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냥 비트와 리듬에 몸을 내맡기는 일이다. 흥겹거나 애처롭거나 그냥 몸이 반응하는 것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감상법이다.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감각의 통로 같은 것이 있어서 그 반응은 현지인들이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 느낌을 솔직하게 따라가면 된다. 단, 음악을 귀로만 듣지 말고 몸으로 들을 것. 혹, 거리에서 신나는 음악이 들려온다면 엉덩이를 맘껏 흔들어도 좋다. 그곳에선 즉각적으로 음악에 반응하는 몸짓을 일체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당신이 추는 막춤도 과감할수록 족보 있는 춤 대접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아프리카에선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오기 마련이다. 신나는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휩쓸고 가는 행렬을 따라가 사진을 찍다 보니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 ‘우리에게 깨끗한 물과 전기와 일을 달라’고 적혀 있다. 아프리카에선 시위도 그런 식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그 행렬에 어울려 같이 춤을 추었다고 해서 뭐랄 사람은 없다. 리듬에 충실하면 그뿐이다. 내용은 알면 좋지만 몰라도 그만이다. 요즘 한국 아이돌 스타들의 노래나 아프리카의 음악이나 의미가 해독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짐바브웨 하라레의 보로우데일 쇼핑센터와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롱 스트리트에 가끔씩 들르곤 하는 레코드숍이 있다. 그 집을 찾는 이유는 비교적 많은 음반이 구비되어 있으며 음악을 미리 들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장의 친절한 설명까지 보태어지니 알아듣건 그렇지 않건 일단 신뢰할만하다 하겠다. 그 두 집에서 구입한 CD가 적지 않지만, 그 집에서 듣고 수첩에 옮겨 적었던 곡들의 수에 비하면 그리 많은 편도 아니다. 갑자기 시간이 비거나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아예 그 집을 약속 장소로 잡는다. 그러면 만나기로 한 사람이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해도 웃으며 악수를 할 수 있다.
‘맨발의 디바’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와 ‘아프리카의 하얀 카리스마’ 살리프 케이타(Salif Keita)가 함께 부른 <요모레Yomore>란 곡을 그 집에서 처음 들었다. 남의 나라의 업장에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한 손에 주인장이 타 준 냉커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고, 심지어 약속 장소로 이용하는 호사를 누렸던 건 볼펜이나 열쇠고리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쥐여주며 쌓아둔 친분 덕분이었다. 주인장은 유튜브를 통해 제공되는 뮤직비디오가지 연결해준다. 요모레. 무슨 말이냐고 묻자 주인장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흔든다. 황량해 보이는 해변에 선 채로 미동도 없이 노래를 부르는 살리프 케이타 앞에 장미 꽃다발 하나가 버려져 있다. 간혹 바람에 꽃잎이 날리기도 하는 영상이 말할 수 없이 애달픈 정조를 자아낸다. 그러나 그 영상보다도 더 애처롭고 애틋하게 와 닿는 것은 세자리아 에보라와 살리프 카이타의 목소리이다.
세자리아 에보라를 설명하자면 그의 고향인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를 먼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 대륙의 최서단인 세네갈 해안으로부터 600km 정도 떨어져 있는 대서양의 외딴 섬나라가 케이프 베르데이다. 아홉 개의 화산섬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15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거리상으로는 아프리카 대륙과 가깝지만, 이곳 최초의 주민들은 아프리카가 아닌 포르투갈 사람들이었다. 15세기 초 엔리케 왕자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던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 섬에 닻을 내렸다. 그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섬에 들어온 것은 이곳이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인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곳에 정주시켰으며, 이후로 이곳은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으나, 지독한 가뭄으로 ‘녹색의 곶’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섬은 점차 황폐해지고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노예무역의 급격한 쇠퇴와 더불어 쇠락을 길로 빠져들었다. 세자리아 에보라가 태어날 무렵 케이프 베르데는 이미 떠나지 못한 자들만 남아 떠나는 꿈을 꾸는 황량한 섬나라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의 그녀의 성장기는 에디트 피아프의 그것처럼 고난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가 죽고 열두 살에 결혼했으며 열일곱부터 카페를 전전하며 노래를 했다. 세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노래에 ‘만일 내가 젊은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결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가사를 담는다. 노래하지 않을 때 그녀의 손에는 항상 독주가 담긴 잔과 담배가 들려 있었다.
이 작고 황량한 섬나라가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모르나(morna)가 있기 때문이다. 모르나는 포르투갈의 파두(fado)와 서아프리카의 음악 등이 섞이고 어우러지면서 발전해 온 일종의 혼종 음악으로 애잔한 곡조와 노랫말이 특색을 이룬다. 고향을 등지고 온 이주민들과 그리움과 경유지에 남겨진 이들의 슬픔 같은 케이프 베르데 사람들의 운명적 정조가 깊게 스며 있는 선율은 듣는 이의 가슴을 사무치게 파고든다. 마흔다섯에 이르러 에보라는 ‘모르나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일약 월드뮤직의 정상에 등극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물이 흐르는 듯 애잔한 선율에 짙고 블루지한 목소리로 이별과 아픔의 노래들을 들려주고 있으며, 여전히 맨발이다.
살리프 케이타 또한 세자리아 에보라만큼이나 곡절 많은 삶을 산 사람이다. 무엇보다 출생부터가 참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그는 13세기에 말리 왕조를 세운 순자타 케이타(Sundiata Keita)의 직계 후손으로 태어났다. 왕가의 후손인 셈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알비니즘(albinism)이라 불리는 선천성 색소결핍증을 안고 태어났다. 피부는 핏기가 돌지 않는 흰색이었고 몸에 붙어 있는 털은 엷은 노란색을 띠었다. 대부분 알비노가 그렇듯 시력 또한 매우 좋지 않았다. 그것도 왕가의 후손으로.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에서 알비노로 태어난다는 것은 천형이다. 집안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불길한 징조로 여기며 악령이 깃든 저주받은 영혼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에 의한 죽임의 공포로부터 그의 모친은 그를 숨겨 키워야만 했다. 그런 그가 자라서 음악을 하겠다고 나서자 그의 가문은 그를 더 이상 보살피지 않았다. 그곳에서 음악은 최하층민이 하는 천한 짓거리였다. 가문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그는 빈털터리로 거리를 헤매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했다. 아직 10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나이였다. 그가 말리의 가장 큰 호텔의 전속 밴드였던 레일밴드의 보컬을 맡게 되었던 건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신의 유일한 선물이었던 목소리 덕분이었다.
레일밴드는 후에 나름의 명성도 얻고 앨범도 발표했지만, 대부분 서양에서 온 관광객들을 위해 연주를 하며 지내야 했다. 먹고 사는 게 삶의 목적일 수 없는 아티스트에게는 굴욕적인 일이다. 세자리아 에보라가 포르투갈을 거쳐 프랑스로 갔던 것처럼, 그는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갔다. 때마침 프랑스를 풍미하던 아프리카 문화와 월드뮤직의 바람을 타고 마침내 그는 ‘아프리카 황금의 목소리(Golden Voice of Africa)'라 불리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마흔다섯에 살리프 케이타는 마흔이 이르러 맛본 영광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사막을 건너 도달한 오아시스였던 셈이다. 그는 현재 알비노의 권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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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