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이 없다거나 사회성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대체로 나는 다른 사람의 일들에 대해 덜 궁금해하는 편이다, 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주변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면서 사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난 평균 이하인 것만 같다. 스스로 어림해본 나의 성향이나 주변에서 던지는 말들을 종합해보면 좀 더 확실해진다. 어렴풋하게나마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유년시절부터 난 누구에게든 자발적으로 질문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유가 있다면 그건 단지 ‘말수’가 적어서 일뿐이다. 질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답변하는 솜씨도 시원찮은 법이다. 말하자면 질문을 하는 것도 질문을 받는 것도 다 곤혹스런 일인데, 언제부턴가 내게 많은 질문들이 던져졌다. 첫 전시(<아프리카 쇼나 현대조각展>, 성곡미술관, 2001)를 열면서부터이다. 당시로써는 아프리카미술이란 게 낯설고 생소해서 그랬겠지만 질문의 내용들은 대게 비슷했으며,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했다.
내게 던져졌던 공식적인 질문들
Q1 어떻게 처음 아프리카미술을 접하게 되었죠?
Q2 지금 우리에게 아프리카미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죠?
Q3 지금까지의 성과는?
Q4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등등
공식적인 질문들에 대한 상투적인 답변
미국에서 투병 중인 자칭 생활철학자 한 분의 원고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원고의 한 꼭지가 짐바브웨 쇼나조각에 관한 짧은 글이었다. 원고만으로는 그게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어떤 의미가 담긴 물건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관심 또한 없었다. 후에 작가는 작고했고 원고는 모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다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찮게 지인을 통해 쇼나 조각의 사진을 얻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아, 그게 이런 거였구나’ 하고 어렴풋이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쇼나 조각의 이미지들 중 어떤 것들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이렇게 나는 처음 아프리카의 현대 조형미술을 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우연하고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렸다면 기억조차 남지 않았을 일이며, 또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답변하기에도 신통찮은 일을 사람들은 한사코 ‘어떻게 처음’에 의미를 실어 물어본다. 한 사람의 애정관계에서 볼 때, 어떻게 상대를 만났는가보다 왜 상대에게 몰입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하다면, 질문은 ‘왜 아프리카 미술에 빠져들게 되었는가?’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쇼나조각이 미켈란젤로와 로댕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현대의 조형미술이 놓치고 있거나 채워주지 못하는 감동의 코드를 담고 있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조형 언어가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에는 전혀 알려져 있는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화단의 몇몇 지인들에게 쇼나조각 이미지를 보여주었을 때, 그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신선하고 독특한 조형 감각과 나름의 완성도에 높은 점수를 주었지만 그것이 아프리카 조각가들의 작품이란 걸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때부터 내 안에 뭔지 모를 어떤 오기와 강한 문화적 호기심 같은 게 발동하기 시작했다. 일단 자료들부터 들추어보아야 했다. 디지털 검색 시스템이 마련되기 이전이어서 서점과 도서관을 발로 뛰며 뒤지고 다녔으나 제대로 된 관련 문건은 단 한 건도 입수할 수 없었다. 주류의 문화에 대해 매사에 딴죽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미 7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유럽과 북미의 주요 미술관들을 순회하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예술운동에 대해 어떻게 대학과 화단을 통틀어 단 한 건의 자료도 구할 수 없는가. 아프리카미술 전반에 관한 논문과 평문도 빈곤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넘쳐나는 것들은 서구의 아카데미즘이나 첨단을 달리고 있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대한 번역 투의 글들이었다. 결국 인터넷에 의지해 자료들을 접하기 시작했고 그 배경과 의미, 제작상의 특징들에 조금씩 눈을 떠가기 시작했으며, 좀 더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만큼 점차 쇼나조각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매혹도 전공자도 아닌 내가 굳이 직장을 그만두고 이역으로 날아가 가능성 희박한 일에 매달릴 일도 아니었다. 누군가 그 일을 시작했었다면 말이다.
아프리카미술에 빠져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본래 충동에 좀 약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 싶지만, 어쨌든 그래서 친 사고들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 머릿속에 천둥과 벼락의 울림으로 들려오던 음악이 있었다. 레드제플린의 드러머 존 보냄(John Henry Bonzo Bonham)의 드럼 솔로 연주곡 <Bonzo's Montreux>. 레드제플린의 마지막 앨범 코다(CODA)에 일곱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곡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그해 마지막 즈음에 존 보냄은 죽고 레드제플린은 활동을 접었지만, 그가 남긴 드럼 연주곡은 내 두개골을 두드려댔고 결국 등록금에 손을 대는 사태를 빚고야 말았다. 베이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는 중고 드럼을 사는 데 등록금 일부를 유용했으니 말 그대로 대형사고였다. 한 달을 꼬박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등록금의 공백을 채워놓으면서 모든 게 완전범죄로 끝났지만, 그 기간 동안 시달려야 했던 죄의식과 불안감은 피를 말리는 것이었다.
대학에 복학하면서 운 좋게 방송작가 일을 겸할 수 있었는데 제법 돈벌이가 쏠쏠했다. 학비를 맞추고도 가끔 술을 마실만한 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최민식 사진집 『이 사람을 보라』는 다시 한 번 나를 충동질했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서 한 시간가량 이 사진집을 뒤적이다 종로3가 카메라 골목으로 달려가 니콘 F3를 집어 들고 모아놓은 학비를 내밀고야 말았다. 그 학비를 맞추느라 학기 내내 아르바이트 하날 더 끼고 살아야 했지만, 주말이면 카메라들 들고 시외버스를 갈아타 가며 서해안 포구들과 시장 같은 곳을 쏘다니는 재미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고들은 서른 중반의 나이에 아프리카를 택했던 것에 비하면 크지 않은 돈으로 해결되는 경미한(?) 수준의 것들이다. 일단 직장을 버리고 이제까지 악전고투해가며 쌓아온 모든 기득권과 노하우를 포기해야 하는 아프리카행이야말로 나머지 인생이 엉망으로 꼬일 수도 있는 초대형사고이다. 침착하자, 조금만 더 침착해지자 하면서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고 퇴직금을 몽땅 들고 아프리카로 가고 말았다. 이게 사고가 될지 사건이 될지는 오직 하늘만이 아는 일이니 신념만은 잃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내게 던져졌던 비공식적인 질문들
Q1 갤러리를 한다니 돈이 많은가 봐요?
Q2 아프리카가 살 만하다던데 어때?
Q3 아프리카 여자들 예뻐? 등등
비공식적인 질문들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아니다. 쇼나조각, 부시먼 페인팅, 웨야 아트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현대미술의 기획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그 근거지를 만든 것뿐인데, 일부 사람들에겐 그렇게 비쳤던 것 같다. 잘 모르기도 하고 별 관심도 없지만, 대부분 화랑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런 모양이다. 서울은 엄두조차 낼 수 없어 일산 변두리에 조그만 공간을 빌려 작품을 전시하는데 나로서는 벅찬 액수의 돈이 들긴 했다. 그걸 포함해서 그동안 수집해온 작품들과 사글세 보증금, 자동차와 잔고가 늘 마이너스인 통장 등이 당시 내 재산 목록의 전부였다. 서른 중반이란 나이에 오직 나 혼자 벌인 일이니 올인하지 않으면 가망도 없을뿐더러, 올인하려 하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안 했을 일이다. 나머지 질문들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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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