양에 따라 9월부터 들판을 물들이는 들꽃의 색과 양이 결정된다. 삽시간에 마을이 잠기는 집중호우는 없지만 커다란 먹구름들이 분주하게 나그네 비를 몰고 다닌다. 케이프타운의 테이블마운틴에는 이동을 제지당한 구름들이 걸려 있는데, 겨우 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 덩이의 구름이 어망을 빠져나온 물고기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바람을 타고 흐른다. 구름의 이동을 따라 산발적으로 흩뿌리는 비가 뺨에 닿으면 제법 차갑게 느껴진다.
눈이 내리고 있는 곳은 항공사 기내 음료로 자주 제공되는 천연과즙 주스로 유명한 세레스Ceres 인근의 산골이었다. 와이너리들이 밀집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 스텔른보쉬Stellenbosch와 팔Paarl까지는 몇 번 가보았지만, 세레스는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는 곳이다. 지도로 대충 길을 가늠해보니 케이프타운에서 차로 족히 두 시간은 넘게 잡아야 하는 길이다. 얼마나 많은 눈이 왔는지는 몰라도 웬만한 정도라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녹아 사라졌겠지, 그래도 아프리카에서 눈을 맞아볼 흔치 않은 기회인데 그때까진 내려주겠지, 이곳의 눈이라면 떨어지는 눈을 입을 벌리고 받아먹어도 될 거야… 그러나 하이웨이 N1을 타고 팔에 이르는 동안 눈이 내릴 기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공연한 헛걸음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 뭐 어떤가, 아프리카 자체가 내 인생의 헛걸음일 수도 있는 일인데. 어차피 아프리카에선 목적지에서 목적만을 달성해 돌아오는 경우란 없다. 어떤 일로 어느 곳을 가던 기대 이상이거나 기대 이하 둘 중 하나다. 그러니 가려고 맘먹었거든 생각을 비우고 그냥 가고 볼 일이다. 넘치든 부족하든 그곳은 내 생각과는 다른 곳이므로.
지도에는 단순하게 표시되어 있던 길들이 막상 시골 마을로 들어서자 이정표도 없는 작은 갈림길들로 변해 도처에서 발목을 잡는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기를 몇 차례,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묻기를 또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세레스에 들어섰으나 산과 들에는 휑하니 찬바람만 지나고 있었다. 다시 사람을 불러 세워 세레스를 묻지 않고 눈이 온다는 지역을 물었다. 저쪽 농장을 끼고 좌회전해서 무조건 큰길을 따라 20분쯤 더 가면 아마 눈이 오는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쯤 가면 차들이 많을 것이며, 그 차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참내 무슨 설명이…
어설프게 들렸던 그 설명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시키는 대로 길을 가다 보니 어디서들 나타났는지 한 곳을 향해 가는 차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 눈에 덮인 산의 모습이 힐긋 눈에 들어왔다. ‘와우!’ 그때까지 아프리카의 눈을 상상해보지 못했던 터라 가슴이 콩닥거리기까지 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풍경은 설산의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차들의 행렬이 일제히 경적을 울려대며 들뜬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야 눈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경이로운 풍경일까.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차량의 보닛 위에는 하나같이 조그만 눈사람이 앉아 있었고, 눈발은 이미 간간이 차창에 부딪히며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썰매를 타도 될 정도로 눈이 쌓인 지역에 이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나와 일생동안 몇 번 겪어보지 못할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말 그대로 눈의 축제였다. 눈이 마치 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양 축복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소박하고 정겨워 보였다. 차에서 내리는 데 어디서 눈덩이 하나가 뒤통수로 날아든다. 즉시 반격에 나서 처음 보는 꼬마 녀석들과 한바탕 눈 전쟁을 치르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의 즐거움에 동참했다. 여기저기서 노래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눈이 흩뿌려진다. 흑인과 백인과 혼혈인이, 아이와 어른이 마치 오래 알아오던 사람들처럼 스스럼이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단지 날이 추워서 내리는 눈일 뿐인데. 눈이라는 공통의 재료로 온갖 놀이에 빠져있는 사람들 사이로 미리 준비해온 듯한 종이 박스에 비닐을 깔고 눈을 퍼 담는 사람들이 보인다.
“왜 눈을 거기다 퍼 담아요?”
“잘 가지고 가서 동네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혹시…, 설마…, 해가며 달려온 미심쩍었던 길이었지만, 확실하게 기대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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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