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년 전부터 사하라 사막 이남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지켜온 최초의 원주민 부시먼. 철기 문명으로 무장하고 서아프리카로부터 대거 남하해 온 반투족들에게 땅을 내주고 칼라하리 사막 척박한 토양 위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수렵 채집 문화를 이어왔던 부시매노이드(Bushmanoid)는 이제 아프리카에서도 잊혀가는 부족, 지구 상에서 가장 위기에 몰린 부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나미비아, 보츠와나, 남아공, 짐바브웨, 잠비아, 앙골라 등의 나라에 흩어져 총 5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인구가 고단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이 위기의 인종을 국제 사회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래 봐야 국가 간의 갈등만 초래할 뿐 어떤 실익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시먼들은 대부분 백인들의 농장이나 가축을 소유한 흑인에게 고용되어 담뱃값 정도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거나 관광객들에게 조악한 기념품들을 팔고 같이 사진을 찍어주고 받는 동전으로 연명하고 있다. 그도 아니면 마약에 젖은 채 죽음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거나,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충혈된 눈으로 구걸을 일삼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미래는 이미 절망과 동의어이다.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들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회복될 수 없는 잔혹한 파괴가 그들 사회에 진행되어 왔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절망으로 내몬 것일까. 부시먼의 마지막 영토 칼라하리를 무단 점거한 이민족들과 식민지 개척자들은 삶의 근간을 이루는 수렵채집 문화의 토대를 파괴했다. 그들에게 부시먼은 길들지 않는, 다소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을 뿐, 전통적으로 강력한 정치 구심점을 구축하지 못했던 부시먼들은 이 가혹한 파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부시먼에게 문화의 파괴는 곧 모든 것의 파괴를 의미한다. 더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위에서 그들 가운데 일부가 마침내 정치적 행동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스스로 존재의 당위성을 회복하고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위해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 투쟁의 시작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부시먼들은 태곳적부터 아프리카의 바위의 너른 벽면과 동굴에 수많은 암각화를 남겨온 최초의 아티스트들이다. 거기에 자신들의 삶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을 남겨왔으며, 이제 그 이야기들을 복원해 잊혀가고 있는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겠냐고 묻고 싶은 이를 위해 다시 말하면, 부시먼에게 문화의 복원은 곧 모든 것의 복원이다.
남아공 노던케이프의 주도 킴벌리 시 인근의 슈미츠드리프트(Schmidtsdrift)에 부시먼 아트 커뮤니티 ‘쿠루 아트 프로젝트(Kuru art project)'가 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앙골라와 나미비아 출신들로 나미비아 독립 전쟁 이후에 이곳에 눌러앉게 된 사람들이다. 대부분 부시먼 집단이 그렇듯 이들과 남아프리카 흑인들 사이엔 뿌리 깊은 갈등이 있었다. 앙골라를 지배하고 있던 포르투갈 인들은 자신들과 흑인들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 번지자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자는 명분으로 부시먼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1975년 포르투갈이 앙골라에서 철수하자 이번엔 남아공이 나미비아의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이들을 끌어들였고, 나미비아도 마저 독립을 쟁취하게 되자 이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슈미츠드리프트의 부시먼 아트 커뮤니티를 찾아가는 길은 참 멀고도 아득했다. 남아공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케이프타운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뻗어 있는 고속도로 N1은 국토를 대각선으로 연결하며 심장 같은 도시들을 가로지른다. 지도 상에 나타난 N1은 자를 대고 그어놓은 듯 곧은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중간을 조금 넘어 킴벌리라는 도시 인근의 플래트폰테인(Platfontein) 농장이 내가 찾아가는 곳이었다. 그 농장에 커뮤니티가 있었다.
출고된 지 십수 년이 지난 고물 자동차는 그 먼 길을 용케도 잘 달렸으나, 킴벌리 시를 20km쯤 앞두고 끝내 엔진에서 시커먼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거의 쉬지 않고 1,000km를 넘게 달려왔으니 갱년기의 엔진이 버티기엔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연기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고 차를 적당한 곳으로 옮기려 해도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그냥 예기치 않았던 사고라고 말하기엔 사태가 심각했다. 보닛을 올리고 이따금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가망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질주하고 있는 차를 멈추진 않았다. 트랙터를 타고 가던 농부가 다가왔으나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버렸다. 그늘 한 점 없는 하이웨이에서 쩔쩔매고 있기를 두 시간, 킴벌리의 한 자동차 공장에 연결이 되어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밧줄이 묶인 차에 실려 킴벌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엔진 수리 불가능 판정을 받은 차는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며칠 동안 경황없이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오는 길,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오른편 창밖으로 먹구름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버스가 불빛 한 점 없는 평원으로 들어서자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낙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순간 강렬한 섬광이 칠흑 같은 하늘을 찢어놓았고 우레가 평원을 뒤흔들었다. 평원은 낙뢰가 어떻게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지상에 꽂히는지를 통째로 보여주었다. 가끔 서너 개의 낙뢰가 한꺼번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 놀랍고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시종 부시먼에 대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 부족 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겸손한 삶은 우리의 모든 것을 대변하며, 우리는 자연에게서 그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그것을 삶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단순성으로 정치적 격변과 가혹한 폭력들, 현대라는 이름의 격랑을 견뎌왔습니다. 우리가 지구 상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우리는 여전히 자연의 사람들로 남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자고 문명을 거부했던 것일까. 무얼 얻기 위해 지금까지 석기시대의 마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진화를 거부해버린,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한 뇌구조를 가진 그들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습과 문화를 곁눈질하면서, 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들의 삶과 관련해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관심 두기 이전의 나를 포함하여 스스로 보고, 알고, 믿는 것들에 대해 심각한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쉽게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겠는가.
버스는 서너 시간 동안 괘 먼 거리를 질주해왔지만, 강렬한 섬광과 폭음의 전쟁터를 빠져나가진 못했다. 여전히 낙뢰와 우레는 대평원을 흔들어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섬광과 굉음은 비단 창밖의 일만은 아니었다. 부시먼에 대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내 두개골과 가슴에는 수도 없이 우레가 울고 낙뢰들이 와서 꽂히며, 섬광과 굉음과 포연이 난무하는 난폭한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해와 거대한 빌딩 숲들로 인해 우리는 먼 곳을 바라볼 수 없으며,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으로 인해 주변의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도시적 삶은 반성적 사고를 차단하고 문명에 대한 오해와 오만은 우리를 오직 앞만 보며 질주하는 맹목의 삶으로 몰아간다. 그게 바로 원시고 야만인 줄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날 평원의 낙뢰처럼 내 가슴에 와 박히던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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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