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서 320㎞가량 떨어진 마스빙고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거대한 돌 유적지이다. 198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이 유적지는 건축의 기법과 관련하여 아프리카를 통틀어 피라미드 다음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비의 건축물이며, 사하라 사막 이남 최대의 고대 유적지이기도 하다.
과학적 연대측정법으로 확인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축조 시기는 대략 11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른다. 이 유적이 발견된 이래 수많은 가설들이 분분했지만, 최근에는 당시 이 지역에 세워졌던 카랑가족 모노모타파 왕조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4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짐바브웨에서 모잠비크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정치적 지배를 행사했던 모노모타파 왕국은 16세기에 그 절정을 맞았으나, 이내 포르투갈의 침략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1980년 로디지아Rhodesia의 독립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는 짐바브웨라는 국호는 이 유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 문화적 유산을 계승한 것은 짐바브웨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쇼나인(人)들이었다.
이 유적은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 유적을 찾은 유럽인들과 영국 식민지배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축성기술에 놀랐으며, 이런 위대한 유적이 원주민인 흑인들에 의해 세워졌을 리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들은 이 건축물이 피라미드를 축조했던 이집트인들이나, 한때 지중해 연안을 지배했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기도 했으며, 솔로몬 왕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내었던 에티오피아 시바 여왕의 새로운 왕궁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했으나, 발굴 조사 결과 카랑가 부족에 의해 세워진 것임이 밝혀졌다.
최초의 축조 시기는 빠르게는 8세기경으로 측정이 되기도 하나, 대부분은 11세기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300여 년간 직선적인 형태가 아닌 물 흐르는 듯한 풍부한 곡선형으로 부분적으로 계속해서 축조되었으며, 마침내 1,800에이커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 웅장한 석조 건축물을 완성시켜 놓았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건 이 건축물의 규모가 아니라, 축조술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 벽돌로 쌓은 거대한 돌기둥과 성곽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유적은 돌과 돌 사이에 접착제 역할을 하는 어떤 물질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 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큰 흐트러짐 없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돌로 쌓아올린 벽이다. 석벽은 구릉 주변에 널려 있던 화강암으로 만든 벽돌로 축성되었다. 다른 벽면들과 마찬가지로 돌과 돌을 서로 붙여주는 회반죽 없이 서로 꼭 맞물려 있는데, 벽을 축성해 감에 따라 안쪽으로 기울어진 경사면을 만들기 위해서 조금씩 안쪽으로 빗겨 맞물리도록 돌을 고정해 나감으로써 석벽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거칠고 굵은 돌을 사용해 축성되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축성 기술이 정교해져 벽돌의 크기가 보다 조밀하고 일정해지며, 사문석을 사용하여 석벽의 표면과 마무리가 뛰어나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아크로폴리스와 직경 100m, 원주둘레 250m에 달하는 엔클로저와 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골짜기의 유적이 그것이다. 초기에 이 유적을 조사했던 학자들에 의해 이 유적이 솔로몬 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금광으로 번영을 누렸던 오필 왕국의 수도였다 라거나,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건설한 것이 아라비아 출신의 북방민족이라는 엉뚱한 발표가 잇따르자 전설 속의 황금을 찾아 몰려든 도굴꾼들에 의해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규모로 볼 때, 대충 1만 명 이상의 인구가 그레이트 짐바브웨 주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200~300명가량의 지배계층만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내부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언뜻 보기에는 이 거대한 벽은 순수하게 방어적인 목적에서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돌벽이 과연 전쟁의 목적으로 건축되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 벽은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왕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평민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유적의 또 하나의 미덕은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곡선미와 기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벽과 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건축 전체가 곡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건축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그 안에서 발견된 돌조각들과 더불어 20세기 후반에 다시 한 번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던 쇼나 조각의 태동을 예감하기에 충분하다. 비록 쇼나 족이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축조하진 않았으나, 15세기 이후 이 지역을 떠났던 카랑가 족의 문화적 유산을 이어받아 사하라 이남 유일한 석조문명의 영광을 쇼나 조각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마땅할 것이다.
짐바브웨는 ‘zi(big) ― mba(house) ― bwe(stone)'의 의미들이 조합되어 생성된 언어이다. 유적의 이름에서 국호를 차용하고 있으며, 이 유적 가운데 돌탑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새로 단장한 공항의 상징탑을 건축한 점, 화폐를 비롯하여 국가의 공문서에 ‘돌’과 관련한 상징물들을 사용하는 점 등은 이 나라가 얼마나 오래전 이 땅에서 싹텄던 석조문명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해준다. 하라레 외곽 에프워스에는 치렘바 밸런싱 록Chiremba Balancing Rock이 있다. 자연이 만든 것이라고 믿기 힘든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 탑이다. 세 개의 커다란 바위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서 있는 바위는 짐바브웨의 모든 화폐에 디자인되어 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짐바브웨 버드, 치렘바 밸런싱 록과 쇼나 조각 등 짐바브웨 인들의 정신과 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상징물들은 모두 ‘돌’이거나 돌로 제작된 것이다. 짐바브웨는 천상 ‘돌’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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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