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거나해진 친구가 비틀거리는 말투로 쓴소리를 한다.
“아프리카에 갇혀버린 한심한 놈. 아프리카 안경 쓰고 보니 세계가 보이던?”
대거리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냥 피식 웃고 만다. 뭐, 서울 한복판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을까. 어디건 한 곳에 빠져 있으면 그곳이 세계의 창이기도 하고 의식의 감옥이기도 한 거지. 그냥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편견에 대한 옹호가 또 다른 편견을 낳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아프리카 이외의 것들을 잊고 지냈다.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한 계절 동안 짬이 나는 대로 그림들을 보러 다녔다. 그 느낌들이 이렇게 적혀 있다.
비움으로써 채운다 (전준엽 개인전 『빛의 정원에서』)
비가 갠 뒤에 부는 청량한 바람과 맑은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가리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 한다.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가치들을 경제 논리로 몰아가고,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경쟁을 강요받는 요즘처럼 사회가 되바라질수록 쓰임새가 떨어지는 말이며, 그래서 더 귀에 박히는 말이기도 하다.
불과 반세기 안에 농본주의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진입해 오면서 지구상의 유례없는 속도와 적응력을 발휘해 온 우리 사회는 짧은 시간 안에 참 많은 것을 얻었고 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 상실의 목록에 광풍과 제월에 비유되는 맑고 고요한 정신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에 대한 그리움 또한 상실감만큼 깊다.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이 있는 곳이 전남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이다. 조선 중기 조광조 문하의 양산보가 스승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자 낙향하여 은둔, 처사(處士)의 길을 걸었던 곳으로,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맑고 깨끗한 기운이 서린 정원이다.
전준엽의 ‘빛의 정원에서’ 시리즈를 보고 있노라면 소쇄원 대숲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살짝 머릿결을 흔들고 간다. 그 맑고 깨끗함이 제 속을 훤히 비춰주는 내설악 8부 능선의 개울물 같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자연물들은 곡선이 완만하며 노송과 오두막, 그 안에 불 밝히고 앉아 있는 이가 모두 관직을 등지고 고향에 은둔하는 처사의 마음처럼 정갈하고 소박하다.
휘영청 달이 떠올랐으나 나그네의 발길에는 분주함이 없다. 혼자 걷는 밤길이 고독할 법도 하나 반겨주는 강아지 한 마리로도 그 마음이 차고 남는다. 소나무 한 그루와 오두막 한 채, 나그네와 강아지, 강물과 대숲, 달, 새, 연꽃 등 제한적인 소재들을 최소한으로 배치해 구도는 매우 단순하나 화면은 결코 헐겁지가 않다.
강은 물을, 나무는 숲을, 오두막은 삶의 거처를, 강아지는 짐승을… 이런 식으로 각각의 구성물들은 대표성을 확보하면서 소우주와 같은 조화로운 질서의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 은유적 세계를 직조하는 일은 작가의 마음이 가닿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빛의 정원에서’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문학적 감각과 은유를 다루는 솜씨, 절제된 표현으로 충만한 화면을 구성해내는, 즉 비움으로써 채우는 작가의 시심(詩心)이 빛을 발한다.
사랑의 뒤통수를 이야기하는 우울한 팝아트 (강영민 개인전 『사랑하면 진다』)
줌 렌즈를 밀고 당기다 보면 사물이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이 지점에서 렌즈를 더 밀거나 당기면 사물의 형체는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가장 긴장감 넘치는 지점에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또한 슬픔이라고 하는 감정 상태와 일정한 거리에서 다루어야 하는데, 슬픔이라고 하는 대상에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을 경우 대부분 신파로 전락한다. 부족한 거리 조정(under-distancing) 탓이다. 반대로 초과한 거리 조정(over-distancing)의 경우 수박 겉핥기식의 피상적 표현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영민의 『사랑하면 진다』 전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의인화된 하트’를 사용하여 시종 사랑의 행위에서 빚어지는 아픔을 우울한 블루 톤으로 담아내고 있다. 화폭에 담긴 사랑의 아픔은 특별한 예술적 장치를 거치지 않은 그야말로 날것의 감정이다. 상실감에 흐느껴 울다가 엉망으로 취하고, 그러다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는 누구나 한 번쯤 일기에 담아놓았을 법한 사랑과 실연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다.
하트라고 하는 기호는 그것이 비록 지속성과 양방향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진실하며 충만한 사랑의 감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하트 군은 그 사랑으로 인해 외롭고 우울하며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사랑이란 감정의 형태가 그런 것처럼 그것으로 인해 오는 아픔 또한 매우 거칠고 격정적이다.
숨길 수도 드러낼 수도 없는 이 난감한 감정을 작가는 여과 없이 그대로 화폭에 옮긴다. 말 그대로라면 또 하나의 신파가 탄생하는 순간이지만, 작가는 특유의 유머러스한 스타일로 이를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 마디로 눙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깔끔하게 디자인화된 캐릭터를 사용해 밝고 가벼운 인상을 주는 일반적인 팝아트와 달리 거칠고 기교 없는 투박한 붓질로 동시대인의 보편적 삶과 사랑의 내면을 담아내는 것은 작가의 존재감을 한층 강화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다루고 있는 불안과 고독으로 가득한 사랑의 감정은 ‘사랑의 뒤통수는 고통’이라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사랑의 이면에 대한 통찰이 돋보인다.
공간과 기억의 재구성, 그 낯선 풍경 (이지현 개인전 『Reflective surface』)
매일 반복되는 일상처럼 무의미한 게 또 있을까. 늘 같은 풍경들을 지나 늘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어제 못다 한 일들을 처리하고 그 일과 다를 바 없는 일을 새롭게 시작한다. 지겨워, 지겨워하면서 고작 점심 메뉴 하나 바꾼 게 어제와 다른 점이지만, 그것 또한 매번 반복되는 일에 불과하다. 이 지겨운 일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얘기한다. 살짝 미치면 된다고.
친숙한 사물들은 바람이나 물처럼 기억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죽은 사물들이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아무런 감흥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저 죽은 사물들에게 생명을 일깨울 수는 없을까. 종교는 인류를 구원할지언정 그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는 법을 알지 못했고, 과학은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도 그 고민은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그 고민은 예술에 의해서 해결되는데, 그 방법이 바로 ‘낯설게 하기’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유형별로 분석해보면 낯설게 하기의 일곱 가지 원리가 발견되는데, 이지현의 작품은 낯설게 하기의 여러 원리들을 하나의 화폭에서 동시에 작동시키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미지의 중첩,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 제주도의 풍광이 어우러지는가 하면 콜로세움은 자신의 드레싱 테이블과 중첩된다.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크기의 변화, 귀걸이 하나가 샹들리에보다 크게 묘사되고 있다.
그밖에 사물의 환경과 성질을 비틀거나 불가해한 공간 속에 서로 다른 사물을 결합시키는 등 자유롭게 화면을 재구성하면서 그야말로 철저하게 낯설게 만들고 있다. 서로 다른 풍경과 사물이 찍힌 거울들을 깨뜨려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재결합하면 저런 화면이 나올까 싶기도 하고, 한 화면에 두세 장의 사진을 동시에 비추고 지워나간 이미지 같기도 하다.
작품들은 관람객을 압도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자신감 넘치는 색감과 일말의 주저함 없이 지나간 붓질이 엿보이는 탓이기도 하지만, 다이내믹한 구성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리드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미 관람하는 사람의 심리적 반응을 읽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작품에서 보이는 이미지의 중첩이 우연의 산물이거나 단순한 시각적 환기를 넘어서는 것도 중첩된 이미지들 사이의 시간과 공간, 거기에 슬며시 끼워 넣은 작가의 사적인 영역들을 타고난 편집력으로 연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