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 어둠이 내리고 언덕 위로 바람이 불어올 때, 황갈색 갈기를 휘날리며 지그시 미간을 찌푸리던 수사자 한 마리가 있었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 하나로도 주변을 쥐죽은 듯 얼어붙게 만들던 사자 무리의 리더였다. 편의상 ‘심바(사자를 일컫는 스와힐리어)’라고 하자. 무리를 이끌고 초원을 어슬렁거리던 심바의 눈에 멀리 한가롭게 떨기나무 이파리를 뜯어 먹고 있는 겜스복 영양 한 마리가 포착된다. 힐긋 심바의 표정을 살피던 암사자가 납작 몸을 엎드려 서서히 영양에게로 접근해 들어가다 일순간 몸을 곧추세우며 쏜살같이 달려든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달아나던 영양은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암사자에게 제압당하고 만다. 단단한 야자열매를 박살 낼 것처럼 강력한 암사자의 턱과 발 앞에 영양은 연약하기만 한 초식동물에 불과했다. 쓰러져 숨만 할딱거리고 있는 영양의 눈에 공포가 가득하다. 뒤늦게 다가온 심바는 단숨에 영양의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어놓는다. 순간 목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심바는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서 초원을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제왕이었으며 일말의 자비심도 없는 포식자였다. 이상한 일은 그런 심바가 갑자기 사냥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면서 무리의 주변을 겉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암사자가 물어오는 먹이에도 흥미를 잃고 시름시름 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구도자처럼 홀로 초원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연못 근처에서 하이에나 무리와 마주치자 심바는 흠칫 놀란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하이에나들이 비스듬히 뒤로 물러난다. 한동안 곡기를 거른 심바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에 위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걸음걸이를 하고 있다. 흡사 행려병자나 패잔병의 행색이다. 연못에 코를 박고 목을 축인 심바는 초원의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심바가 헤매고 있는 초원에 다시 며칠이 지난다.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 보름 정도가 지나자 심바의 몰골은 이미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위었다. 이제 초원의 동물들은 더 이상 심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를 두려워하는 건 심바 쪽이다. 걸음조차 힘에 겨워 망연히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며, 덤불 속에서 작은 사슴류의 초식동물들이 나타나도 꼬리를 감아올린 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고 만 것이다. 도대체 심바는 왜 곡기를 놓은 것일까. 기력을 다한 심바는 휘청휘청 물웅덩이로 가 혀로 물을 할짝거리다 급기야 통나무처럼 힘없이 쓰러지고야 만다. 심바를 계속 추적하면서 주시해오던 사람들 몇이 심바에게 달려가 몸 여기저기를 살피다 어금니 사이에 박힌 뼛조각 하날 빼낸다. 심바에게 죽어간 겜스복 영양의 것이었다. 간단한 응급처치를 받은 심바는 마취된 채 트럭에 실려 급히 후송된다.
오래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흐릿한 기억에 살을 붙여 가공해본 한 사자의 이야기이다. 국립공원 관리인들이 심바의 이상행동을 주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이 지배하던 초원의 구석에서 죽어 자칼이나 하이에나의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제왕의 아사라니, 어이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죽음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안고 있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이다. 동물들에게 밟혀 죽든 끈끈이주걱에 잡혀먹히든 미물들에게 어이없는 죽음이란 없다. 자연의 법칙은 교묘하고 복잡해서 늘 의외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자연발화에 의해 한 지역이 초토화되는 것처럼 자연은 자신의 내부에 파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의 위대한 힘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지구 자체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간주하는 가이아(Gaia) 이론이 생명의 본질을 스스로 조절할 줄 아는 능력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질서에는 파괴와 회복의 과정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고도로 진보된 자연의 자기조절 센서를 가지고 위험한 놀이를 하고 있는 유일한 천덕꾸러기가 인간이지만, 칼라하리는 처음부터 인간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흔치않은 경우다. 칼라하리처럼 순수한 자연의 세계 속에서 모든 동물들은 사냥을 하거나 사냥을 당한다. 그게 존재의 방식이다. 수렵이라는 인간의 언어로 고쳐 부를 뿐, 이 지역의 원주민인 부시먼에게도 사냥은 삶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이 세계 속에서 부시먼은 재빠르지도 않거니와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중간 크기의 영장류일 뿐이다. 다만, 이 족속들은 매우 영리해서 불을 다루며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냥에 다른 짐승이나 곤충의 독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 영악함으로 부시먼은 사냥이 숙명적일 수밖에 없는 이 야생의 세계에서 사자를 비롯한 고양잇과의 포식자들과 더불어 먹이사슬의 정점을 차지했다. 주로 사냥을 하는 쪽이지만, 지독히도 운이 없거나 사냥의 능력이 떨어지면 어이없이 사냥을 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심바가 무리를 떠나오기 이전의 행적을 더듬어보자. 처음 심바가 태어나 속해있던 무리는 나중에 그가 이탈했던 무리와는 다르다. 심바 또한 보통의 사자들처럼 큰 사자들의 보호를 받고 자라다 세 살 무렵 무리를 떠나 사바나의 평원에서 거친 야생의 논리를 체득해왔을 것이다. 가장 힘이 왕성해지는 대여섯 살 무렵에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무리를 골라 그곳의 수사자에게 덤벼들었을 테고, 한두 번의 실패 끝에 자신이 떠나왔던 무리의 새로운 리더가 되어 군림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리의 새끼 사자들을 보호하면서 암사자들이 물어오는 먹이를 막강한 권력으로 가로채오다, 어느 날 초원에서 홀로 떨기나무 이파리를 뜯고 있는 겜스복 영양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가 기력을 회복해 다시 초원으로 돌아온다면, 인간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수치스런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칼라하리에서는 사냥감을 쫓을 때를 제외하고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다니는 동물은 사자와 인간뿐이다. 말하자면 사자와 인간은 초원의 패권을 다투던 숙명의 라이벌인 셈이다. 그 불편한 관계는 초원의 밤과 낮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자의 입장에선 그 경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노라고 여길 것이다. 초원의 낮은 주로 곤충과 벌레들만이 활동하는 빈곤한 공간인 반면, 자신들이 차지한 밤은 큰 먹잇감들이 우글거리는 풍요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거침없이 포효하는 유일한 생물체가 자신들이며, 그 소리가 천둥소리 다음으로 크다는 것도 자신들의 우위를 반증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사냥에 나서는 시간에도 사자들은 그늘 속에서 몸을 완전히 드러낸 채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지만, 인간의 마을에선 해가 떨어지면 다음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아이들도 울지 않는다.
모든 고양잇과 동물들이 그렇듯 사자 또한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이 거처를 이동하거나 임시 사냥 캠프를 마련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반드시 한 번은 사자가 다녀간다.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죄다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것이 제왕으로서의 책무라고 여기는 듯하다. 사자가 캠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큰 소리로 포효하고 자리를 떠났다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오직 사자만이 안다. 인간들이 알아서 그 의미를 해독해야 한다니, 초원의 제왕이 사자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초원으로 돌아온 심바는 자신이 속해있던 무리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새로운 리더가 그 무리를 이끌고 있으며,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수사자들은 거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몸에는 아직 인간들의 냄새가 배어 있다. 물론 새로운 무리의 리더에게 도전을 하기에는 턱없이 힘이 빠져 있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사냥은 주로 암사자들의 몫이었으므로 사냥에 뛰어난 것도 아니다. 난감한 심바는 제왕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무리의 뒷전에서 리더를 보좌하면서 먹다 남은 고기를 뒤늦게 차지해 연명한다. 초원에 다시 바람이 불고 심바는 지긋이 미간을 찡그린다. 한결 숱이 적어진 갈기 몇몇 올이 심바의 몸을 버리고 바람에 날린다. 칼라하리의 초원에 계절이 바뀌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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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