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루바(Yoruba)
남아공 더반에서 있었던 월드컵 때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부부젤라를 불어대던 나이지리아 응원단은 온통 초록과 흰색의 물결이었다. 나이지리아 국기가 그렇다. 가로로 놓인 흰색 도화지를 세로로 삼등분해 양쪽에 초록색을 칠하면 그게 바로 나이지리아의 국기가 된다. 초록은 농업을 흰색은 화합을, 세 기둥은 각각 북부의 하우사족과 동남부의 이보족, 그리고 남서부의 요루바족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사람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윌레 소잉카의 핏줄 요루바는 나이지리아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주요 부족 중 하나이다.
요루바족은 아프리카 전통미술과 관련해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부족이며, 아프리카에서 예술품 제조 전통을 가진 가장 큰 부족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강력한 왕권을 출현시켜 정교한 양식의 대규모 궁전들을 건설했으며, 상주인구가 2만 명이 넘는 큰 규모의 도시들을 거느리며 아프리카 문명의 중심에 있던 부족이다. 천이백만 명이 넘는 요루바 인들은 현재 대부분이 나이지리아 남서쪽 기니 연안에서부터 베냉 공화국의과 토고의 산림지대에 이르는 땅에 거주하고 있다.
요루바의 신령체계를 살펴보면 신들의 집합소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신들의 가장 위에 만물의 창조주인 최고신 오로란(Ororan)이 있고, 오로란은 오리샤라(Orishara) 신을 창조하고 그를 통하여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게 하였다. 오리샤라는 다시 오리샤(Orisha)라고 하는 분신들을 잉태하여 인간의 땅에 살게 하였는데, 자연계와 인간계의 일들을 관장하는 신령인 이 오리샤의 종류가 무려 400가지를 넘는다. 최고신 오로란은 창조과정에서 탐욕스런 인간이 하늘의 식물을 훔쳐낸 사건 이후로 지상과 하늘을 멀리 떨어지게 했으며, 인간들과는 절연을 이어가고 있다. 요루바 인들은 오늘날에도 창조주 오로란을 생략하고 인간계 신령인 오리샤들에게는 성대한 제(祭)를 올린다. 임금을 몰라라 하면서 사또를 모시는 격인데, 이 창조주와 신령들과 인간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절묘하게 와 닿기도 한다.
요루바 인들은 오리샤를 숭배하기 위해 그 모습을 나무에 조각하여 우리의 사당을 닮은 신전 안에 모신다. 그 가운데에는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지혜의 신 오론밀라(Oronmila)가 있고 책략가이자 전령의 신 에슈(Eshu)가 있으며, 수렵과 대장간의 신 오군(Ogun)도 있다. 특히 천둥과 번개, 폭풍의 신인 샹고(Shango)의 모습은 다른 신들에 비해 자주 보인다. 번개와 폭풍을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곧 인간의 생명을 통제하는 절대적인 권력에 다름없다. 폭풍을 동반한 번개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이며 번쩍이는 강렬한 불빛은 대지를 갈라놓을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는 요루바의 강력한 왕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샹고를 모시는 오요(Oyo)에서는 왕들의 대관식이 대대로 샹고의 신전에서 이루어졌다.
요루바 미술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된 문과 뛰어난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된 기둥 등으로 꾸며진 샹고의 신전이 지어진 후에 비로소 요루바의 왕궁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요루바 인들에게 미치는 샹고의 힘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요루바 족에게서 발견되는 독특한 미술 양식 가운데 하나가 쌍둥이(Ibeji)의 형상을 한 조각들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에 유달리 쌍둥이들이 많았으며, 그들을 샹고의 핏줄로 여겨 죽은 후에는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조각이 제작되었다. 이 쌍둥이 조각에 요루바 인들은 마치 아기를 대하듯 옷을 입히고 화려한 구슬 장식을 두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음식을 먹이고 씻기기도 하는 등 각별히 보살폈다.
현재에도 요루바 지역에선 수많은 종교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겔레데(Gelede) 의식은 나이든 여성들의 힘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악한 세력을 물리칠 목적으로 행해지는 의식이다. 겔레데 축제의식 동안 사람들은 얼굴 모양으로 깎은 헬멧형 마스크를 쓴다. 가면의 꼭대기에는 정교한 머리장식이나 사람의 동작을 상징하는 조각물이 붙어 있다. 요루바의 북동쪽 에티키 지역에서 중요한 선조들을 기리기 위한 에파(Epa) 의식에 쓰이는 가면은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게가 30kg 안팎에 달할 정도로 부피가 크다. 의식이 치러지지 않을 때는 보통 신전 안에 모셔져 있는데, 사람들은 가면에 술을 바치고 기도를 한다고 한다.
아샨테(Ashante)
아샨테 부족은 가나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아칸(Akan) 족의 10여 소수부족 가운데 하나로 이웃 왕국에 복속되어 있었다. 아샨테가 왕국을 건설하면서 아칸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건 네 번째 왕 오세이 투투(Osei Tutu)가 등극하면서부터였다.
왕을 화나게 한 후 나라를 떠났던 이웃 왕국의 ‘아놋치’라는 사람이 위대한 주술사가 되어 오세이 투투 앞에 나타났다. 아놋치는 최고신 냐메(Nyame)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왔노라고 했다. 임무의 내용은 아샨테를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능력을 이용하여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를 일으켰다. 모두가 놀라 하늘을 주시하고 있을 때, 하늘 한가운데에서 황금의자가 내려와 오세이 투투의 무릎 위에 사뿐히 올려졌다. 전설에 따르면 1701년 어느 금요일의 일이었다고 전한다.
아샨테 인들에게 황금은 태양을 상징하며, 태양이 가지고 있는 불멸의 영속성은 생명과 인내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의자는 왕의 강력한 권위의 상징이다. 오세이 투투의 한 사제는 이 황금의자를 왕국의 통일과 부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이후로 아샨테는 쿠마시(Kumasi)에 도성을 세우고 주변 세력들을 통합해 온 해안에서 밀림과 대초원에 이르는 아칸 족 전 영역에 정치적 영향을 끼치는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아샨테 왕국을 수호하는 성물인 황금의자는 왕조차도 임관식이나 왕국의 주요 예식에만 앉을 수 있는 고귀한 것이었다. 아샨테 인들은 영국으로부터 이 황금의자를 지키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치르던 중 황금의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1921년 건설인부에 의해 다시 발견된 이후로 오늘날까지 아샨테 인들에게 부족의 역사, 종교, 문화적인 의미들을 전달하고 있다.
15세기에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발을 디뎠던 유럽의 탐험가들은 기니 만 연안 현재 가나의 땅에 도착했을 때, 엄청난 양의 황금과 아름다운 미술품들에 깜짝 놀라, 이 지역을 황금해안(Gold Coast)이라고 불렀다. 황금의자의 전설이 시사하는 것처럼, 찬란한 황금시대의 주역이 아샨테 부족이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무슬림 세력들과 벌였던 금 교역은 당시 아샨테의 번영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샨테 문화를 세계에 알리게 된 것은 황금의 휘황함이 아니라 부족의 영토에 산재되어 있던 뛰어난 미술품들이었다. 대부분이 유럽에서 제작된 것들이긴 하지만, 아프리카 미술을 개괄하는 저명한 도록들은 반드시 아샨테 미술의 몇 가지 모델을 수록하고 있다.
아샨테의 미술은 크게 금속공예와 목공예,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다산은 아샨테의 목조각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주제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아쿠아바(akuaba)라는 아이 형상의 조각인데 그 배경이 이렇다. ‘아쿠우아’라는 여인의 소망은 아이를 갖는 것이었으나, 이 연인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왕의 명으로 나무로 만든 아이의 형상을 만들어 지니게 되었는데, 머지않아 여인은 거짓말처럼 딸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후로 여자가 아쿠아바 조각을 휴대하고 다니면 어여쁜 여자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퍼져 이 아쿠아바 조각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사라졌을 때, 아쿠아바 조각을 음식과 함께 숲의 언저리에 두면 아이를 사라지게 한 악령을 유인해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이 조각의 또 다른 용처이기도 하다.
에씨 만사(Esi Mansa)라는 모자상 또한 다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조각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자신의 가슴을 한쪽을 잡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모계사회의 전통을 반영하는 한편 아들을 통해 계속하여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아샨테인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가계와 혈통을 중요시하는 왕실과 평민들은 지금도 모자상을 무덤 안에 넣는다고 한다. 새로운 족장들이 취임할 때 제작되어 중요한 모임이나 축제 기간에 족장의 위엄과 명망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던 의식용 의자와 전통적으로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켄테(Kente) 옷감, 귀중품들을 넣어두는 황동 용기인 쿠두오(kuduo) 또한 아샨테 미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빼놓을 수 없는 품목들이다.
현대에 이르러 가장 독창적이며 유머러스한 양식으로 아샨테 미술을 세계에 알린 사람이 카네 크웨이(Kane Kwei)일 것이다. 이 미술품은 평생 어부로 살던 삼촌이 목수였던 카네 크웨이에게 자신의 삶을 축복해줄 통나무 관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관은 아름답게 만들어졌고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평생 아껴오던 물건이나 소망해 오던 형상의 관을 주문하게 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택시 회사 사장을 위해 벤츠 자가용 모양의 관이 제작되기도 하고, 많은 자녀를 낳았던 여인을 위해 닭 모양의 관이 제작되기도 하고, 여행가를 위해 비행기 모양의 관이 제작되기도 했다. 이 독특한 관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카네 크웨이는 마침내 목수에서 아티스트가 되었다. 카네 크웨이는 1992년에 작고했지만 지금도 이 관들은 유럽의 명망 있는 미술관들을 순회하며 전시된다고 하니, 알다가도 모를 게 현대미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뒤샹이 뒤집어 놓았던 소변기보다는 한결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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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