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을 가든지 책이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는 게 오래된 습관 중 하나지만, 아프리카에선 습관보다도 정보라는 현실적 요구로 인해 걸음이 옮겨진다. 남아공의 대형 서점들에는 제법 많은 책들이 잘 분류되어 있으나, 책값이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출판 인프라의 부족 때문이겠지만, 책 한 권 값이 커피 두 잔 값인 우리나라에 비하면 남아공 책값의 상대적 물가는 대단히 비싸다. 남아공 같은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며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선 아예 책 구경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주로 찾는 곳이 거리에 있는 중고서점들이나 주말 벼룩시장이다. 대부분이 시간땜질용 책들이거나 인쇄가 조잡한 낡고 오래된 책들이지만 그곳에도 숨겨진 보물은 있게 마련이다. 다르에스살람(탄자니아의 수도)의 골목에서 중고미술 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노점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아프리카 원시미술(African Primitive Art)에 관련된 책들을 찾고 있습니다만…”
주인장의 얼굴에 갑자기 노기가 어린다.
“아프리카에 원시미술은 없소. 아프리카 전통미술(Traditional Art)이나 부족미술(Tribal Art)이라면 모를까.”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자빠진 컵이었다. 미국 모마(MoMA)에서 출판한 『“Primitivism" in 20th Century Art』를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 실수였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지역미술이 20세기 현대미술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고증을 통해 밝히고 있는 쾌저인데, 그 책에서조차 원시미술이란 용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시’라는 용어는 자신들이 ‘문명’의 정점에 있다고 믿고 있던 오만한 유럽인들이 그 상대적인 개념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학계에서조차 일반화되어 있는 이 용어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원시(原始)를 뒤집은 시원(始原)이 원시의 진정한 의미라고, 그렇게 보면 원시미술은 ‘Primitive Art’가 아니라 ‘Origin Art'가 된다.
‘기원의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전통미술을 대하는 첫인상의 대부분은 당혹감일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미술이라고 여겨왔던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들이 시선을 압도해오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미술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거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라면 당혹스럽다기보다는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비스러운 경험도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움과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전통미술은 한 민족이 오랜 시절 누려온 문화의 반영이므로 그 문화를 이해하기 전까지 ‘그 무엇’은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아프리카 미술은 겉으로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쓰임새와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물건들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보다 미술에 대한 복잡한 개념들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어떠한 고정관념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롭고 순수한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눈과 비워진 마음으로 아프리카 미술품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순수함의 진가를 알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다음의 질문들의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예술품들이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왜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만들었나?’
아프리카 문화와 역사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최초의 문화는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태동한 노크(Nok) 문화이다. 니제르 강과 베누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출토된 테라코타 토기와 소상(小像)들은 이 지역에서 싹텄던 최초 부족사회의 유물들이며 블랙아프리카 문화의 원형으로 시기는 BC 1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후 차드 호반(湖畔)의 샤오(Sao) 문화와 나이지리아 이페(Ife)와 베냉(Benin)의 청동주조는 이후 찬란하게 펼쳐질 아프리카 조형미술의 부흥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블랙아프리카 미술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페와 베냉의 청동조각은 아프리카의 일반적 조형양식과는 다르게 매우 사실적인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이러한 사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연주의 양식은 아프리카에선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아프리카의 전통미술의 대표적인 모델들은 중부와 서부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으며, 동부 아프리카의 미술은 중서부의 미술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두 지역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생활방식의 차이에서 온다. 중서부 아프리카가 일찌감치 농경을 시작한 반면 동부 아프리카는 전통적으로 유목에 의존해 생활을 해왔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나무 조각들이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데,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나무 조각과 같은 조형물들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목이라는 생활방식의 특성상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머물던 곳이 정들만하면 또 소떼를 몰고 어디론가 이동을 해야만 했다. 수렵을 하는 부족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동을 하는 부족들의 세간은 최대한 단출해야 한다. 그들에겐 굳이 조각상까지 만들어 짐을 늘일 이유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일부 동아프리카 인들이 농장을 만들어 정착하는 일도 있긴 했지만 끝내 그 땅을 지키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좀 더 나은 토양과 더 많은 곡식이 생산되는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아프리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어져 왔다. 그 재료를 얻을 수 있는 울창한 산림이 대부분 아프리카 서쪽과 중앙에 위치한다는 것,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인구가 불어나고 왕권이 강화되며 많은 왕국들이 출현했다는 것 또한 미술문화의 부흥과 관련이 있다. 동부 아프리카의 공간적 배경은 대부분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이며, 조각에 쓸 만한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흔치않다. 남부 아프리카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남부 아프리카는 거친 토양의 준 사막지대가 넓게 분포한다.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아름답고 정교한 많은 미술품들이 대부분 중서부 아프리카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사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동부 아프리카에서도 기원전부터 악숨(Aksum) 제국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인도양에서의 무역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빈번했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교 문화가 번성하고 있었다. 비록 중서부 아프리카처럼 풍부하지는 않지만 이 지역에서도 뛰어난 미술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의 십자가(Ethiopian Cross) 문양 세공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런가 하면 탄자니아의 마콘데(Makonde) 족의 목 조각은 후에 피카소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훌륭한 것들이었다.
한편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타 지역과 다르게 평면미술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칼라하리 사막 주변의 동굴과 넓은 암벽에 남겨온 그림들이 그것들이다. 그 그림들을 남겨온 부족들이 흔히 부시먼(Bushmen)이라 불리는 산(San)족이다. 연조로만 말한다면 이 부시먼들이야말로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래전부터 사하라 이남 곳곳의 바위에 작품을 남겨온 아티스트들이다. 그 그림들은 문자가 없었던 부시먼들에겐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편이었고, 가장 중대한 공공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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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