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주마간산의 세월이여! (장미취안(張謐詮, Zhang Mi-Quan) 초대전)
중국미술이 터진 봇물처럼 밀려오고 있다. 오랜 세월 죽의 장막에 가려져 그 실체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던 것을 감안하면, 세계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등극하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봇물 정도가 아니라 가히 쓰나미라고 할 만하다. 그 쓰나미의 파고가 한국을 피해갈 리 없다. 빅 쓰리니 사대천왕이니 10대 작가니 하는 수사를 달고 연일 작품들이 날아온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중국현대미술은 베일을 벗고 다가오는 대륙적 미의식에 대한 기대이면서 물량공세와 동어반복, 왠지 모를 강요의 느낌에서 오는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중국현대미술하면 떠오르는 두 개의 표정이 있다. 장샤오강(Zhang Xiaogang)의 창백한 우울과 유에민준(Yue Minjun)의 체념과 냉소를 담고 있는 파안대소가 그것이다. 낡고 얼룩진 사진첩 속 인물들의 온기 없이 굳어버린 표정과 공허한 눈빛, 번잡한 세상의 모든 잡사들을 조롱하는 듯 포복절도하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표정, 극히 상반된 두 개의 표정은 급격한 변화와 초고속 경제성장, 일방통행의 정치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중국사회를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아트뱅크에서 초대한 장미취안의 작품 또한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나, 무엇보다 캐릭터화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이 놓인다.
전시작품들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최근작인 일행천리(日行千里) 시리즈. 작품들은 푸르스름하게 내려앉고 있는 저녁나절의 안개와 습기를 머금고 있는 듯 무겁고 축축한 공기, 이미 젖어 있는 듯한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자동차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사물들의 경계를 두텁고 거친 붓질로 처리해 묘한 심리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텅 빈 도로에서의 질주가 주는 속도감은 애잔한 서정적 공간에 묻혀 버려 애초부터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속도 자체가 비애이다.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저 비애의 속도는 중국의 경제적 드라이브의 그늘이며, 도시화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은유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어느 사회에서건 의식을 추월하는 속도는 반성적 사고를 간과하기 마련이다.
연보상 작가의 나이는 지천명을 갓 넘어섰다. 일행천리 시리즈의 시간적 배경처럼 인생이 저녁나절에 도달한 것이다. 하늘의 뜻을 헤아린다는 나이에 이르러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조응하며 고독과 회환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슬프다, 주마간산으로 흘러간 젊은 날들, 오직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날들이여!
꽃밭에서 존재 찾기 (김근중展 『Natural Being_原本自然圖』)
화가들은 왜 꽃에 연연하는 것일까? 정상적인 시력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 꽃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것을 제아무리 잘 옮겨놓은들 화폭에서 향기가 날 리 없는 데도 말이다. 기술이 좋아져서 조화(造花)가 생화보다도 더 진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 봐야 잘 만든 플라스틱 꽃일 뿐, 감동과 향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왜? 요컨대 꽃을 그린다는 것은, 꽃을 통해 뭔가를 표현하거나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잘해봐야 본전도 못 뽑을 일이라는 것이다.
김근중이 꽃 그림을 처음 선보였을 때 몹시 당혹스러웠던 게 비단 나만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근래 들어 모란에 빠져 있다. 한때 화투판에서 ‘김지미’로 통하기도 했거니와, 지금도 여전히 미스코리아처럼 청색 띠를 두른 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육목단 말이다. 곱다하는 꽃 중에서도 중전마마급 대접을 받으면서, 일찍이 부귀(富貴)를 가져다주는 꽃으로 알려져 우리 민화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던 꽃이다.
작가는 물론 모란을 통해 부와 고귀함,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냥 꽃일 뿐이며 그것도 꽃이라 불려서 꽃일 뿐인 식물의 일종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거니와, 꽃이란 게 피는 것도 지는 것도 잠깐이다. 그렇다면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꽃의 본질은 아름다움인가 허무인가? 모란은 열흘 피었던 꽃의 이름인가 꽃잎 떨군 채 삼백오십 일 묵묵히 버티고 있는 나무의 이름인가? 그에게 꽃의 존재는 이렇게 모호하다.
나타나는 듯 사라져간 하나의 잔상, 있다고도 없다고도 못할 어떤 흔적, 실재하진 않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그 무엇, 도대체 그 무엇은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는 모란 화원에 턱 괴고 앉아 이런 심오한 존재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꽃은 좀 진부하지 않느냐?’는 있을 법한 질문에 대해, 작가는 먼저 이렇게 일갈한다. “원래 진부한 소재가 있고 진부하지 않은 소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부하고 진부하지 않은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민화풍 화조도에 생뚱맞게 영문과 말풍선을 끼워 넣는가 하면 요정 같은 인형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물감(異物感)이 없고 묘하게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냥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아쉽게 느껴지는 독특함이 화면 가득 묻어난다. 진부하고 진부하지 않은 건 소재의 차이가 아니라 생각의 차이란 걸 그는 작품을 통해 여실히 증명해내고 있는 것이다.
해학의 힘으로 피어난 매화의 기개 (성태훈 개인展 『매화는 추위에 향을 팔지 않는다』)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레이몽 샤비냑(Raymond Savignac)은 두 개의 이질적인 이미지를 결합해 사람들의 눈을 끄는 새로운 시각표현법을 창안해내고 스스로 비주얼 스캔들(Visual Scandal)이라 명했다. 샤비냑은 주로 자신이 제작하는 포스터에 이 기법을 응용했지만, 오늘날 이 기발하고 감각적인 표현법은 광고 분야에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신부와 수녀의 키스, 탯줄을 자르지 않은 아기 등의 도발적인 이미지로 유명한 이태리 패션 브랜드 베네통의 광고가 바로 비주얼 스캔들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법을 우리의 전통적인 미의식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물려주는 토끼, 서로 이질적인 동물들의 이미지를 중첩해 재구성한 용과 해태의 그림 등 우리 민화 속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런 이미지들이 비주얼 스캔들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조상들은 거기에 해학(諧謔)이라는 고상한 이름까지 붙여놓았다. 해학, 이질적인 것들이 어우러져 조화롭게 하는 우스갯소리(농담)라는 뜻이다.
성태훈의 「매화는 추위에 향을 팔지 않는다」 연작은 바로 그런 해학이 빛나는 그림이다. 부조리를 우의적으로 표현하되 조롱과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풍자보다는 해학에 가깝다. 해학은 농담일지라도 그 안에 상처를 보듬어주는 따뜻한 인간애와 화해의 숭고한 정신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먼저 무의식중에 헬기 소리를 듣게 해주는, 기가 막힌 음향효과를 거두고 있다. 자연스럽게 긴장을 유도하면서 작품에 집중하게 만드는 마법의 장치이다. 매화와 헬기라는 대립적인 이미지는 평화와 전쟁, 자연과 물질, 동양과 서양, 서정과 서사 등으로 길항(拮抗)의 관계를 확산시키고 있다. 작품의 저변에는 위협받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불안심리가 깔려 있으나, 그렇다고 전쟁의 공포, 폭력성에 대한 고발 같은 획일적 관점과 틀에 박힌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림을 조금만 더 바라보자. 매화 주변을 비행하고 있는 날(?)것들이 초음속 전폭기가 아니라 프로펠러로 움직이는 헬기라고 하는 것과 방향성 없이 부유하고 있다는 것, 헬기가 턱없이 작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헬기는 꽃 주변을 맴도는 곤충의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화의 고고한 기개와 자태가 더욱 돋보인다. 이게 바로 해학의 힘이다. 제목 그대로 매화는 추위에 향을 팔지 않을 것이며, 도저한 위협들 속에서도 우리의 인간성은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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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